제194화. 신성드래곤 (4)
아이작의 손에 잡힌 건 가스로 이루어진 마물이었다. 마치 꼬리에 침이 달린, 작은 지렁이 같았다.
아이작이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잡아들자, 슈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뭐 하냐? 파리라도 잡았냐?”
그러자 아이작은 뭐라는 거냐는 듯, 가스 지렁이를 보여주었다.
“너, 이거 안 보여?”
“…뭐가 보인다는 거지?”
아무래도 남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독을 가진 개량형 마물이야. 술에 독을 탄 게 아니라, 직접 독으로 찌른 거지.”
그 말에 슈리는 깜짝 놀랐다. 개량형 마물은 마물에게서 해로운 마족의 기운만 빼서 세뇌시킨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가축화했다고 보면 되었다.
그리고 그런게 가능한 건…….
“마도제국?”
“아니. 하나 더 있는데.”
“뭐?”
아이작의 미묘한 시선이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슈리는 흠칫 놀랐다.
‘교황!’
동시에 슈리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연회장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샤블리스 전하가 황제 폐하의 술에 독을 탔어!”
“황위 계승을 앞당기려 한 짓인가?”
황제를 위해 술을 준비한 샤블리스가 누명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 자체가… 음모라고?
“설마, 지금 교황가가 폐하를 공격했단 거야?”
“거의 백 프로?”
슈리가 눈을 번득였다.
샤블리스는 폐하의 생신날을 위해 술을 굉장히 고심하면서 골랐다. 아이작의 추천이긴 했지만, 술을 잘 아는 슈리가 그걸 도왔고 말이다.
-부황께서 부디 좋아해 주시면 좋겠는데.
그런데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이렇게 이용하다니.
슈리가 교황가 쪽으로 움직이려고 하자, 누군가가 어깨를 잡았다. 청의 가주, 일라이였다.
그는 가면 안 된다는 듯 슈리를 붙잡으며 아이작을 보았다.
“잘 찾았다, 아이작. 네가 잡았구나.”
“할아버지!”
일라이는 아이작이 쥔 지렁이를 가져갔다. 그러곤 그걸 쥐고 힘을 쏟자, 바로 형체가 드러나며 축 늘어졌다. 마물이 죽으면서 은신이 풀린 것이다.
“아주 잘 했다. 이게 없었으면 황태자 전하가 누명을 쓰실 뻔했다.”
“그러면…….”
“범인은 다른 사람이다.”
곧 아이작이 말했다.
“할부지, 범인은 교황… 읍!”
아이작의 입을 슬쩍 막은 일라이가 미간을 좁혔다.
“추기경들도 이미 짐작하고 있다.”
“!”
일라이는 못마땅한 듯 교황을 슬쩍 노려보았다.
이 연회장에 추기경이 다섯이나 있었다.
만약 이게 샤블리스의 짓이 아니라면, 추기경들의 시선을 피해 이런 걸 심을 수 있는 건 오직 교황뿐이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말이다.
교황의 목적은 하나겠지.
‘샤블리스의 폐위.’
물론 황태자를 하찮은 독살범으로 만들어 폐위시키려는 건 아닐 것이다. 조사하면 어차피 황태자의 짓이 아님이 드러날 테니까.
그저 이건 증거품이 나오기 전까지 샤블리스를 괴롭히기 위한 여흥일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교황은 일라이가 들고 있는 지렁이를 보며 웃었다. 왜 그리 빨리 찾아냈느냐는 듯한 비틀린 미소였다.
늦게 찾아냈으면 황태자를 감옥에 가둬놓고 심문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표정이었다.
곧 지렁이를 발견한 이단심문관들이 황태자를 의심해 죄송하다며 물러났다.
그 모습에 교황은 몹시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청이 고맙게도 폐하를 습격한 범인을 먼저 찾아내 주셨군.”
사제들과 기사들이 감탄했다.
“역시 청! 바로 찾으셨군요!”
“이게 폐하를 공격한 범인이다!”
“다리에 독침 자국은 이거였나……!”
아이작은 백의 추기경에게 향했다. 그는 쓰러진 황제를 치료하고 있었다.
“추기경 각하. 폐하의 용태는 어떠세요?”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는 독은 아닙니다. 공자께서 마물을 워낙 빠르게 찾아주셔서 독 종류도 금방 파악해 해독했고요. 그 덕분에 후유증도 남지 않으실 것 같지만…….”
“같지만?”
“의식은 찾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
“가사 상태에 빠져 계신다고 보면 됩니다. 그건 정신의 영역이라, 백의 치유가 통하지 않아요.”
그 말에 아이작은 큭 웃었다.
‘역시. 황제 암살이 목적이 아니군.’
처음부터 황제를 가사 상태로 만들기 위한 것이 목적.
