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관례는 무슨 (2)
“하하. 하하흐하흐하핳.”
벤야민은 멘붕 중이었다.
릴라이는 그런 형을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차마 미치셨냐는 말은 못 했다. 그 정도로 맛탱이가 가 보이는 듯한 벤야민은 심각하게 두 손을 모았다.
“아무래도 소가주 교육이 필요… 아니, 소가주를 다시 뽑아야 할 것 같다.”
“예?!”
릴라이는 기겁했지만, 정작 벤야민은 얼굴을 부여잡으며 절망했다.
“아이작이 비뚤어졌어…….”
“예에?!”
“그 아이 인성이 바닥인 건 알았는데, 이건 바닥 수준이 아니야. 어디서 영혼이 바뀌어 온 게 틀림없어…….”
“혀, 형님?”
“해골왕의 영혼이라도 들어갔나?”
“예?! 아무리 형님이라도 그런 심한 말씀을……!”
그러나 벤야민은 속내를 숨기지 못한 아이작의 말을 듣곤 근심이 쌓이는 모양이었다.
“노예, 노예라니……!”
이거, 성녀 각성이 급한 게 아니라, 가주 교육이 급한 거 아닌가?!
적의 추기경이 왜 아이작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이래서야 청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산 제물로 가지도 못하겠다.
“뭔데 가주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아이작이 숙부에게 노예가 되라고 했다.”
팔불출 릴라이는 푸핫 웃었다.
“당연히 농이죠. 우리 아이작이 얼마나 착하고, 순수하고, 맑고, 깨끗하고… 이보다 천사 같은 아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한 아이인데요.”
아닌데? 그건 진심인 눈이었는데?
진짜로 숙부, 아니 청 전체를 낼름 할 마왕의 눈이었다.
하지만 릴라이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물었다.
“형님. 그래서 아이작이 말했던 건 뭡니까? 성녀를 각성시키는데 왜 형님이 죽어요?”
그 질문에 벤야민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이놈이 왜 아버지나 청의 기사들을 안 따라가고 저택에 남았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그래. 아이작이 알고 레아까지 안다니, 이젠 숨길 것도 없겠지.”
“!”
곧 벤야민에게서 성녀 각성법에 대해 들은 릴라이는 새하얗게 질렸다.
“예에?! 성녀의 각성 조건이 그거라고요?!”
정식 성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머니의 표정이 안 좋아졌던 건 그 탓이었던 건가!
“그, 그럼 아이작은……!”
“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쓰려는 거지.”
그 말에 릴라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른 방법이 있는 거군요?!”
“모른다.”
“예?”
“사실 예상도 안 간다.”
“예?!”
벤야민은 끄응, 미간을 짚었다.
사실 아버지 쪽은 예상이 갔다.
‘아버지는 스티그마를 빼앗아서 성녀 각성을 보류할 생각이시겠지.’
아버지는 해골왕을 잡는 사명을 멈추면 된다고 하실 분이었다.
아마 아버지도 특별한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있었으면 진작 말씀하셨겠지. 자신도 그래서 각오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작은 다르다.
‘아이작은 성녀 각성도 시키고, 해골왕까지 잡으려 하고 있다.’
물론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어떤 마법을 부릴까, 기대하고 찬양했겠지만…….
-쑥부님. 제가 반드시 해결 방법을 찾을 테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제 노예… 아니, 레아의 아버지로서 행복하게 사셔야죠.
“…아이작은 뭔 짓을 할지 상상도 안 간다.”
아니, 솔직히 무섭다!
“솔직히 교황의 모가지를 따서 교황을 산 제물로 바치겠다고 해도 안 이상해!”
“서, 설마 그럴까요.”
“그렇지? 그래, 설마 안 그러겠지?”
* * *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슈리는 지금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시바…. 아이작 이 새끼, 지금 제정신이야??’
-교황 모가지 딸 준비해.
…이 미친 새끼야!! 난데 없이 이 쪽지는 뭔데!
