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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17화 (217/272)

제217화. 성녀 각성 (2)

일라이는 침묵했다.

기사들은 눈치를 살폈다.

“저, 가주님?”

그러나 일라이는 답이 없다.

그 침묵에 기사들은 창백하게 질렸다.

‘역시 이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나……!!’

자신들도 고민하긴 했지만, 가주한테는 모든 말을 빠짐없이 전해야 하는 것이 청의 기사들이었다.

아이작이 한 말에 좀 문제가 있더라도 가주에겐 알려야 한다.

그래…. 그래야 하는데.

그들은 우뚝 굳어있는 일라이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라이가 아이작을 예뻐한다는 건 모든 기사들이 알고 있었다.

당연히 충격이 크시겠지…….

기사들은 다급히 말을 돌렸다.

“저 가주님, 도련님도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건…….”

“…아니다. 괜찮다. 아이작이 훌륭하구나.”

가주님, 지금 비틀거리셨는데요.

“아니다. 잘했다. 지금은 할아비는 신경 쓰지 말고, 저택으로 가는 게 맞다.”

가주님…. 표정 관리가 안 되십니다.

그러나 일라이는 괜찮다고 했다. 그는 진심으로 괜찮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놈이 가문의 미래를 신경 쓰다니. 그것만으로 장족의 발전이다.”

…장족의 발전인 겁니까?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현명하다. 그리고 그나마 그 정도 말로 끝난 게 어디냐.”

그러자 기사들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그나마 이것도 순화해서 말한 거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한다.

하지만 뭐, 가주님이 괜찮다고 하시니 다행이었다.

‘이걸로 잘 넘어가겠…….’

“할아비를 죽이겠다는 손주라니. 대단도 하시군.”

푸욱, 교황의 비수에 일라이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교황은 혀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주 할아버지의 목을 따고도 남을 핏줄이야.”

칼보다 날카로운 비수가 일라이의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가슴에서 피가 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솔직히 마수에게 배가 뚫렸을 때보다도 아프다.

“큭…….”

“가주님!”

“굳이 내가 손 안 대도 청은 알아서 자멸하겠어. 아니, 어떤 의미론 후계자다워 좋은 건가? 그래, 후계자라면 응당 선대의 목을 딸 각오가 있어야지.”

일라이는 대미지가 상당한 듯했다.

…젠장. 누구의 목을 따?

부정하고 싶은데 아이작이라면 솔직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할 말이 없다.

그 모습에, 멜리사가 기가 찬 듯 한마디 했다.

“고작 그런 말 듣고 뭘 그래. 할아비가 되어서 쪼잔하게. 손주는 사랑으로 감싸줘라.”

그러자 가주가 한마디 했다.

“…내 이름만 너로 바꿔서 생각해봐. 아이작이 네게 그런 말을 한 거라고.”

멜리사는 고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말해도 잘 모르겠는데.

“이름만 바꾸라고 해도…….”

-할머니는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어.

멜리사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세상이 멸망한 듯한 얼굴이었다.

“가모님!!!”

그 무엇에도 쓰러지지 않는 멜리사가 드물게 쓰러지려는 듯한 광경에, 기사들은 기겁을 했다.

곧 교황은 웃었다.

솔직히 아이작 에슈아가 저택으로 향했다고 한 건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뭐, 됐다. 하나 정도 놓친 것쯤이야.”

“!”

“패륜인 너희 핏줄과 다르게 내 핏줄은 내 말에 아주 충실하지. 네 손주가 가봤자 소용없을 거다.”

그는 멜리사와 일라이를 놓칠 생각이 없다는 듯 성력을 뿜어냈다.

“너희만 붙잡으면 된다.”

교황이 힘을 쓰려고 하자, 방금 전까지 큰 쇼크로 죽으려고 했던 멜리사가 눈을 번득였다.

“어딜!”

그녀의 막강한 힘이 교황을 붙잡았다.

쾅!!!

성녀의 성력이 수도원의 결계를 파괴했다.

동시에 멜리사가 외쳤다.

