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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10화 (210/272)

제210화. 번쩍 번쩍 번쩍 (1)

생존 기원.

그래, 이놈을 믿어서 해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지. 오히려 이놈 덕분에 마왕이 되고, 온갖 위기의 순간에 살아남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물며 인간이 되어 생존의 힘을 100% 쓰게 된 지금이라면, 해골왕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힘을 발휘하겠지.

신과 교황을 상대하게 될 땐 이놈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

그러니 믿는데…….

번쩍번쩍번쩍번쩍!

‘아아아앍! 그래도 역시 이건 아니잖아아아!’

아이작 번쩍이는 멜리사의 일기장을 부여잡으며 데굴데굴 굴렀다.

혹시나 일기장이 아니라, 다른 물건이 아닌가 싶어 슬쩍 치워보기도 했지만-

버어어어어어어어언쩌어어어어어억!

어림도 없다는 듯 일기장은 장엄한 빛을 뿜어냈다.

결국 아이작이 머리를 벽에 쾅쾅 박자, 슈리가 굉장히 이상하게 보았다.

“그거 황실에서 가져온 거지?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절대 안 보여주고. 도대체 뭔 책인데? 나도 같이 좀 보…….”

“됐어!”

아이작은 결국 일기장을 들고 도망쳐 나왔다.

‘시바. 읽는 것도 괴로운데, 다른 놈들까지 보여줄 것 같냐.’

그는 바로 에슈아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주만 이용할 수 있는 구역이었다. 자신은 특별히 허락받았다.

“후, 여기라면 아무도 안 오겠지. 딱 한 번 읽을 거니까, 자료 조사도 같이 할 수 있는 곳이 좋을 거고.”

아이작이 책을 꺼내 들자, 위스퍼는 신난 듯 씰룩거렸다.

[흐흐흐, 드디어 읽으시는 겁니까?]

닥쳐, 입 찢어버린다.

표지를 넘기자, 미쳐 날뛰던 망아지 빛은 그제야 쑤욱 얌전해졌다.

그리고 첫 장을 펼치니, 낯익은 필체가 보였다.

-81대 성녀, 멜리사 에슈아가 전대들의 의지를 이어 해골왕을 없앨 것임을 맹세합니다.

맹세는 개뿔, 못 죽였잖아.

-저는 마음 약한 전대들하고는 다릅니다. 인간이 아닌, 드래곤의 혈육으로서 반드시 그 사악한 대머리를 조쟈버릴 것입니다.

실패했잖아!

그 사악한 대머리, 못 조졌잖아!

-말로만 듣던 해골왕을 처음 만났습니다. 듣던 대로 치졸하고, 못생기고, 냄새나는 해골빠가지였씁니다.

시바, 냄새나면 오지 말라고!

왜 꿋꿋하게 잡으러 오는 건데!

‘그보다 이 자식, 날 처음 만나러 왔을 때, 몇 살이었지?’

[글씨체를 보니 굉장히 어릴 때부터 쓴 것 같네요.]

뭐, 생각해보니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 멜리사는 좀 어리긴 했지. 11살짜리 성녀 정도는 아니었지만, 13살 정도였나?

하지만 하프드래곤이 5년 만에 십 대 모습으로 빠르게 성장하다가 아주 천천히 노화하는 걸 감안하면, 겉보기보다 훨씬 더 어렸을 수도.

-빌어먹을, 오늘도 버러지 같은 해골왕과 결판을 내지 못했다.

뭐, 뒷장으로 갈수록 점점 글씨체가 어른이 되어가지만 말이다.

동시에 아이작은 크게 안도했다.

‘휴. 이 정도면 걱정할 것 없겠어.’

앞부분만 봐도 멜리사의 분노는 잘 알겠다. 그리고 얼마나 자신을 싫어했는지도 말이다.

‘멜리사와는 앞으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데, 다른 성녀들이랑 똑같은 게 나와봐라. 얼마나 민망한 줄 아냐!’

하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부분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정말 다행…….

-의외로 좋은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엉?

-이름은 이사악이라고 했다. 자꾸 묘하게 이름이 마음에 남는 것 같기도.

어엉??

-이사악은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그가 하는 생각이 궁금해진다.

아니, 잠깐만?!

-더러운 해골인 줄 알았는데, 좀 멋진 면모도 있는 것 같기도.

