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관례는 무슨 (4)
아이작이 부잣집 대감처럼 교황의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위스퍼는 그런 아이작이 걱정된다는 듯 한마디 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슈리 에슈아만 거기에 두고 와도? 6계위라서 교황 손자를 상대할 정돈 아니지 않나요?]
그 말에 아이작은 푸흡 비웃었다.
자신이 괜히 재물신과 성령을 붙여준 줄 아나?
‘슈리는 그래 봬도 강해.’
[!]
아마 키나는 지금쯤 미치고 환장하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한테 맞으면서 자란 슈리의 맷집은 어떤 의미론 청에서 최강일 테니까.
[사제잖아요.]
그래, 사제지. 맷집은 언데드… 아니, 오뚜기로 키워놨다.
‘그 맷집 앞에서 무장해제 된 키나의 주먹은 그냥 물 주먹이야.’
뭐, 재물신이 없었다면 슈리도 위험하겠지만, 글쎄.
‘크크큭. 재물신은 꽤나 골치 아플 거다.’
자신이 재물신을 꼬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는가!
아이작은 무려 몇 년에 걸쳐 재물신을 교화시켰다. 일단 황태자의 정원에 가둬… 아니, 모셔놓고 놈이 좋아하는 재물을 먹이로 주었다.
-재물신님. 이거 좋아하시는 거 맞죠?
-허억! 이런 순도 높은 귀한 금이 어디서!
-자, 여기도 있습니다! 다 가지세요!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이곳에서 존경하는 재물신님을 모시게만 해 주십시오. 재물신님의 가족이신 제자들도 모두 부르셔서 이곳에서 평온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다 공짜에요!
-오오! 청에 이렇게 착한 아이가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하니 재물신은 정말로 제자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그러곤 황태자의 정원에서 열심히 재물을 불리는 농사를 지었지.
그렇게 놈들을 배불리 먹여가며 그들이 터를 완전히 잡아놓았을 때, 아이작은 그들을 모조리 묶어놓고 협박을 했지.
-자, 그동안 즐거웠지? 땅을 썼으면 임대료 내놔야지.
-…뭐, 뭐라고?
-임대료를 못 내놓겠으면 땅주인 말을 듣든가.
-자, 잠깐!
-아 싫어? 네 부하들이 어떻게 돼도 좋단 거야? 아아, 재물신들은 전신이 금과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던데, 하나씩 똑똑 떼다가 팔아버리면 얼마쯤 나오려나.
-허억! 이 사실을 신들이 알고도 용서하실 것 같으냐!
-뭐래? 금의 신 주제에 금의 재물을 빼돌려 청에게 넘겼으면서?
-내, 내가 언제!
-몰라서 그래? 이 땅은 청의 땅이야. 이 땅에서 난 재물은 전부 내 거지.
-뭣이? 여긴 황실 땅이 아니냐!
-아, 말 안 했나? 황태자 전하께서 이 정원을 나한테 파셨거든.
-뭐라고?!
-참고로 여기선 너도 허튼짓 못 하는 거 알지?
-뭐??
-왜 모른 척하고 그래? 너도 여긴 신이 감시할 수 없는 황실의 고유 영역인 걸 알잖아. 그걸 알아서 너도 은근슬쩍 상급신들의 재물을 빼돌린 거 아냐?
-……!!
-자, 알아먹었으면 내 말에 따라. 부하들도 살려야지?
그 말에 재물신은 낑낑 울면서 아이작의 말을 듣게 되었다. 정원을 내준 장본인인 황태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뭔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쨌거나 키나는 슈리가 막아줄 테고.
“난 이것만 털면 된다.”
아이작은 방 중심에 크게 세워진 석상을 보았다. 뾰족한 이목구비에, 고압적이고, 황제보다 더한 제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모습.
[실베스테르군요?]
성 실베스테르.
교황 중에서도 유독 뛰어난 자들은 성인의 증표로 앞에 성(聖)이 붙는다.
그리고 실베스테르는 해골왕의 시대에 있던 몇백 년 전 교황이었다. 재위 기간이 제일 긴 만큼, 당연히 해골왕 때 가장 많이 봤다.
