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성녀 각성 (3)
이 후레자식이??
일라이는 기가 찬 듯 아이작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손주란 놈이 할아비는 죽어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나, 교황한테 핏줄 잘 키웠다는 말을 듣게 하질 않나.
심지어…….
[부오오!]
…가주의 신수, 그러니까 내 신수까지 훔쳐 갔어?
일라이의 시선이 아이작의 뒤에 있는 고래를 향했다. 둥실둥실 떠다니며 아이작에게 얼굴을 비비고 있는 고래 신수는, 다름 아닌 가주의 신수인 <타란블룸>.
신수의 주인으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다. 사실 일라이가 괜히 고속활보로 여기까지 뛰어온게 아니었던 것이다.
타란블룸을 부르려고 했지만, 오늘따라 응답하지 않았다. 물론 강제로 불러낼 순 있었지만, 혹시 연애라도 하나 싶어서 냅뒀건만…….
저걸 아이작이 훔쳐 갔었다니…? 손자를 바라보는 일라이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아이작, 타란블룸이 왜 여기에 있느냐.”
그 험악한 음성에 아이작은 아차 싶었다.
“그게 실은, 고돌이도 벤야민이 사라지자 걱정이 되었는지 청의 사람으로서 활약을 하고 싶어 해서! 부득이하게 데려왔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진짜로?
눈빛은 어딜 봐도 ‘내꺼 내가 가져왔는데 뭐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고돌이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너라고.
“고돌이는 죄가 없습니다!!!”
너라니깐!!
“그만하십시오! 가여운 고래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결국 뻔뻔한 눈빛에, 가주는 미간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
‘성직자가 절도라니…….’
가정교육의 필요성을 어느 때보다 절실히 느끼는 그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눈앞에 거슬리는 금의 성직자 놈들이었다.
“쓸어버려라, 타란블룸.”
가주의 명령에, 고래의 순한 눈빛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그러고는 평소 가주가 타고 다니던 크기로 변하면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쾅!!
“크악!!”
“으악!”
타란블룸의 난동에 건물이 박살 나고, 성직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기 바빴다.
뒷정리를 신수에게 맡긴 일라이가 노엘에게 향했다. 도망가는 성직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뚱히 서 있는 노엘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니 일라이를 보고 얼어붙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네놈은 왜 여기에 있느냐.”
“……!”
아버지의 노성에 노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모양이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베리트에 간 아버지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설마하니, 아이작 놈이 불러낼 줄이야……!’
하지만 어버버 말문이 막히던 것도 잠시, 노엘은 재빨리 평정을 되찾았다.
여기서는 말을 잘해야 한다.
“그, 성녀 각성이 필요하다 하여 참관 중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부재중이셔서요.”
일라이의 눈썹이 불쾌한 듯 치켜올라갔다.
“누가 성녀 각성이 필요하다 했지?”
“당연히 필요하죠! 에슈아한테 성녀를 빼면 뭐가 남습니까!”
“네놈이 그리 가문에 헌신적일 줄은 몰랐구나.”
일라이의 말에 노엘은 믿어달란 듯 눈을 번득였다.
“저는 언제나 에슈아에 헌신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래. 에슈아에 헌신한다는 놈이 금의 성직자들을 거느리는 꼴이 아주 보기 좋구나.”
“……!”
“너는 언제부터 금의 사람이었느냐?”
아버지의 살벌한 음성에 노엘은 땀을 삐질 흘렸다.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거, 입을 잘못 놀리면 진짜 잘못될 수 있겠다고.
그는 최대한 에슈아에 걸맞는 말을 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건 성녀 각성을 위해…….”
가주가 빡친 듯이 노엘을 내려보았다.
“금에다 청을 내다 팔고, 계약마저 금의 신과 한 게, 대체 언제부터냐고 묻는 거다.”
노엘은 얼어붙었다.
설마 거기까지 꿰뚫어본 건가?
노엘의 표정에, 지켜보던 아이작은 풉 웃었다.
‘뭐, 아직 계약은 못 한 듯하다만.’
아이작에겐 느껴졌다. 저놈이 금가에 잘 보여 그 가호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실제로 금의 축복의 기운이 아주 미세하게 묻어 있었다.
‘뭐, 금의 추기경이 힘을 빌려줬겠지.’
갈무리를 한다고 한 듯하지만, 자신과 일라이의 눈은 피할 순 없다.
“지금은 우선순위가 있으니 넘어간다만, 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
일라이의 엄포에 노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연유로 오라는 건지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 처벌을 받겠지.
곧 일라이가 문 쪽으로 다가가자, 금의 성직자들이 반사적으로 막으려고 했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일라이의 눈빛에 성직자들은 헉,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서워도 너무 무서웠다.
곧 일라이가 문을 열려고 하자, 노엘이 막았다. 이대로 가주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정말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
“무슨 생각으로 성녀 각성을 막으시려는 지는 알겠습니다! 핏줄을 지키시려는 거겠죠! 하지만 버젓이 9계위가 된 성녀의 각성을 미루는 것도, 엄연히 신과 제국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노엘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해골왕은 인간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성녀야말로 해골왕을 죽이고, 인간들을 구원할 사자가 아닙니까!”
말을 듣는 아이작은 기가 찼다.
뭐, 정확히는 내 짝퉁 놈이다만.
‘언제부터 지가 해골왕에 그리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노엘은 알았다.
‘이거라면 아버지한테 먹힌다.’
성녀를 만들어내는 건 에슈아의 오랜 사명이었다. 가주로서 그 사명을 못 본 척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자식들을 산 제물로 바쳐야 하는 비합리적인 계약일지라도.