“일라이, 이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아이작을 따라가라!”

응…. 그래.

가주는 바로 신수를 소환하기 위해 손짓했지만,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 * *

그 무렵, 패륜 손주는 교황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일라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가주의 목걸이가 깨지고, 가주의 위험 신호를 알리는 검푸른 나비가 나타났을 때에도 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성력이 사라진 건 아냐.’

아이작은 보통의 인간들과 달리 해골왕의 마력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랬기에 위험신호가 와도 이게 일라이가 쓰러져서 생긴 일인지, 아니면 단순히 목걸이가 깨진 사고인 건지 단번에 눈치챈 것이다.

동시에 그 뒤에 느껴지는 교황의 강대한 힘에, 그는 모든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개수작질이구만.’

저만한 힘이 있으면서 전력으로 부딪치지 않는다? 이건 발목을 잡으려는 개수작이지.

그래서 그는 일라이에게 향하지 않고, 곧장 에슈아 저택으로 향했던 것이다.

‘뭐, 할아버지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돈줄들이 더 중요한 것도 맞지!’

[아, 주인님 진짜 패륜 어쩔.]

‘아, 왜. 가주 놈도 이쪽을 더 좋게 본다고. 전부 소가주로서 가문을 위한 거야.’

[…본심 아니시고요?]

결국 아이작은 에슈아 저택에 도착했지만,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뭐? 벤야민이랑 조셉이 없어?

-아…예! 둘 다 사라지셔서…….

-벤야민 님은 사색이 되어서 말을 타고 나가셨어요.

그는 곧 수도에 놓고 온 샤브나크에게 물었다.

아이작의 명령대로 금의 세력이 베리트로 가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고 있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금의 추기경이 벤야민 에슈아의 아들을 찾아갔는데, 그 후에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 듯합니다. 벤야민 에슈아는 그 편지를 보고 교황청 쪽으로 향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추측할 것도 없었다.

‘금의 추기경이 조셉을 납치해 갔구나.’

“무슨 편지인지는 뭐, 말할 것도 없네.”

[무슨 편지죠?]

‘조셉이 산 제물이 되겠다며 떠난다는, 뭐, 유언 같은 거겠지.’

[진짜요?]

‘그럴 리가 있냐. 금의 추기경 짓이지.’

애초에 사명감이 없는 벤야민의 아들이 뭔 놈의 성녀 각성?

‘이놈들이 생각 이상으로 비겁하게 나오네.’

[무슨 말씀이시죠?]

‘함정이야.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꼴을 볼 부모는 없으니까. 조셉을 납치해서 벤야민을 유인한 거지.’

위스퍼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왜 그렇게까지 산 제물에 집착하는 거죠?]

‘산 제물보단 벤야민한테 집착하는 거지.’

[왜죠? 그놈은 0계위라서 능력이 없잖아요.]

그래, 이쯤 되면 오히려 수상하지. 잠시 생각하던 아이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능력…. 아, 그래. 그 서고구나?’

단순히 최고신 때문에 앙심을 품어서 복수한다고 생각했는데.

‘벤야민이 서고의 사서를 부활시켜서야.‘

앙심도 있지만, 분명 그 서고에 교황한테 불리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셉도 벤야민의 피를 받고 있으니까, 거슬릴 바에야 아예 싹 자체를 없애려는 거야.’

아이작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흐흐, 웃었다. 원래는 교황이 쌍둥이라는 정보를 얻은 시점에서 그 서고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원하면 꼭 서고를 확인해줘야지.’

[뭐, 다 좋은데요.]

‘뭐.’

[이거, 맘대로 가져와도 됩니까?]

‘!’

위스퍼는 아이작이 타고 있는 거대한 고래 신수를 보면서 혀를 찼다.

[이거 가주의 신수잖아요? 저택에서 훔쳐온 거 아닙니까?]

‘뭐 어때. 곧 내것이 될 건데.’

[주인님이 쓰고 계시면 가주가 못 쓰지 않습니까.]

