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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16화 (216/272)

제216화. 성녀 각성 (1)

“할아버지는…….”

아이작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스티그마를 챙긴 그는 황급히 방향을 틀곤 성력을 개방했다.

[고속활보].

아이작이 바람처럼 빠르게 이동했다.

그가 성법까지 쓰며 급히 교황의 방에서 나오자, 위스퍼는 당황스러웠다. 어지간하면 주인이 이렇게 반응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헉! 설마 청의 가주가 당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자신도 뭣도 없이 가주를 교황과 싸우게 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추기경들 자체가 각 신앙의 수장, 최고 서열이 아닌가. 게다가 원래부터 추기경은 마왕을 퇴마하는 자들이었다. 해골왕이 지나치게 강해서 성녀가 나온 것일 뿐.

추기경들도 각자 장단점이 있지만, 청의 가주는 추기경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공격력을 선보인다.

반면, 금은 어떠한가.

청이 최강의 창이라면, 금은 최강의 방패다.

어떤 공격에도 쓰러지지 않기에,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언제나 금이 5대 신앙을 이끄는 리더 자리를 맡는 것이었다.

즉, 청과 금의 싸움은 이른바 창과 방패의 싸움이기에, 보통은 창이 부러지든, 방패가 뚫리든 둘 중 하나겠지만… 글쎄.

‘청의 가주는 역대 가주 중 손꼽히는 제국 최강의 창이고, 교황도 선조 놈의 스티그마를 가졌어. 쉽게 결론은 안 나겠지.’

그럼 그 말이 무슨 의미다?

‘크흐흐흐, 내가 스티그마를 빼돌릴 시간을 벌 수 있단 의미다.’

그는 처음부터 할아버지에게 교황의 처리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스티그마만 빼돌리고 합류해 교황을 함께 처리한다.’

뭐, 할아버지가 강하긴 하지만 박빙이니까 금방 안 끝나겠지. 그러니 시간상 딱 맞다.

자신이 거들면 칭찬도 받을 것이고 말이다.

그래, 그랬는데.

‘뭐지?’

싸움이 벌써 끝났어?!

뭐, 슈리 쪽은 예상했다.

키나는 의외로 금가의 일원으로서 긍지가 엄청나서, 금의 신 앞에서 예절을 깍듯이 지킬 것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성령의 힘까지 뚫고 나오긴 힘들겠지.

그런데 이쪽은?

‘뭐지? 벌써 끝날 리가 없는데?’

심지어 교황의 힘이 눌렸다.

‘설마 할아버지가 이겼나?’

그런 만큼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우이씨, 뭐지? 아직 내가 가지도 않았는데?’

[뭐죠?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아이작은 대답 대신, 급히 이동했다.

* * *

아이작이 스티그마를 찾기 조금 전.

쾅! 콰르릉!

두 개의 빛이 사납게 부딪치는 중이었다.

주변의 기사들은 넋을 놓고 두 빛이 충돌하는 섬 쪽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감히 섬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오싹해지는 강한 힘과 함께 신전이 폭발했다. 그 안에서 두 개의 빛이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왔다. 고결한 푸른빛과 순수한 금빛이었다.

푸른빛은 금빛을 신전 인근의 작은 섬으로 유도했다. 두 빛이 부딪칠 때마다 대지가 흔들리며, 섬이 무너지고, 대기의 현상이 바뀌었다.

콰르릉!

충격파에 폭풍우가 쏟아지고, 땅이 녹아내렸다. 도대체 몇 개의 재앙이 동시에 닥친 건지 알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빛의 정체를 알게 된 건, 금빛 쪽에서 신이 나타났을 때였다.

쿠구궁!

“저, 저건 강신!”

일부긴 하지만 틀림없었다.

저건 신을 부르는 교황의 소환 성법!

“설마 교황 성하셨던 건가!”

실제로 소환된 금빛의 손이 손짓하자, 하늘에서 금빛이 비처럼 쏟아졌다. 도망칠 구석이 없게끔, 섬 전체에 떨어졌다.

하지만 푸른빛은 모든 포격을 빠르게 회피했다. 그게 바로 교황과 청의 추기경의 싸움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사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야……!”

“무슨 싸움이……!”

반면, 교황과 대치하던 일라이는 탄식 중이었다.

‘진작 눈치채야 했거늘.’

교황으로 즉위한 이래, 힘을 겨룰 기회 자체가 사라졌던 터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교황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알 것 같았다.

‘이건 율리오가 아니다.’