실제로 가주는 노엘의 말에 침묵했다.
‘청은 작은 것들을 지키기 위한 신앙.’
하지만 그 범위에 에슈아 핏줄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에슈아에 핏줄들은 모두 청을 지키기 위한 도구, ‘신앙의 수호자’들이니까.
그런 만큼 지금도 9계위가 된 성녀를 내버려 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가주의 사명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지금도 노엘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부디 가족들을 소홀히 하진 말아주세요. 할아버지의 손가락들도 다 같이 품으셔야 할 약자들입니다.
일라이는 오래전 아이작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일라이의 침묵에 노엘은 됐다 싶었는지 내심 웃었다.
에슈아의 사명?
솔직히 그딴 것은 줘도 관심없다.
중요한 건 레아를 성녀로 각성시키면 벤야민이 죽는다는 사실이다.
교황가가 그의 죽음을 원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눈엣가시 차남을 치워버릴 수 있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벤야민을 없애면 그의 관리를 받고 있던 에슈아의 재산도 쉽게 유동할 수 있었다.
‘뭐, 마음엔 안 들지만 에슈아의 이름은 값어치가 매우 높지.’
5대 가문이면 어디든 안 그렇겠느냐마는, 특히 청은 이뤄놓은 것들 덕에 대륙에서는 베리트 다음으로 이름값이 드높은 가문이었다.
지금도 에슈아의 직계라는 이름 하나에 돈을 빌려주는 곳이 대륙에 널렸다.
그랬기에 눈을 번득인 노엘이 가주를 설득했다.
“아버지, 저는 사실 아버지께서 이러시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간 가주로서 누구보다 철저하시던 분 아닙니까. 벤야민 형님도, 에슈아 사람이라면 충분히 본인의 사명을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원래 에슈아 사람들은 이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니까요.”
아이작은 기가 찬 듯했다.
허이고, 제일 사명에 관심 없을 새끼가 저 지랄을 하니 어이가 없네.
“그러니 벤야민 형님도, 아니 모두가 신을 위해 산 제물이 되는 일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지금껏 그래 왔지 않았습니까.”
아, 안 되겠다.
‘계속 냅두면 계속 지랄할 테니…….’
곧 아이작이 움직이려는 그 순간, 노엘의 눈앞에 불꽃이 튀겼다.
빠각!!!!
일라이의 주먹이 노엘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쾅!!
순식간에 저만치 날아간 노엘이 피를 흘리며 벽에 처박혔다.
얼굴뿐만 아니라, 목뼈, 목뼈와 이어진 어깨뼈 그리고 척추뼈까지. 상체가 박살 난 노엘이 비명 섞인 신음을 흘렸다.
곧 일라이의 살의 섞인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썩은 혓바닥 위에 에슈아의 사명을 올리지 마라.”
“……!”
그간 에슈아를 위해 희생한 자들의 숭고한 행동은 저리 가볍게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황한 노엘이 이게 아니라는 듯, 이를 갈았다.
“아버지, 그게 아니…….”
일라이가 노엘에게 선고를 내렸다.
“너는 오늘부로 에슈아의 성을 쓸 수 없다.”
“……?!”
…뭐, 뭐라고?
“동시에 5대 신앙에서 파문하며, 에슈아에서 영구히 제명한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에, 노엘은 멘붕이 온 듯했다.
가주의 권한으로 에슈아의 성 박탈. 그리고 추기경의 권한으로 5대 신앙에서 파문이라니! 이건 사실상 평민 농노로 강등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표정에 낄낄 웃던 아이작이 노엘에게 다가갔다.
“그렇댄다.”
아이작은 청의 직계들이 달고 다니는 푸른 보석을 망설임 없이 뜯어냈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아이작의 이죽거림에 노엘이 이럴 순 없다는 듯 외쳤다.
“어차피 성녀 각성을 막으려고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성녀의 각성 소식은 제국에 퍼졌습니다! 해골왕을 지켜줄 분이라며 기대하고 있다고요! 그걸 저지하는 것이야말로 청의 몰락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뭐로 보겠… 컥!”
노엘은 또 일라이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졌다.
“넌 더 이상 에슈아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
곧 일라이가 아이작에게 따라오라는 듯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참관인이 화들짝 놀랐다.
“성녀 각성식이 진행 중입니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당사자들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는 엄명이… 커헉!”
아이작이 안에 있던 의전사제를 걷어찼다.
“니들이 먼저 룰을 어기고 멋대로 진행했잖아, 씹쌔들아.”
“!”
그들은 산 제물이 있을 장소로 향했다. 그때, 일라이가 충고하듯 아이작에게 말했다.
“애석하지만 노엘의 말이 맞다.”
“!”
“기억해둬라. 신이 나타나면, 모든 게 끝난다. 신이 소환되면 더 이상 막을 수 없어. 산 제물로 줘 버려야 하지. 그러니 그게 나타나기 전에 벤야민과 조셉을 데리고 나오는 거다.”
그러나 아이작은 풉 웃었다.
뭐? 신이 나타나기 전에?
글쎄에? 난 그럴 생각 없는데?
난 그 새끼 면상을 봐야겠는데?
신들에게 당하고, 이 몸으로 태어난 지 무려 16년째였다.
아이작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이 일은 신성제국 안에서 신을 쳐부술 첫 단추가 되겠지.
‘지금까지는 다 분신체여서 줘팰 수가 없었는데, 이번 놈은 다르다.’
과연 어떤 놈이 가장 먼저 강림할까. 크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