‘뭐, 사실 어느 교황이든 전부 못 볼 꼴 다 보며 싸웠지만.’
아이작이 유독 이놈을 아니꼽게 보며 치를 떠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삭아, 꼭 기다리고 있을게.
자신에게 화친을 맺자고 했던 성녀 이네스. 그런 그녀를 해골왕의 앞잡이, 마녀로 몰아 처형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저 마녀를 처형하라.
그때의 일은 몇백 년이 지나도 아직 기억이 생생했다.
사람들을 거의 설득했다는 이네스와 약속하고 만나기로 한 날. 진마가 있던 그 델로스 땅에서 처형 집행이 열렸지.
아이작이 델로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처형이 끝난 뒤라, 자신이 볼 수 있던 건 성벽에 걸린 이네스의 목뿐.
실베스테르는 보란 듯이 성녀를 효수에 처해 짐승의 먹이로 삼았다.
[델로스면 주인님이 드물게 멸망시킨 인간 영토져?]
뭐, 그때는 해골이라 그 목을 보고도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 하지만 인간이 된 지금은…….
잠시 그때의 일을 떠올리던 아이작은 한숨을 팍 쉬었다.
“인간이 되고 나서 단점은 딱 이거 하나네.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알게 해.”
[예?]
아무튼 이 개 같은 실베스테르의 유전자가 어찌나 강한지. 그 후손들까지도 죄다 이놈 얼굴하고 비슷해서는, 원.
‘후손들까지 탈탈 괴롭히고 싶잖아. 푸흐흐흐.’
뭐, 그나마 금의 추기경까지만 붕어빵이고, 키나는 안 닮아서 망정이지.
아이작이 석상을 째려 보자, 낄낄 웃던 위스퍼가 돌연 허억, 하고 놀랐다.
[…설마 또 부숩니까?]
뭐?
[설마 이거 부수러 여기 오신 겁니까앍?!]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갔냐는 반응이었지만, 아이작은 귀를 후볐다.
‘왜 이래? 아무리 그래도 교황의 석상이야. 나도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다고.’
[오, 그러면…….]
쾅!!!!
아이작의 손짓과 함께 석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부수셨잖아요!!!!]
‘얼굴은 냅뒀잖아.’
[…그 대신, 거시기가 날아갔는데요?]
아이작은 알게 뭐냐는 듯, 석상 바닥의 틈을 만졌다. 그러자 숨겨진 문이 나타났다.
그 안에서 뭔가를 발견한 아이작이 씨익 웃었다.
“역시 있을 줄 알았어.”
[이게 뭐죠?]
아이작은 대답 대신, 안에서 꺼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특수한 목걸이가 있었다.
[이건 스티그마잖아요?]
‘그래, 지금은 베리트 영토 결계의 한 축으로 쓰이고 있는 모양이지만.’
황제의 크라운처럼 교황의 증표인 스티그마는 대대로 물려받는 물건이 아니었다.
성인식 날, 신께 승인을 받아 신께 하사받는 성물이었다.
‘쉽게 말하면 귀속템인 거지.’
매 교황마다 바뀌는 전용 아이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주인이 아니면 당연히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지금 교황이 가짜 교황이라면 스티그마를 못 쓴단 거지.’
[어? 하지만 지금 교황은 스티그마를 걸고 있었잖아요.]
‘당연히 가짜지.’
[에엑, 가짜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요?]
‘뭐, 가짜라고 해도 짝퉁은 아냐. 그만한 신물을 일개 인간이 어떻게 똑같이 만들 수 있겠어?’
[그럼…….]
아이작은 슬쩍 꺼낸 스티그마의 뒷면을 보았다. 거기엔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율리오>.
그 이름을 본 아이작은 예상했다는 듯 씨익 웃었다.
‘역시나.’
위스퍼는 깜짝 놀랐다.
[율리오면 현 교황… 아니, 지금 교황의 형 이름이죠? 왜 여기에서 형의 스티그마가?]
‘왜긴 왜야. 교황의 형도 성인식 이후에 사고를 당한 거니, 당연히 스티그마를 받았겠지?’