쓰는 성법은 비슷하지만, 형태가 명백하게 다르다. 그 생각에까지 미친 청의 가주가 눈을 번득이며 땅을 짚었다.

사실 어린 시절, 일라이는 베리트가의 두 형제와 종종 대련을 했었기에 잘 알았다. 자신들을 졸졸 따라다니던 가면 쓴 허약한 동생에게 약점이 하나 있다는 걸.

-악!

-하하, 또 맞았네. 브루티오, 넌 성법을 쓸 땐 항상 오른쪽 옆구리가 비더라. 사각지대가 있으면 되겠어?

-금의 방어는 절대 방어야. 이 사각지대를 굳이 알고 맞힐 수 있는 것도 너와 형 정도고. 하지만 너랑 우리하고는 싸울 일이 없으니 상관없잖아?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

청의 가주가 땅으로 몰래 흘려보낸 성력이 교황의 발치에서 화살처럼 기습적으로 튀어 올랐다.

쾅!

쏘아진 성력은, 교황의 오른쪽 옆구리를 향했다.

‘!’

동시에 교황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터엉!

공격은 정확히 교황의 사각지대에 명중했다.

수십 년 전과 변한 것이 없는 낯익은 모습에 청의 가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이를 뿌득 갈았다.

“역시 네놈은 브루티오냐……!”

폐부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에, 교황은 옆구리의 피를 스윽 닦아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생각 이상이라는 얼굴로 일라이를 보고 있었다.

“교황의 성법을 뚫고 이 정도의 상처를 내다니, 칭찬해주마.”

일라이는 빡친 듯 험악하게 눈을 번득였다.

“감히 교황이라고 지껄이지 마라!”

곧 푸른 쇠사슬이 교황을 한순간에 포박했다.

콰직!

일라이는 살벌하게 교황을 노려보았다.

“진짜 교황의 힘을 쓰지도 못하는 이상, 너는 내 적수가 못 된다.”

이것으로 검증은 끝났다. 미련도 사라졌다. 이제 이놈의 스티그마를 빼앗아 성녀 각성을 미루고, 교황직을 박탈한다.

그러자, 묶여 있는 교황은 뜻밖에도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내 발을 묶었다고 생각하겠지.”

“……?”

“옛날부터 그랬어. 날 잡았다고 착각하지 마라. 지금 네 발을 묶고 있는 건 나다.”

“뭔 개소리를…….”

“네 아들을 성녀 각성의 산 제물로 바치지 않으려고 이 방법을 택한 모양인데, 헛수고야. 성녀 각성은 정상적으로 치러진다.”

일라이는 미간을 좁혔다. 벤야민의 경우에는 혹시나 싶어서 릴라이한테 감시를 명령해놨다. 동시에 벤야민에게도 말해 놓았다.

네가 산 제물이 되는 건 지금 교황이 원하는 일이니, 절대 성녀 각성은 치를 생각 말라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조금만 기다리면 산 제물이 아니어도, 성녀를 각성시킬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교황은 그때를 기다려줄 것 같냐는 듯, 웃었다.

“성녀 각성의 제물이 될 수 있는 건, 네 아들만이 아니지.”

“……!”

“분명 레아 에슈아에게는 오빠가 있었을 텐데?”

일라이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설마 이 자식, 벤야민의 아들인 조셉을 제물로?

아니나 다를까, 교황이 푸하하, 웃었다.

“왜 내가 여기에 혼자 왔다고 생각하나? 네게도 큰 기회였겠지만, 반대로 나에게도 기회였다. 성녀 각성은 우리한테는 손해지만, 더 큰 대의를 위해서 널 붙잡은 거지.”

“!”

설마 싶었던 일라이가 돌아가려고 하자, 교황이 웃었다.

“놔 줄 것 같으냐?”

교황은 자신을 포박한 쇠사슬에 역으로 금의 성력을 불어넣었다.

마치 같이 죽자는 듯, 무자비한 성력이 휘몰아쳤다. 그 배척의 기운이 청의 성력을 짓눌렀다.

아이작이 비전을 부활시키고 청의 신의 힘을 조금 가져오긴 했지만, 청의 신은 아직 갇힌 상태였다. 신의 온전한 가호가 없는 상태에서는 청이 교황의 힘에 밀릴 수밖에 없다.

움직임이 둔해진 일라이를 향해 교황이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치솟아 오른 굵직한 금빛 작살이, 일라이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콰직!

“큭!”

쨍그랑!