슈리는 핏대를 세우며 아이작의 서신을 찢었다. 행여라도 누가 볼까 봐 바로 태웠다.
이게 무슨 농인가 싶지만,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다.
“슈리님, 전원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
그들은 지금 베리트의 영토에 있었다. 그리고 청의 기사 중 아이작의 개인 노예들… 아니, 소가주 직속의 기사단, <귀신고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교황의 목을 딸 수 있다며 눈을 번득였다.
“교황…! 신입을 막은 이 원한은 잊지 않겠다!”
“드디어 모가지를 따는구나앍!!! 프하하핳!”
“캬! 도륙을 내주마!”
…이게 성직자인지, 마왕군인지. 어휴.
그래서 여기엔 왜 왔냐고?
-교황은 지금 베리트 영지의 별장으로 피신 중이야. 새끼가 교황청에 있자니, 의심의 눈초리를 받긴 싫었나 보지? 푸흐흐.
뭐, 정확히는 별장이 아니라, 베리트에 있는 수도원이지만…. 아무튼 교황이 베리트에 왔기에 온 것이었다.
-그것도 혼자 쫄래쫄래 왔지. 푸흐흐.
그래, 혼자 온 건 좋은데.
그런다고 목을 따라고 하냐? 이 미친 새끼야?
교황이 있는 수도원에 들어온 슈리는 이를 갈았다. 자신들은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청의 기사들은 이미 근처에서 베리트의 기사들과 대치 중이었다.
캉! 카앙!
“으악!”
“커헉!”
쾅! 쾅!
이곳저곳에서 비명 소리와 수도원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슈리는 단번에 알았다. 그 비명 소리들은 전부 금의 기사들의 것이란 걸.
실제로 금의 기사들도 청의 습격에 몹시 놀란 듯했다. 설마 다른 곳도 아닌 청이 선공을 해 올 줄은 몰랐지만, 기사들의 실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했기 떄문이다.
“젠장! 배척의 결계를 발동해라!”
“이것들이 어디서 튀어나와서… 으악!”
“크윽! 또 사라졌어!”
괜히 최전방에서 단련된 기사들이 아닌지,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베리트 영지의 작은 수도원. 본청보다 인력이 적은 만큼 기습에 피해가 컸을 수도 있지만, 금의 성직자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크윽! 이 새끼들, 어떻게 베리트까지 들어왔지?!”
“전혀 기척을 못 느꼈는데!”
금은 결계와 방어에 특화된 신앙이었다.
그만큼 평소에도 베리트 영지의 경계에는 출입자를 감지하는 결계가 쳐져 있었다. 그 누구라도 베리트 영지에 들어오면 바로 눈치를 챌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신앙의 사람이면 더더욱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결계에 안 걸렸지?”
“어떻게긴 어떻게야. 그러니까 착하게 살았어야지.”
“!!”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쾅!!
푸른 폭발에 휩쓸린 금의 기사들이 쓰러졌다. 슈리는 새하얗게 질려서, 기사들을 날린 장본인을 보았다.
“너 미쳤냐! 마족한테 갈기는 파괴 성법을 어디 성직자한테 갈겨?!”
청에서 엄금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살법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공격을 해도 대인 전용이 있잖아! 그걸 쓰라고!”
그러자 아이작은 네가 그래서 그 모양인 거라며 쯧 혀를 찼다.
“응, 저 새끼들 마족의 수하임. 내 눈엔 다 보임.”
이 새끼, 성자가 되면 그냥 죄다 마가 씌웠다고 할 놈일세.
슈리는 이마를 짚었다.
“너, 이거 알면 할아버지한테 혼ㄴ…….”
“아이작.”
“!!!”
뒤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슈리가 흠칫 놀랐다. 그는 일라이의 무서운 얼굴에 얼어붙어서는 입만 뻐끔거렸다.
“가, 가주님. 이거는… 그러니까!”
“하려면 증거가 안 남게 해야지.”
쾅!!
일라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방 하나가 그냥 통째로 날아갔다.
슈리는 비명을 질렀다.