‘아 체력 좋은 할아버지는 좀 뛰어오라 해. 나는 연약한 마법사라서 뛰는 취미 없다고.’

[텔레포트 쓰시면 되잖아요?]

‘마력 아껴야 한다.’

[……]

그러는 사이, 교황청에 도착한 아이작은 가장 강한 힘이 느껴지는 장소로 향했다.

‘역시 성녀 각성 준비 중인가.’

강력한 신의 힘이 느껴졌다. 그 힘을 느낀 아이작이 슬쩍 손을 모았다.

번쩍!

그러곤 그는 미리 마력을 개방해 두었다. 그간 봉인만 하고 있던 그의 순수한 마력이었다.

‘평소엔 성법으로 충분하지만, 지금은 때가 때인 만큼…….’

어쩌면 신을 살해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신의 천적인 ‘마법’을 사용해야 했다.

이내 준비를 마친 아이작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 순간,

“헉!”

안에 있던 금의 성직자들이 뜻밖이라는 듯 흠칫 놀랐다. 금의 추기경이 세워놓은 듯, 아주 우르르 몰려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들 사이에 껴 있는 인물이다.

“너……!”

거기 있는 건, 다름 아닌 노엘이었던 것이다. 그는 왜 이놈이 여기에 있냐는 얼굴로 놀랐지만, 곧 얄밉게 웃었다.

“이미 성녀 각성은 시작됐다. 어차피 네놈은 참관하지 못해.”

“아 그래요?”

아이작은 그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보았다.

‘레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이놈들 멋대로 진행한 거겠지.’

성녀 각성은 본인이 없어도 제물만 바치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식인 듯하니.

아이작이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거기서 비키지? 안 비키면 후회할 텐데.”

노엘은 뭔 개소리냐며 헛웃음을 흘렸다.

“성녀 각성을 성녀 가문 사람이 방해하다니. 가문을 망하게 할 셈이냐?”

“그럼 니 새끼가 제물이 되든가?”

“내 딸을 각성시킬 땐 그렇게 하도록 하지.”

허이고?

“뭐, 됐어. 난 말했다? 안 비키면 후회할 거라고.”

그러자 노엘이 비웃음을 흘렸다.

“가문을 망치려는 놈을 보내줄 것 같으냐?”

“하아. 할 수 없지.”

아이작이 한숨을 쉬며 성력을 풀자, 노엘은 풉 웃었다.

“포기하려는 모양이구나.”

“포기? 내가 왜?”

아이작은 씨익 웃으면서 본인이 걸고 있는 목걸이를 빠각, 부쉈다.

그건 다름 아닌, 오래전 멜리사한테 받은 로자리오였다.

아이작은 알고 있다. 가주의 목걸이와 가모의 목걸이엔, 각각 소환 술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목걸이가 부서질 정도의 일이라 판단되어 상대방을…….

번쩍!

“……!!”

금의 성직자들이 크게 놀랐다.

목걸이의 보석에 금이 가면서, 낯익은 사람이 눈앞에 소환이 된 것이다.

“가, 각하!”

“청의 가주?!”

소환된 건 다름 아닌 일라이였다.

아버지의 등장에 노엘은 얼어붙었다. 교황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정작 소환된 일라이는 뛰어오고 있었는지, 못마땅하게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 너…….”

동시에 일라이를 본 아이작은 언제 썩은 미소를 지었냐는 듯 해맑게 웃었다.

“와 할부지! 괜찮으세요? 다치신 덴 없으세요? 와, 다행이에요! 교황을 상대로도 안 다치시다니, 대단하세요! 아이작은 역시 할아버지를 믿고 있었어요! 일부러 여기 와서 소환했어요! 저 잘했죠?”

…그래. 잘하긴 했는데.

“…진짜 믿고 있던 거 맞냐?”

“그럼요. 제가 다 계산하고 먼저 온 거죠! 여기서 할아버지 부르려고요!”

…진짜로?

“눼! 이제 저 새끼들 쓰러트려야 하는데. 내 성력 쓰는 건 아깝… 아니, 버거우니까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이 후레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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