[!]
‘하지만 동생은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 이걸 쓰면 거부반응을 일으킬 거야. 그래서 여기에 보관한 거지.’
[그럼, 지금 그 교황이 걸고 있는 스티그마는 뭐죠?]
‘뭐겠어. 이 석상 주인 거지.’
[실베스테르의 스티그마요?!]
아이작은 가증스럽다는 듯 여우처럼 웃었다.
‘실베스테르 놈의 스티그마는 누구나 쓸 수 있었어.’
[헐…. 그걸 어찌 아십니까?]
‘내가 직접 봤으니까.’
[헐?!]
‘그리고 교황이 왜 굳이 본인 걸 안 쓰고, 선조 걸 쓰겠어? 가짜라는 빼박 증거지.’
[에에엑. 그럼 청의 가주는 왜 교황에게 보낸 겁니까? 증거물이 여기 있으면 굳이 안 보내도 되었잖아요!]
‘열 받잖아. 얼굴 좀 갈기라고.’
[어유. 그럼 반대로 해도 됐잖아요.]
‘몸 쓰는 건 나랑 안 맞아. 그런 건 뇌까지 근육인 성직자들이 해야지.’
뭐, 일석이조긴 했다.
할아버지가 교황 놈을 잡아두면, 이걸로 확인해보면 되니까.
‘이걸 본인에게 가져가면 거부반응이 나올 거다.’
모두의 앞에서 거부반응을 보이는 스티그마를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완벽한 증거겠군요. 차기 교황 선출이 앞당겨지겠어요.]
‘그래. 그리고 할부지가 실베스테르의 스티그마를 빼앗으면…….’
[아하, 이것과 함께 증거로 바칠 생각이시군요? 역시……!]
‘미쳤냐?’
[예?]
‘그건 내가 슬쩍 가짜랑 바꿀 거야.’
[예?!]
자신이 왜 드래곤을 데려왔다고 생각하는가!
‘그래! 드래곤 정도면 위조품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그걸 만들려고 하지는…….]
‘만들어! 결혼해준다고 꼬실 거거든!’
[이분 업보가 점점 쌓이시네…….]
‘가짜 스티그마를 만든 위조죄까지 얹어서 골로 보내주마!’
[아니, 그 논리면 주인님도 위조죄로…….]
‘안 걸리면 돼! 걸려도 최고신이 시켰다고 하면 그만이야!’
[…어째 최고신한테도 업보가 쌓이는 느낌인데요.]
뭐, 인마?
[…이쯤 되면 어째 최고신도 주인님께 원하는 게 있어서 두고 보는 느낌인 거 같기도 하고…….]
위스퍼가 중얼거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사악하게 웃었다.
‘실베스테르의 스티그마만 있으면 교황이 안 돼도, 그 힘을 쓸 수 있단 거다.’
누구나 쓸 수 있단 건, 자신도 쓸 수 있단 거니까.
그리고 그것만 있으면 신계로 갈 수도 있고, 신도 소환할 수 있다. 교황의 이런저런 것들을 빼돌릴 수도 있었다.
‘물론 성녀를 각성시키는 신을 소환하는 것도 가능하지.’
[오오오오!]
‘산 제물을 먹는 신이면 고귀한 상급신은 아닐 거고. 그럼 죽도록 패서 길들인 후, 내가 주는 먹이만 먹게 하면 돼.’
[오오오오! 교황가를 먹이로 바치는 거군요?]
“아니? 내 말에 거역하는 놈은 죄다 던질 건데?”
위스퍼는 침묵했다.
[…저기 주인님. 그거 폭정…….]
“황실도 내 손아귀에 있는데, 뭔 문제야? 공포정치가 뭔지 보여주마.”
…이 나라, 진짜 괜찮은 거 맞나?
교황이 되는 거 맞나? 천벌 안 받으시나?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아이작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 끝났다.”
[예? 뭐가요?]
“싸움 끝났어. 슈리랑 할아버지 쪽 둘다.”
[오! 어느 쪽이 이겼나요?]
“슈리는 뭐, 예상대로고. 할아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