일라이는 피해냈지만, 그와 동시에 일라이가 착용하고 있던 가주의 목걸이는 박살 났다. 정확히는, 목걸이에 있던 푸른 보석에 금이 간 것이었다.

이에 교황은 용케도 피했다는 듯 웃으며 눈을 번득였다.

“네 아들 핏줄들은 살아 있으면 안 돼. 같이 죽어라.”

교황이 힘을 쓰려는 그 순간-

빠각!

“!!”

누군가가 교황의 얼굴을 걷어차 날려버렸다.

일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쿵!

교황을 무자비하게 날려버린 건 다름 아닌…….

“어디서 개수작이야!”

“멜리사!”

“갑자기 소환식이 발동해서 뭔 일이 벌어졌나 했더니.”

빡친 멜리사의 등장에, 일라이는 작은 침음을 흘렸다.

가주의 목걸이가 깨지자, 보석에 새겨져 있던 소환식이 발동한 것이었다.

가주와 멜리사의 목걸이엔 각각 소환식이 새겨져 있는데, 증표가 깨질 정도의 위험이 각자에게 닥치면 상대를 소환하는 효력이 있었다.

교황에게 다가가는 멜리사는 바로 상황을 눈치챈 듯했다.

“설마 조셉까지 건드릴 생각인 줄은 몰랐군.”

그 아이는 스스로 산 제물이 될 타입은 아니라서 다들 안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뭐, 됐다. 여기서 원흉을 처리하면 돼.”

멜리사가 열 받은 듯 나서자, 일라이가 막아섰다.

“멜리사. 직접 공격은 위험해. 금가의 방어 성법은 에슈아의 창으로도 뚫지 못한다. 여기서는…….”

“창으로 뚫을 수 없다면, 대포로 부숴버리면 그만이지.”

…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멜리사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빠각!!

그 주먹질에 교황의 방어 성법이 완전히 깨졌고, 교황은 포탄처럼 날아갔다.

쾅!

일라이는 마치 본인이 맞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언제 봐도 걱정하는 사람을 무색하게 만드는 괴력이군.’

그는 곧장 교황에게 다가가 스티그마를 빼앗았다.

촤륵!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여유로운 교황은, 오히려 계획대로라는 듯 천천히 일어났다.

“왜 내가 네 목걸이를 깼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

동시에 그들은, 섬 전체에 금의 술식이 새겨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땅을 밟은 자들을 묶어내는 금의 술법.’

‘저게 왜 순순히 처맞고만 있나 했더니.’

교황은 웃었다.

“그 목걸이를 깨면, 멜리사가 소환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청 전원에게 소식이 전해진다는 것도. 곧 아이작 에슈아도 이쪽으로 오겠지.”

교황은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던 듯했다.

“청에서 가장 골치 아픈 너희 셋만 붙잡아두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된다. 그 외에 에슈아에서 내게 위협이 될 만한 놈은 없지.”

교황의 목적을 깨달은 둘은 주변을 확인했다.

교황을 제압하고, 술법 자체를 푸는 건 어렵지 않지만, 시간이 걸린다.

왜 이렇게 벤야민을 죽이는 데 집착하는 건지는 수상하지만, 교황의 목적이 산 제물이라면, 본인은 손해를 보더라도 이곳에 청의 요주의 인물들을 묶어두는 것 자체로도 이득일 터.

멜리사가 물었다.

“일라이, 아이작은 어디 있지?”

말해봐야 무엇하겠는가. 이 수도원에서는 연락을 위한 신수조차 소환이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가주의 위험 신호를 받았으니…….’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당연히 할아버지는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오는 중이겠지.

하물며 그 아이 정도의 실력이면 속도도 빠를 것이다.

그래, 분명히 올 텐데…….

오면 안 되는데…….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곧 섬 안으로 사색이 된 청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 광경에 교황은 웃었고, 가주는 불길한 마음에 아이작을 찾았다.

“아이작은? 설마 함께 들어왔느냐?”

“저, 그게… 갑자기 청의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며…….”

“!”

뜻밖의 소식에 교황은 얼굴이 일순 일그러지고, 청의 가주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래, 역시 그 아이다.

교황의 계획을 눈치채고 바로 움직인 거야.

“그 아이가 눈치챘구나. 잘했…….”

“…정확히는, ‘할아버지는 어차피 죽어도 내가 승계받으면 그만이라 상관없어. 하지만 가문의 미래인 레아나 조셉은 지켜내야 해’라고…….”

“……”

가주는 침묵했다.

이거… 서운해해도 되는 부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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