‘아니지. 내가 마물을 빠르게 찾지 못했으면 후유증이 생겼을 테니, 그쪽을 더 선호했겠어.’
황제의 의식을 빼앗은 뒤 하려던 짓이 뭔지는 빤하다.
‘황태자의 폐위.’
아니나 다를까. 교황은 황제를 걱정하는 샤블리스를 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이만하신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만, 안타깝군요.”
“!”
샤블리스는 움찔했다. 곧 교황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개량형 마물은 마도제국의 물건. ‘신성드래곤의 계약자’가 제 역할만 했으면 폐하께 이런 일 따위,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것을.”
“……!!”
샤블리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추기경들과 아이작은 바로 교황의 진짜 목적을 눈치챘다.
“신성드래곤은 황실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신성드래곤이 있었다면, 드래곤의 축복으로 독과 습격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전하께서 역할을 제대로 하셨으면, 아버님께선 처음부터 중독조차 되지 않으셨겠죠.”
샤블리스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이 자식, 설마…….
교황은 돌아서며 귀족들에게 말했다.
“참으로 안타깝구려. 그래서 황태자는 잘 정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며 그리 반대를 한 것이었는데. 폐하께서도 슬퍼하시겠소. 역시 인도자의 조언은 주의 깊게 들으셨어야 했거늘.”
교황의 말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폐하께서 이 지경이 되신 걸 보면 신성드래곤의 가호는 없는 거지?”
“역시 계약은 거짓말이었나……?”
“황태자를 잘못 올렸어…….”
“전에는 결계가 사라져서 제국민이 다치더니. 이젠 하다 하다 폐하까지……!”
“제국이 망하겠네…….”
귀족들의 속삭임에 샤블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교황은 샤블리스를 보았다.
“황태자 전하. 신성드래곤과 계약은 정말 하신 겁니까?”
샤블리스는 이를 뿌득 갈며 눈을 부릅떴다.
“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럼 잘 됐군요. 신성드래곤의 능력이면 단숨에 폐하를 깨울 수 있을 것입니다.”
“!”
“아니, 신성드래곤밖엔 치료 못 합니다. 그러니 불러보시죠.”
“……!”
“왜 그러시죠? 계약을 하셨으면 당장 불러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설마, 일부러 안 부르시는 건 아닐 테고. 증명해보시죠. 안 그러면 저희도 폐위를 논할 수밖에 없습니다.”
샤블리스가 울컥한 듯 오라를 뿜으려고 했다.
신성드래곤 없어도 샤블리스는 이미 소드마스터의 경지였다. 개소리를 지껄이는 귀족들 따위, 손짓 하나로 목을 자를 수 있었다.
그 분노에 샤블리스의 오라가 거칠게 일렁이자, 교황이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턱!
“!”
아이작이 샤블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샤블리스의 오라를 억누르면서 교황을 쳐다보았다.
“지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
“왜 가까이 있는 교황청 두고, 신성드래곤한테 치료를 시켜요? 교황은 그 정도 능력도 없대요?”
아이자아앍!!
모두가 기겁을 하며 아이작을 보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샤블리스의 오라를 억눌렀다.
샤블리스의 폭주야말로 교황이 바라는 것이었다. 미치광이 폭군을 끌어내리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성질 눌러라. 자식아.’
너만 한 제국 셔틀은 없거든?
그러나 아이작이 나타난 순간부터 샤블리스의 분노는 이미 가라앉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다른 쪽의 분노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아이작 에슈아.”
교황은 이럴 때 끼어드냐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그러나 아이작은 큭 입꼬리를 올리며 교황을 도발했다.
“이상하네에?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는데 왜 황태자한테 치료를 맡기지? 그럴 거면 뭐 하러 교황청의 존재가 있는 건가, 싶지 않나요? 교황청은 사람을 구하라고 있는 곳 아니었나?”
계속되는 폭언에 귀족들은 얼어붙었다.
아, 아니. 저 자식….
지금 미친 건가? 감히 지금 누구한테?!
눈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슈리는 이미 선 채로 기절했고, 추기경들은 병을 앓듯 얼굴을 짚었다.
‘…진짜 저 또라이!’
저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천하의 일라이조차 손자의 막무가내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굳어버렸다.
“그렇지 않아요? 전부 알아서 하라고 할 거면, 황실만 있음 되지. 어? 교황께서 졸라 무능하신 건가?”
이 청가놈아, 제발!
귀족들이 모두 몸을 떨 때, 교황이 불쾌한 듯 웃었다.
“지금 교황을 도발하는 건가? 개념이 없군.”
그 말에 일라이가 정신을 차린 듯 나섰다.
“맞다. 개념이 없지.”
청의 가주가 나서자, 모두가 안도했다. 젠장, 그래! 에슈아 공작이 나서는구나! 그래! 저 미친 손주 좀 어찌해 보…….
