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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14화 (214/272)

제214화. 관례는 무슨 (3)

“그럼 저놈 맡고 있어라. 나는 역대 교황의 방에 볼일이 있어서.”

아이작이 순식간에 그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그 광경에 키나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청이 금을 습격했다는 말에 제 귀를 의심했던 그였다. 심지어 그 주동자가 아이작인 것 같다는 말에는 뒤통수를 맞은 충격이었다.

물론 금과 청이 사이가 좋을 수는 없겠지만, 그간 아이작에게 보여준 호의가 있는데.

황태자와 낼름 손을 잡고 교황가를 쳐내려는 것으로도 모자라, 교황이 혼자 머무는 작은 수도원을 노리다니!

이게 정녕 청렴한 청이 할 짓인가?

심지어 역대 교황의 방이라니!

‘설마 저 자식, 노리고 있는 게……!’

교황이 왜 하필 이 수도원에 왔겠는가. 베리트 영지의 각 수도원에는 역대 교황들의 유품이 흩어져 있었다.

그 유품이 베리트 영지를 지키는 결계의 핵들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건 역대 교황 중 가장 재위 기간이 길고, 그만큼 해골왕과 골이 깊은 실베스테르 교황의 물건이 있었다.

한마디로 중요한 곳이란 의미다.

‘본청에 있는 역대 교황의 비밀고도 열 수 있다.’

교황가의 비전들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의미다. 당황한 키나가 급히 아이작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안 돼! 보내줄 수 없어!”

쾅!

슈리가 그런 키나를 막았다.

“이야기 못 들었냐? 넌 내가 막는다고 했잖아.”

슈리의 성법에 출구가 완전히 막혀버렸다. 푸른 결계가 벽을 감쌌다.

그 모습에 키나는 기가 찬 듯 제 사촌을 보았다. 아이작을 보는 눈빛과는 딴판으로, 굉장히 차갑고 오만한 눈빛이었다.

“막아? 감히 네가? 나를?”

동시에 말을 잇지 못할 수준의 금빛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슈리는 큭, 신음을 흘렸다.

‘젠장, 누가 귀족 중의 귀족인 금가 아니랄까 봐.’

감히 자신의 상대가 되겠느냐는 눈빛.

그래, 마치 사자가 생쥐를 보는 듯한 특유의 오만한 얼굴이지만, 솔직히 저놈은 그래도 된다고 할 정도로 강력해서… 시발!!

쟤 눈 뒤집혔어!

죽겠네, 젠장!

하지만 무려 ‘그 아이작’이 자신에게 키나를 맡긴 것이었다.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기는 개뿔이이!

키나가 곧장 양팔을 벌려 번개를 쏟아냈다.

“네가 나랑 싸우는 데 관심을 두는 줄은 몰랐는데?”

아니요?! 전혀 관심 없는데요!

아이작 개새끼가 날 버리고 간 건데요!

“그렇게 원한다니 직접 처리하고 아이작을 쫓아주마.”

아니! 안 원한다고! 새끼야!

콰르릉!

소름 끼치는 빛이 사정없이 떨어지자, 빛을 피하는 슈리는 쌍욕을 날렸다.

‘미친! 서임만 안 받았지, 이미 추기경의 자격을 땄다는 말은 들었는데. 졸라 세네!’

역시 9계위의 힘!

슈리도 몸을 숨기며 원거리 살법을 날렸지만, 키나가 벌레를 쳐내듯 쉽게 막아냈다.

‘역시 6계위 성법으로는 무리인가.’

어지간한 성직자라면 충분히 슈리가 압도했겠지만, 문제는 저게 어지간한 급이 아니란 거지.

제국 제일의 천재 성직자를 뭔 수로 이겨? 솔직히 저런 놈과 항상 이름이 나란히 거론되는 아이작이 이상한 거다.

아이작 이 새끼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칫, 할 수 없나.’

실제로 키나도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뭐, 그래도 성녀 가문 사람이라고 제법 실력을 발휘하긴 하지만.’

그래 봤자 일개 상급 사제 수준. 자신과 맞불을 둘 수 있는 건 아이작 정도다.

‘그 아이작이 대타를 맡기고 갔길래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았더니…….’

키나가 손을 들었다.

“이걸로 끝내주…….”

그 순간, 슈리가 상자를 번쩍 들었다.