“살법을 쓴 증거는 잘 처리해라.”
저, 저기요? 할아버지?
증거가 남지 않다 못해, 아무것도 안 남았는데요. 건물이 그냥 사라졌는데요?
그러나 일라이는 대수롭지 않게 앞장섰다.
“어차피 이 정도로는 안 죽는다. 1년 정도는 의식을 잃고 있겠지만.”
…저기, 그쪽이 더 문제 아닌가요?
슈리는 금의 기사들의 뺨을 철썩철썩 쳤지만, 일어날 생각을 못 했다.
곧 아이작이 양심에 찔려 하는 슈리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쟤들도 바보는 아니라 한 방에 끝내야 해. 어설프게 봐주면 오히려 싸움이 길어져서 무의미한 살생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기껏 황실이 신나서 적극 도와주고 있는데 이쯤은 갈겨줘야지.”
“!”
사실 자신들이 베리트 영토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황실의 공이었다. 기습에 성공하도록 베리트 영토의 결계를 뚫을 위장 마법을 걸어준 것이다.
‘역시 드래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금의 추기경이 이곳에 원군으로 도착하기 전에 빠르게 교황을 치고 빠져야…….’
그 순간이었다.
쾅!!
“!”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던 그들이 흠칫 놀랐다. 큰 폭발음과 함께 예배당 쪽의 문이 박살 났다. 누구의 짓인지는 볼 것도 없었다.
‘큭……!’
찌르르한 성력에, 슈리는 얼어붙었다.
이만한 성법을 쓸 수 있는 건 이 제국에서 단 하나.
“청한테 이런 쥐새끼 같은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거늘.”
‘교황!’
아무래도 소란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예배당 안쪽에서 교황이 나오자, 일라이가 바로 손자들을 뒤로 보냈다.
“너희는 입구를 막아라.”
이쪽으로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였다. 교황하고 붙는 순간, 그 주변은 피바람이 불 것이란 의미였다.
동시에 아이작은 슈리를 끌고 가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휴, 그러니까 김슈리. 내가 쪽지 보냈잖아. 진작 교황 목 좀 따두지.”
뭐가 어째?!
슈리가 기가 찬 듯 보자, 아이작이 슈리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역시 너한테 목 따는 건 무리였나?”
슈리는 멱살을 잡으려다가 말았다.
“됐으니까 입구부터 막자. 금의 추기경이랑 금의 원군이 수도에서 도착하기 전에 끝내야 해.”
할아버지한테 가게 냅둘 순 없었다.
“릴라이 숙부님한테 어디쯤이냐고 물어볼까?”
“아니, 릴라이는 안 와.”
“!”
릴라이는 일부러 배치를 안 시킨 것이었다. 벤야민이 쓸데없는 생각 못 하도록 붙잡고 있으라고 한 것이다.
‘레아는 백의 추기경한테 부탁해놨으니 괜찮겠지.’
자신은 성녀 각성을 위해서 온 것이지만 말이다.
‘자, 그럼 금의 추기경이 수도에서 몰려오기 전에 거기로 가볼…….’
그런데 그때였다.
쾅!
입구 쪽에서 금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나타난 인물을 보고는, 슈리는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키나였던 것이다.
‘벌써 수도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키나는 드물게 빡친 듯 아이작과 슈리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청이라도 이리 선을 넘을 줄은 몰랐는데. 감히 교황을 습격 해?”
아이작은 예상했다는 듯 슈리를 밀었다.
그가 괜히 슈리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쟨 나 대신 니가 막아라.”
“뭐? 미쳤어? 내가 쟤를 어찌 막아!”
“이걸 써라.”
아이작은 슈리의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굉장히 수상한 물건이었다.
“뭔데 이게?”
“절대 공격 못 할걸.”
“이건 뭐냐고!”
“날 믿어.”
믿겠냐?!
“그보다 너는 뭐 하려고!”
“이 몸은 따로 하실 일이 있으시다.”
아이작은 푸웁, 웃으며 쌔앵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