“이번 일은 교황이 너무 성급했어.”
그쪽 편이냐?!
교황한테 개념이 없다고 한 일라이가 적당히 하라는 듯 말했다.
“교황청이 옳은 길로 인도는 못 해 줄망정 무의미하게 싹을 뽑다 못해 불까지 질러 피해를 입히고 있군요.”
그러나 교황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교황청도 이미 오래 참아서 그런 것이다. 이번 일로 자칫 다른 귀족들까지 피해를 볼 뻔하지 않았는가.”
“교황의 본분을 생각하시죠.”
“썩은 싹을 뽑는 것도 교황의 본분일세.”
“!”
“그런 의미로 샤블리스의 황태자 ‘자격’에 대해서는 다같이 논의할 필요가 있어보이네.”
그때였다.
“누가 자격이 없대요?”
뭐?
아이작은 큭 웃었다.
“샤블리스 전하는 이미 신성드래곤을 소환하셨습니다.”
뭐?
“제가 봤습니다.”
뭐라고?!
아이작의 뜬금없는 말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심지어 슈리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저놈이 어떻게든 이 일에 나설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자식아, 그렇게 공수표를 막 남발해도 되는 거냐?’
그러나 아이작은 뻔뻔하게 웃었다.
“전하의 신성드래곤은 지금 제국의 결계를 보수 중입니다. 제게 그 일을 맡기셨죠.”
황태자는 아이작을 보았다.
…언제?
“몇 달 전에요. 마도제국에게 빼앗길 수 있으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내가?
귀족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청의 가주 일라이는 그런 설정으로 한 것이냐는 듯 수긍했다.
‘그래. 실제로는 없는 존재를 있는 척하는 방법도 나쁘진 않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라면 자신이 커버해줄 수 있었다.
실제로 샤블리스의 폐위를 노리고 있는 귀족파들은 혼란스러운 듯 술렁거렸다.
“신성드래곤을 소환했다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틀림없습니다……!”
“예! 눈으로 보기 전까진 못 믿겠…….”
“그럼 신성드래곤을 직접 데려오면 믿겠네?”
…뭐가 어째?!
아이작의 폭탄 선언에, 이번엔 일라이조차 얼어붙었다.
아니, 이놈 자식이! 얌마. 그건 나도 커버 못 해! 제발, 커버 가능한 선에서 사고를 쳐!!
할아버지의 미세한 동공 지진에 큭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좋다. 믿어보지.”
“예하!”
교황은 아이작을 보며 웃었다.
“당장이라도 데려 올 수 있을 것 같다니, 뭐가 문제겠소.”
“하지만……!”
“언제까지 데려올 수 있지?”
“이틀.”
교황은 인심 쓴다는 듯 큭 웃었다.
“특별히 삼 일을 주지.”
그러나 이걸로 끝낼 아이작도 아니다.
“교황께서는 뭐 거실 건데요?”
“걸라고? 이 내가?”
그 비웃음에 아이작이 눈을 번득였다.
“당연하죠? 이 정도로 의심을 하고 수고를 시켰으면, 교황께서도 뭘 거셔야죠.”
“뭘 바라지?”
“교황직을 내려놓으시죠.”
할아버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이자악! 이놈아, 그게 그렇게 맘대로 되는 자리가 아니다!
교황은 웃었다.
“신이 임명한 자리니 내 맘대로 내려오진 못하고. 대신 황위 계승에 대한 검토권을 포기하겠다.”
그 말에, 연회장이 충격을 받은 듯 크게 술렁거렸다.
“예하!”
교황청 사제들, 특히 교황파 귀족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황위 계승에 대한 승인권. 그건 교황이 가진 중대한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왜 그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황실이 교황에게 꼼짝 못 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황태자조차도 교황의 승인이 없으면 황제가 될 수 없으니까.
이는 즉, 샤블리스의 황위 계승에 간섭하지 않고, 교황의 권력 중 하나를 내려놓겠단 의미겠지만…….
“대신 못 데려오면, 네놈도 교황을 농락한 죄로 귀족 신분과 사제 신분을 영구적으로 박탈하겠다.”
“!!”
“황태자는 그 즉시 폐위고.”
그 폭탄 선언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단순히 황태자의 자격 논란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게 됐다.
‘아이작, 잘못하면 가주의 신분을 잃고 성자도 못 된단 의미다.’
그러나 아이작은 큭 웃었다.
“좋습니다. 약속이나 잊지 마시길.”
아이작이 자신 있게 돌아서자, 슈리가 당황한 듯 붙잡았다.
“아이작! 너 괜찮은 거 맞아?!”
“나만 믿어.”
아이작이 입꼬리가 귀에까지 걸렸다.
좋아. 이 새끼. 딱 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