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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12화 (212/272)

제212화. 관례는 무슨 (1)

“예? 레아가 9계위가 되었다고요?!”

뜻밖의 기쁜 소식에 에슈아는 발칵 뒤집혔다.

“드디어! 그 아이가 9계위가 되었군요!”

“가모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장로들과 원로들도 모두 날뛸 듯이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게, 성녀 가문에서 성녀의 각성이 어떤 의미인가. 모두의 염원이었고, 교황과 맞먹는 실질적인 힘이었다.

“16년간 공석인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예, 10계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위상이 달라집니다!”

“드디어 우리도 성녀가 없다고 무시당하지 않겠구나!”

교황청에서 보내온 소식에 노엘은 벤야민에게 다가갔다.

“카야도 9계위가 바로 눈앞인데, 저희가 한발 늦었네요. 축하드립니다, 형님.”

“그래. 고맙다.”

그러나 릴라이는 서신을 확인하는 벤야민을 의아한 얼굴로 보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굉장히 기뻐하고 있지만, 어딘가 묘하게 슬픈 얼굴이다.’

왜지?

누구보다 레아가 성녀가 되길 바랐던 벤야민이 아니었던가?

왜지?

정식 성녀가 되면, 본격적으로 해골왕과 싸우러 가기 때문인가? 레아가 목숨을 잃을까 봐?

아니, 이상한 건 따로 있다.

“장본인이 안 보이는군. 레아는?”

“…그게, 실은 레아 아가씨께선 서신을 받고는 곧장 교황청으로 향하셨습니다.”

“오오! 정식 성녀가 되어 기쁜 모양이구나. 적극적이야!”

장로들은 무척 기뻐했지만, 말을 전달하는 성기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기뻐하시기보단 정말 새하얗게 질리셔서… 아가씨의 그런 얼굴은 난생처음 봤습니다.”

“교황청에는 왜?”

릴라이의 되물음에 기사가 살짝 속삭였다.

“그게, 9계위는 착오라고…….”

엥? 착오??

역시 이상하다.

게다가 제일 이상한 건… 이거다.

쿵쿵쿵!

“!”

저택에 있는 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훈련 중이던 기사들은 물론이고, 외부 임무반까지 갑자기 돌아와 장비를 챙기고 있다.

청의 기사들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인 릴라이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경례까지 올려붙이는 것이 아닌가!

“릴라이 님! 청의 기사들 전원, 가주님의 소집 명령에 응했습니다!”

“선발대는 이미 베리트가로 향했습니다!”

“……???”

이거는 또 무슨 소리야?

가주의 소환 명령이라면 청의 최고 명령이다. 당연히 청에 속한 모든 성직자들이 모든 일을 즉시 멈추고, 이 최상위 명령에 움직이지만…….

“아버지가 기사들을 소환하셨다고?”

자신한테는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명령 단계는? 잠수(Dive)인가?”

“아뇨. 브리칭(Breaching)입니다.”

바다 위로 뛰어오르기? 전면전 태세라고?

“히트런(Hit-run) 단계까지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

그 말에 다른 에슈아 사람들도 충격을 받았다.

브리칭은 고래가 수면 위로 높이 뛰어오르는 행위로, 공격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라는 청의 용어지만, 이건 방어전 때도 종종 사용한다. 즉, 은밀기동 상태인 ‘잠수’와 함께 자주 겪는 단계였다.

하지만 히트런은 다르다. 이는 고래들이 새끼 고래를 지키는 행동처럼, 매우 흉포하게 맹공격을 퍼붓는 기습 대열이다.

그런데 그걸?

심지어 목적지가 베리트… 교황가라고?!

“대체 왜?”

그 의문에 답하듯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제가 그쪽으로 가 달라고 했거든요.”

“?!”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아이작이었다.

아이작은 당당하게 나타나 가족들에게 말했다.

“할아버지께 교황의 ‘스티그마’를 회수해달라고 했어요.”

“뭐라고? 스티그마를?!”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스티그마는 교황의 증표이자, 신을 소환할 수 있는 성물이었다.

교황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물건을 빼앗아 오라고 했다고?

정녕 미쳤나?

그러나 아이작은 같잖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교황의 상징이지만, 그와 동시에 신성제국 황제와 동일한 권력을 가진 물건입니다. 제국 최고 권력자의 증표인데, 그걸 가짜 의혹이 있는 자에게 맡길 순 없잖아요? 그래서 안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전쟁을 하신다고 해서, 그쪽을 추천 드렸죠.”