“멈춰! 안 멈추면 이걸 개방할 거다!”

“!”

슈리가 내민 상자에 키나는 기가 찬 듯했다.

저건 아이작이 슈리에게 주고 간 물건이 아닌가. 그는 조금 실망한 듯 웃었다.

“결국 네 힘으로 안 되니까, 아이작이 준 걸 쓰는 거냐? 아니, 애초에 아이작도 그래. 그걸 너 따위한테 준다고 너와 내가 역전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건지.”

“닥쳐, 우리 소가주가 맡긴 거다!”

슈리는 아이작에게서 상자를 받을 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내가 개발한 우리 가문의 비전이야. 이거면 교황 손자도 꼼짝 못 해. 너만 믿는다. 김슈리.

그래! 키나도 무력화시킬 우리 가문의 비전!

“우리 청의 비전을 우습게 보지 마라!”

“!”

마침내 슈리가 아이작이 준 물건을 개방했다. 작은 나무 상자에 성력을 싣자, 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강력한 푸른빛에 키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래. 청의 비전. 그건 좀 성가시지.’

특히 아이작이 담은 성법일 테니, 더 강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였다.

“내가 청의 비전을 파훼할 연구도 안 했다고 보는 거냐? 그 비전, 통째로 없애주…….”

…주……

주……?

상자에서 나온 힘에, 키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저게 왜 저기서 나오냐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황스러운 건 상자를 연 슈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우리 가문 비전이라며, 이 미친 새끼야!!’

그도 그럴 게, 상자에서 나온 건 ‘금의 재물신’이었던 것이다.

분명 전에 금의 추기경이 최고신의 대가로 준 걸 낼름해버린 그 터주신이다. 그래…. 금의 추기경과 금의 사제들이 끈질기게 돌려달라고 쫓아오던 그거.

슈리의 눈썹이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분명… 황태자 정원에 처박아둔 그건데!’

팔뚝만 한 요정 크기라고 해야 할까. 작은 노인의 모습을 한 금의 재물신이 슈리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키나한테 승질을…….

[이 버르장머리 없는 금가 놈이!]

…승질을 낸다고?

[감히 금의 종자가 금의 신께 공격을 하려고 해! 썩 풀지 못할꼬!]

심지어 이쪽한테?

키나는 멘붕에 빠졌다.

슈리도 아득해졌다.

‘아이작 이 미친 새끼! 뭔 짓을!!’

아니 뭐, 그래. 이해는 했다.

성직자들은 본인 신앙의 신의 존재가 나타나면,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예를 갖춰야 한다.

게다가 터주신 정도면 집안의 가신처럼 특정한 곳에 머물며 그곳을 평화롭게 해주는 하급신. 아주 막강한 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수깊은 신으로, 종자들이라면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 신이다.

그런 만큼, 추기경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건 맞지만…….

‘이렇게 다른 신앙의 편을 들진 않는단 말이지…….’

심지어 금의 신이 청의 종자의 편을 들리는 더더욱 없다. 아이작이 무슨 짓을 하지 않은 이상…

‘그래 이 자식! 신께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터주신이 이래!!’

아니나 다를까, 드물게 당황한 키나가 말했다.

“아니, 이건 그러니까. 아니, 터주신님. 잠깐 거기 좀 나와 봐. 아니, 나와주십시오. 거기서 그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재물신은 슈리의 머리에 더욱 착 달라붙어서 떼끼, 호통을 쳤다.

[금의 종자는 금의 신을 보고도 어찌 예를 갖추지 않는가!]

키나는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아, 아니. 저기 터주신님. 그런 말을 하실 때가……!”

[예끼이! 건방진 것! 썩 성법을 풀고 무릎을 꿇지 못할꼬! 이 아이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용서치 않겠다!]

…미치겠네!!

왜 금의 터주신이 노골적으로 청을 보호하고 있는 건데?!

“거긴 청입니다! 이리 오십시오! 왜 그런 곳에 계신…….”

[왜긴, 네 아버지가 날 청에 보내버렸으니 있지.]

아버지이이읽!

이런 식으로 발목이 잡힐 줄 몰랐던 키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물론 당시엔 최고신과 거래를 하는 것이니, 금에서도 구색을 맞출 겸 나름 귀한 분을 챙겨준 모양이지만… 이게 이리될 줄이야!