야!!!

잠깐, 잠깐, 잠깐잠깐!

이러면 안 되지! 야!!!

이 멍청아, 호감 갖지 마! 얘, 해골왕 버러지야! 쓰레기라고!

아이작이 절규했지만, 위스퍼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거렸다.

[푸흡, 역시 주인님께 호감을 품기 시작했군요.]

아니야아아! 이거는… 그래, 그러니까 그거야!

나쁜 놈이 딱 한 번 착한 짓 했다고 사람이 다르게 보이는! 그 효과라고! 그냥 호기심!

-이사악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줬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

아아악, 시벌!!!

얘가 기어이 강을 건너… 아냐! 아냐! 아직 희망은 있어! 이건 그거야, 해골이 말하는 게 신기해서 잊지 못하는…….

-이사악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자꾸 신경 쓰인다. 녀석도 내가 안 보이면 조금은 관심을 가져줄까?

아아아악!!!

안 돼! 그 길, 가지마아아아아!

-이사악이 좋다. 지금도 그가 보고 싶다.

아이작은 결국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쓰러졌다.

쿵!

“쿠흪럵허럵 쿠러허럭허럵.(시벌…. 멜리사 너마저 날 배신해……?)”

혼이 나가는 듯한 주인의 모습에, 위스퍼는 웃겨 죽으려고 했다.

[마저 읽으셔야죠, 아직 주인님이 궁금해하시는 정보는 안 나오지 않았습니까?]

쓰러진 아이작은 각혈하듯 비틀거렸다.

‘필요… 없어! 이제 충분해!’

[어? 괜찮으십니까? 레아의 서신에서 주인님의 위기가 감지되셨다면서요.]

생존 기원은 오직 아이작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에, 위스퍼는 이에 대해 잘 모른다. 단지 주인이 감지하는 위기는 백 프로 확실하다고 판단할 뿐이다.

[그 답이 멜리사 성녀의 일기에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끝까지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에, 아이작은 쿨럭쿨럭 피를 토했다.

됐어. 사내대장부가 되어가지고, 그깟 위험! 예견 안 해도 돼! 그냥 부딪친다! 때가 되면 몸으로 때워!

[주인님, 몸으로 때우는 건 변태 성기사들뿐이라면서요.]

됐어!!! 나 이제 성기사 가문 사람이얅!!

수틀리면 나도 이제 몰… 응?

반짝!

뭐지?

그냥 죽자고 선언하니, 생존의 빛이 갑자기 특정 페이지에서 반짝거리… 뭐가 어째?!

아이작의 입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새끼, 어느 페이지인지 골라서 알려줄 수 있는 거였냐아아아!’

진작 알려주든가, 개객기야!

눈 버렸잖아!

‘내 할머니의 첫사랑이 나라는 것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고!’

아이작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부여잡았다. 그는 재빨리 페이지를 넘겼다. 빛나는 페이지는 중반쯤이었다.

-이사악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죽이지 못했다. 그는 한 인간 아이를 구하는 중이었다. 신들이 벌인 전장 한복판. 모두가 혈안이 되어 마족만 찾아다닐 때, 오직 그만이 신과 우리가 응당 지켜줘야 할 아이를 구해주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글귀에 기억이 난다는 듯 탄식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있었지.

신의 천사들이 쳐들어왔을 때, 인간들이 싸움에 휘말렸던 적이. 유목민 부족이었던 거 같은데, 부자(父子) 하나가 액화된 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너무나 막강한 신의 힘과 마기가 뒤섞여, 죽음의 땅으로 변했던 곳이었다. 인간은 절대 못 살아남는 땅.

아무튼, 그때였다면 죽일 기회가 맞긴 하네. 신의 힘 기운이 강해서, 자신은 힘을 못 쓰던 장소였으니까.

그곳에서 멜리사의 공격이 날아왔으면, 소멸당했을 것이다.

-신들이 말했다. 네가 절호의 기회를 놓쳤기에 해골왕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해골왕이 그 인간 부자에게 아량을 베풀 때를 이용해, 죽였어야 했다고.

-네 행동 하나로 미래의 수많은 생명이 죽었다고. 너 때문에 악을 처단하지 못했다고. 손실을 감수하며 널 키운 게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고.