뭐라고?!

물론 상황과 명분상으로는 틀린 말은 아니나, 기가 찬 이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엘이 아이작의 멱살을 잡을 듯 다가왔다.

“이 미친놈이! 교황의 물건을 빼앗아 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느냐? 전 신앙을 적으로 돌릴 셈이야?”

그러자 아이작이 풉 웃었다.

“적으로 돌린다고요? 적가하고 백가도 적극 도와준다고 했는뒈요.”

“…뭐라고?”

“그리고 잊었습니까? 저는 적의 추기경으로부터 수사권을 받아냈습니다. 뭔 짓을 해도 된다고요.”

[에엥, 전쟁을 하라고는 안 한 것 같은데요.]

‘하지 말라고도 안 했거든? 그리고 상황이 안 좋아지면 전부 적한테 뒤집어씌울 거지롱.’

[어으, 적의 추기경이 주인님의 이 본색을 알아야 하는데.]

‘이미 알걸? 그렇게까지 당했는데, 모르면 븅딱이지.’

그러자 말문이 막혔는지, 노엘이 말을 돌렸다.

“지금 레아의 즉위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느냐. 교황의 스티그마가 없으면 성녀 의식을 치르지 못한다! 각성의 신을 소환 못 한다고!”

성녀 각성은 신을 소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신성제국에서 신을 완전하게 현신시킬 수 있는 건 오직 교황의 성법뿐.

그런데 교황의 힘을 빼앗아? 아이작의 이 말은, 성녀를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였다.

“너는 소가주가 되어서,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 거냐? 에슈아에게 성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

“허.”

아이작은 실소를 숨길 생각도 안 했다. 그는 도리어 혐오스러운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문을 위한 척 말고, 그냥 솔직히 말하시죠? 벤야민 숙부님을 죽이고 싶다고.”

“……!!”

노엘은 드물게 움찔했다.

아이작은 같잖다는 듯 웃었다.

니 새끼는 내가 건수만 잡으면 바로 조져주마.

하지만 말한 보람은 있는지, 릴라이와 다른 장로들이 당황한 듯 물었다.

“아이작,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게 형님과 무슨…….”

“뭐, 애초에 이상했어요. 의혹을 받고 있는 교황 놈이면 얌전히 처박혀 있어야지. 뜬금없이 왜 이 타이밍에 성녀 각성식이야? 딱 봐도 구려.”

“!”

“아무래도 본인이 조사받는 입장이라는 걸 모르나 봐요. 그러니 직권이 아니라, 그 힘까지 중지시켜야 정신을 차리지.”

이 자식이……!

“그런 의미로 성녀 각성은 미룰 겁니다.”

곧 노엘이 뭐라고 하려고 할 때, 벤야민이 먼저 나섰다.

“아이작, 행동이 너무 과하다.”

“!”

“너도 잘 알겠지만, 성녀 각성은 중요하다. 그 즉위까지 막을 필요는 없어. 왜 이런 철없는 선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가주가 됐으면 넓은 시야를 가져라. 다짜고짜 교황을 친다니, 생각이 너무 짧아.”

벤야민이 엄하게 혼을 냈지만, 아이작은 오히려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숙부님.”

“……?”

“제가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세요?”

“……!”

그 눈빛에 뭘 깨달은 건지, 흠칫 놀란 벤야민은 황급히 아이작을 데리고 나왔다. 그러곤 그는 바로 다그치듯 물었다.

“뭘… 아니,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흠. 할부지한테 들었으니까, 전부?”

벤야민은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아버지가 왜 갑자기 기사들을 소환해 베리트로 쳐들어가겠다고 한 건지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작에게 몹시 화가 난 듯했다.

목적은 틀림없이 성녀 각성을 막으려는 거겠지. 산 제물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네가 어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성녀 가문에서 태어난 자의 의무이며 사명이다. 방해하지 마라.”

아이작은 빡친 듯 눈썹을 치켜떴다.

방해? 자식이 지금 방해라고 했냐?

“무슨 의미죠?”

벤야민은 속이 끓는 듯 말했다.

“나는 에슈아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능력이 없어서 형님… 네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도 그 자리를 이을 수 없었다.”

“!”