하지만 그는 곧 꾹 참으며 말했다.

“터주신님, 그 명은 해제되었으니 이쪽으로…….”

[예끼!!! 어린 놈팽이의 눈높이가 너무 높구나!]

“큭……!”

돌겠네!

결국 무장을 해제한 키나가 한쪽 무릎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지금은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물론 할아버지가 쉽게 당할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아이작의 목적이 만약 역대 교황의 방이라면 정말 큰일난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 아이작을 막아야 했다.

“터주신님. 지금은 금이 위급한 상황입니다. 지금 머리에 앉아계신 그놈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그놈은 우리 금에 쳐들어온 적수로, 처리해야 할 적…….”

그러나 터주신은 땀을 뻘뻘 흘리며 못 들은 척 고개를 슥 돌렸다.

키나는 핏대를 세웠다.

“터주신님!”

[으잉? 뭐라고?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귀가 안들려어……!]

미치겠네……!

아이작, 도대체 뭔 짓을 한 거냐!

키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이마를 짚었다.

생각 같아선 상급신으로 찍어누르고 싶지만, 터주신은 신들의 공경을 받는 신. 교황이 될자가 신을 신으로 찍어누르면 좋은 소문이 안 돈다. 좋을 게 없었다.

결국 뭔가를 결심한 그가 돌아섰다.

“하, 됐다.”

“!”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건물을 파괴하고 나간다.

원래는 수도원을 부수고 싶지 않아 슈리를 처리해 결계를 풀려고 했었지만, 이리되면 할 수 없지.

그렇게 키나가 돌아서는 그때,

쾅!

“!”

이번에도 슈리가 그를 막았다. 키나의 얼굴을 위협한 슈리가 험악하게 웃었다.

“어딜 가냐? 날 무시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저 자식이……!’

심지어 아까와 달리 기세가 등등해졌다.

실제로 슈리는 웃고 있었다.

‘그래, 맡기고 간 게 금의 재물신이라서 좀 당황하긴 했지만, 역시 아이작이다.’

이 머리 좋은 놈!

이거면 공격을 못 하는 키나도 처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지, 아이작? 내 손에 저놈을 맡긴다는 거지?’

슈리는 내심 아이작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뿌듯했다.

아무리 키나가 무장해제가 된다 해도 키나를 처리하는 일이 쉬운 건 아니니까.

‘날 믿어준다는 거겠지.’

그 생각에 미친 슈리가, 자신 있게 성법을 쓰려는 순간!

“커헉?!”

터주신이 나왔던 상자 안에서 이상한 물체가 튀어나왔다.

검은색의 채찍 같은 줄기였다. 그 줄기는 갑자기 키나와 슈리를 동시에 꽁꽁 묶었다.

“크윽?!”

“컥!”

완전히 뒤엉킨 둘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뭔가 싶었지만, 곧 뭔가를 본 슈리가 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너는……!”

나타난 건 작은 요정으로, 바로 아이작의 왕급 성령이었다.

성령은 키나와 함께 전신이 꽁꽁 묶여 있는 슈리에게 말했다.

[그건 움직일수록 더욱 엉키면서 조여드는 성령계의 물질이다.]

“!”

[아이작이 그걸로 잘 붙잡고 있으래.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아이작의 계획을 눈치챈 슈리는 빠직, 핏대를 세웠다.

아이작 이 자식,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그래…. 그 새끼가 날 믿을 리 없지!’

키나는 키나대로 빡친 듯 이를 갈았다. 자신은 이런 용도였구나! 아이작, 끝까지 날 상대 안 해주는구나……!

“아이작!”

키나는 곧 몸을 묶은 물질을 풀려고 했지만, 해탈한 듯 천장을 보는 슈리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그 움직임에 반응한 줄기가 그들을 더욱 꽉 묶었다.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던 키나는 슈리를 노려보았다.

“야, 움직이지마 ! 내가 이걸 풀 테니까 협조를……!”

“아 몰라! 같이 죽자, 새끼야!!”

“으아악!”

이러기냐, 아이작!

* * *

한편, 그 무렵.

슈리가 키나를 묶어두고 있는 사이.

“누가 내 욕을 하나.”

아이작이 귀를 후비며 역대 교황의 방에 들어왔다. 그러곤 석상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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