-진짜 악은 누구인가. 진짜 인간 땅을 짓밟은 것은 누구인가…….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그를 죽이지 못했다. 아니 죽일 수가 없었다. 나는 신들에게 의문을 품는다.

-신이시여, 정녕 해골왕은 죽어야 하는 자가 맞습니까? 그는 정말 존재하면 안 되는 악입니까?

-이사악이 갑자기 사라졌다. 신들은 네가 미련하게 해골왕을 처리하지 못하니, 직접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디 이사악이 살아남길 바라. 이젠 그냥 그가 살아있기만 했으면 좋겠어.

-70년 만에 이사악이 돌아왔다. 하지만 에슈아에 저주를 내린 뒤 사라졌다. 그 저주로 인해 에슈아의 수많은 아이가 죽었다고 한다.

-신의 가호는 사라졌다. 이건 모두 내가 신을 의심한 것에 대한 대가인가? 해골왕을 처리해야만 신께서 용서를 해 주실까?

-모든 게 나의 죄이며, 벌이다. 결국 관례대로 아버지를 잡아먹고 성녀의 힘을 얻었지만, 성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에슈아가 고통받는 건, 모두 내 책임이다…….

이에 위스퍼는 혀를 찼다.

[허어, 신 놈들. 어지간히도 하네요.]

‘뭐, 그런 놈들이니까.’

[청의 신이 갈군 걸까요?]

‘아니, 여기서 말하는 신들이란 건, 금의 신들일 가능성이 높아. 교황하고 만났을 테니까.’

[그래도 주인님, 이제 각혈 안 하시네요?]

‘하겠냐? 사랑이 끝났는데.’

아이작은 보란 듯 푸흐흐 콧대를 세우며 일기장을 가리켰다.

-에슈아에서 내게 다시 돌아와달라고 했지만, 믿을 수 없다. 이사악이 인간에게 잔인한 저주를 남기고 사라지다니. 믿을 수 없다. 절망적이다.

휴. 그래! 드디어 이 낯 뜨거운 사랑 얘기가 끝났군!

그래도 가짜 해골왕 덕분에 애정과 집착이 식어서 다행이었다.

이걸로 멜리사도 정신을…….

-찾아낼 것이다. 반드시 다시 찾아내 녀석의 마음을 확인할 것이다.

뭐, 인마?!!

-지옥 끝까지 쫓아가 멱살을 잡고 속내를 확인할 것이다!! 확인하고 되돌려 놓을 것이다!

아니, 뭘 되돌려!

왜 집착이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는데?!!

잊으라고 조옴!

[원래 첫사랑은 평생 가는 법이죠. 푸흐흐흐흐흐흐.]

안 닥쳐?!

하지만 아이작은 이를 갈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부분은 그렇다 쳐도, 유독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관례대로 아버지를 잡아먹고 성녀의 힘을 얻었지만…….

성녀의 힘을 얻는 건 알겠다.

그도 그럴 게, 성녀는 9계위가 되면 정식 즉위 의식을 치렀다. 그 의식에서 신께 힘을 받고 각성을 해, 해골왕을 죽일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9계위인 성녀가 10계위의 힘을 얻어, 비로소 10계위인 해골왕과 싸울 힘을 갖출 수 있었다.

교황이 신을 소환하는 성법을 가지듯, 그 또한 성녀의 필살기로서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마지막 성녀인 멜리사 대에 와서는, 자신도 아차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를 잡아먹고’는 뭐지?’

[헐, 이 성직자 놈들, 설마 인육을?!]

‘그럴 리가 없잖아. 다른 의미야.’

아이작은 큭 웃었다.

직감이지만, 아무래도 치졸한 교황가 놈들이 노리는 게 이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예상 가는 게 있긴 한데, 할부지한테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어.’

만약 예상이 맞는다면, 놈들의 통수를 칠 수 있는 꼼수가 하나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아앗, 주인님! 뒷장까지 읽어보시죠! 흐흐흐흐.]

위스퍼는 뒷장을 향해 군침을 흘리며 변태처럼 웃었다.

[이거이거, 첫사랑은 평생 안 잊힌다더니 정체를 들키시면 아주아주 그냥… 푸흐흐흐흐! 궁금하시죠? 어서 읽어보세요!]

찌발, 안 읽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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