“나만 제 역할을 했으면 아버지도 가문도, 가주 문제로 골치 썩을 일도 없었을 텐데.”

아, 뭐야. 그런 거야?

그러니까, 아마 벤야민도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차남이면서 가주 자리도 이을 수 없고, 행정적으로 조카들을 전폭 지원해줬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을 것이다. 0계위로 태어난 본인을 저주했겠지. 교황가가 설치는 꼴을 눈으로 보기만 해야 했으니까.

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긴 하지만.

-어이고, 능력이 안 돼서 가주 자리도 못 잇는 머저리 차남도 같이 있으셨어?

이복동생한테까지 쓰레기 취급을 받으면서, 얼마나 굴욕이었을까. 장남이 사라진 시점에서 사실상 장자의 역할을 해야 했던 그였기에 더더욱.

아니나 다를까, 벤야민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성녀 각성은 쓸모없는 나도 유일하게 가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방해하지 마라. 이건 내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숙부를 보는 아이작의 눈은 서늘했다.

“거기에 레아의 의견은요?”

“…뭐?”

아이작은 도리어 숙부를 혼내듯이 말했다.

“레아는 이번에 9계위가 된 게 아니거든요. 추측이지만 꽤 됐을걸요. 최소 5년?”

“뭐라고?”

“그런데 그걸 왜 여태 숨겼겠어요? 정식 성녀만 되면 본인한테 좋을 텐데. 가문의 명예와 맞바꿀 정도로, 해골왕보다 하나뿐인 가족이 소중한 거잖아요?”

“……!”

그 말을 들은 벤야민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레아가 각성에 대해서 아느냐?”

“레아가 왜 교황청에 착오라면서 달려갔겠어요? 아마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알았을걸요? 성녀 수업에 원래도 소극적이었다고 하니까.”

“……!”

벤야민은 작게 탄식했다.

짐작 가는 때가 있긴 하다.

9살쯤이었나, 그렇게 성녀를 동경하며 성법에 열성적이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훈련에 소극적인 태도가 되었지.

‘설마 죽은 아내와 했던 말을 들은 건가.’

성기사였던 아내는 자신의 뜻을 이해해줬지만 말이다.

그래서 자신은 훈련에 소극적인 레아에게 더욱 성녀가 되어야 한다고 다그치고 교육시켰지.

그 말을 들으며 훈련할 때마다 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필 저주받은 세대를 지나, 가문에 처음 태어난 여아라서 책임이 더 막중했을 텐데.

아이작이 말했다.

“저나 할아버지나, 그 방법으로는 각성을 안 시키려는 거에요.”

그래, 산 제물은 뭔 놈의 산 제물? 할 거면 더 좋은 방법으로 해야지. 신의 힘을 뽑아내든가, 아니면 교황 놈을 산 제물로 내던지든가.

“…다른 방법이 있고?”

“아마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솔직히 해결해야 한다.

이대로 벤야민을 바쳐서 각성시킨다 한들, 레아가 오히려 흑화할 수도 있었다.

‘암흑 성녀는 안 된다.’

어쩌면 생존 기원이 경고한 게 이건가?

‘에이 그게 맞든 아니든 알게 뭐여. 어차피 해결할 건데, 뭐.’

“그러니 절 믿으세요. 숙부님은 절대 죽으시면 안 돼요. 전 숙부님이 없음 안 됩니다.”

조카의 말에 벤야민은 꽤나 감동했다.

“아이작. 네가 날 그리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

“알았져? 전 제 돈줄, 아니 숙부님을 반드시 살릴 거에요.”

이 집안에서 쓸 만한 건 오직 너뿐이란다.

다른 놈들은 해골왕 바보라 돈 만지면 가문이 망해!! 나는 부자 가문 가주가 좋아!

“그러니까 몸 관리 잘하시구여. 몸이 튼튼하셔야 죽을 때까지 내 밑에서 굴려 먹을 수… 아니, 레아도 기뻐할 거고요.”

그 말을 한 아이작은 벤야민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쑥부님. 제가 반드시 해결 방법을 찾을 테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제 노예… 아니, 레아의 아버지로서 행복하게 사셔야죠.”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만 무일푼으로 일하자?

“눼? 알았져??”

“…….”

벤야민의 얼굴이 볼만했다.

…이 자식, 진짜 나 생각하는 거 맞지?

정말 불순한 의도 없는 거 맞지?

어?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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