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성녀 각성 (5)
몇 분 전.
아이작은 의전사제들을 때려눕히고 의식장에 들어섰다. 의식장 중심에는 신의 소환장과 이어진 소환진이 있었다.
그 소환진을 통과하자 아이작 일행의 앞에는 터널처럼 긴 굴이 펼쳐졌는데, 1명씩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라 아이작 입장에서는 답답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제 앞을 막은 할아버지를 사정없이 밟고서 터널에서 나온 아이작이 눈을 부릅떴다.
할아버지를 밟고 나오니 눈앞에는 바다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거기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호수로 쏟아내고 있는 강력한 빛까지!
아이작의 입꼬리가 으흐흐흐, 올라갈 수밖에 없다.
‘역시 신이다! 사랑스러운 먹이가 도착했어!’
어디 그뿐이랴.
‘이 기운, 이게 웬 떡이야! 푸헤헤후헿!’
척이면 척이었다. 이 기운은 자신과 계약한 신의 힘이었다. 최고신이 아닌, 신계의 현 실세 말이다.
[주인님에게 계약서를 내민 그 개새끼 말이죠?]
뭐, 그렇지. 결과적으론 그놈이 자신을 벌레에 빙의시켰다고 보면 되나?
물론 벌레를 들고 찾아왔던 건 형법의 신의 자식과 기타 상급신들이었지만, 봉인 술법을 건 것은 그놈일테니까.
하지만 그만한 실세 놈이 인계에 직접 올 린 없고, 보나 마나 걔 부하 놈이겠지만.
이 재수 없는 기운은 분명…….
‘푸흐흐흐흐, 그래. 놈의 휘하인 건 맞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
한편. 신나서 날뛰는 아이작과 달리, 짓밟힌 일라이는 죽겠다는 듯 미간을 짚고 있었다.
‘…이 패륜 손주 놈을 어쩌면 좋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신앙심이 부족해서 이 모양인가?
그런가?
그래, 신앙심을 채워주면 해결되려나???
물론 정작 그 손주 놈은 신앙심은커녕 신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서둘러야 한다.’
일라이는 눈을 부릅뜨고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맹렬한 빛과 함께 성스러운 소환진이 실시간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아마 저 소환진이 다 완성되면, 신이 강림하겠지. 산 제물을 먹어 치우고 성녀를 각성시키기 위해.
‘아직 조셉도, 레아도 무사한 것 같고.’
얼굴이 성냥 크기로 보이긴 하지만, 조셉과 레아는 호수 근처를 감싸듯 이어진 신전에 있었다.
곧 핏줄들의 안전을 확인한 그가 황급히 호수 쪽으로 향했다.
“벤야민은 저쪽이다.”
“!”
일라이의 말에 아이작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바다만 한 호수 한가운데에는 작은 배가 하나 떠 있었다.
그 배에는 공물을 뜻하는 흰옷을 입고 있는 벤야민이 있었다. 심지어 밧줄로 꽁꽁 묶여서 돛대에… 뭐? 묶여??!
아이작으로서는 기가 차다 못해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바, 인당수도 아니고, 저게 뭐여??”
지금 내 소중한 돈줄이 신 따위한테 ‘나 잡아드십쇼’ 하고 저러고 있는 거야? 어?!
‘어디서 감히!’
아이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할부지! 서둘러요!”
빡친 듯 외친 그가 황급히 성법을 사용했다.
<파도 걷기 (6계위)>.
상급 성법을 사용하자, 푸른 성력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스륵!
아이작은 그 상태로 고속활보를 써서 순식간에 호수 위로 뛰쳐나갔다.
터엉!
큰 물보라가 일어나고, 두 개의 올곧은 빛줄기가 호수를 양단했다.
패륜 손주를 따라가던 일라이는 내심 안도했다. 패륜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숙부를 지극히 생각하는 걸 보면 또 패륜은 아닐지도.
곧 둘이 호수 한가운데로 향하자, 지켜보던 조셉이 방방 뛸 듯이 기뻐했다.
“좋아, 이제 됐어! 할아버지랑 아이작이 왔다고!”
그는 쓰러져 있는 레아를 보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이제 괜찮아, 레아. 아버지를 구해주실 거야!”
몸의 의지를 빼앗긴 레아의 눈에서 눈물이 맺히는 게 보였다. 필시 아버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과 희망의 눈물이리라.
반면, 금의 추기경은 몹시 당혹스러웠다.
‘왜 저 둘이 여기에 있지?’
베리트에 간 것이 아니었나?
설마 교황께서 저들을 막는 데 실패했나?
아니, 하다 못해 키나가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이작 놈까지 여기에 있다고?
금의 추기경은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저 둘의 조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청의 추기경도 만만치 않지만, 그쪽은 행동이라도 예측이 가능하지.
‘저놈은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놈이다.’
솔직히 보수적인 금으로서는 가장 싫은 대상이다.
그러나 금의 추기경은 곧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사제들을 소환했다.
“성녀 각성을 막으려는 침입자들이다! 신이 강림하실 때까지 붙잡아!”
“명!”
신전 안에 있던 사제들이 황급히 호수 쪽으로 향했다.
아이작 일행을 보는 금의 추기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이 왔다 한들, 큰 변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신은 불러냈다. 예정대로 신은 강림하여, 산 제물을 먹겠지.
그런데 왜지?
왜 해골왕의 물건이 빛을 뿜어내고 있는 거지?
금의 추기경은 불안한 듯 조셉에게서 빼앗은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난동에 불려온 부하들도 놀란 듯 보았다.
“각하. 그 물건은……!”
“그래. 해골왕의 탈리스만이다.”
“!”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나. 그가 들고 있는 건 줄이 달린 브로치로, 몇백 년 전에 교황이 해골왕과 싸웠을 때 전리품으로 회수해온 것이다.
“그건 교황청의 금기 구역에 있던 것 아닙니까?”
“그게 왜……!”
금의 추기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금기 구역’이라고 해도 1품 사제들은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다. 에슈아 직계 정도면 1품 사제들과 연이 있으니, 쉽진 않겠지만 작정을 하면 가져올 수는 있다.
그래, 그러니 가져온 건 그렇다 칠 수 있지. 하지만 수백 년 간 빛을 내지 않던 물건이 왜 갑자기 반응을 하는데?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신과 상극이라 빛을 내는 건가?’
“아무튼, 서둘러 막아라! 산 제물을 빼앗기면 안 된다!”
명령에 맞춰 금의 사제들이 일라이의 아이작을 막으려고 했지만-
“버러지들이.”
청의 가주의 살벌한 눈빛과 함께, 강력한 성력이 금의 사제들을 찍어 내렸다.
쾅!!!
“크억!!”
“으악! 어후풉!”
금의 사제들은 사정없이 호수에 빠지며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크윽!”
역시 청의 가주를 상대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다.
가뜩이나 추기경들을 상대할 괴물들조차 이 세상에 많지 않건만, 그중에서도 가장 막강하다는 청의 가주라면 말 다 했지!
“죄송합니다! 저희로는!”
금의 추기경은 쯧, 혀를 찼다. 신을 소환할 때는 변수를 막기 위해 어지간하면 힘이 섞이지 않는 게 좋건만.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성법을 사용했다.
<순수의 배척 (9계위)>.
동시에 그가 바닥을 찍어 내렸다.
그러자 강력한 금의 힘이 침입자들을 날려버릴 듯 날아갔다.
터엉!!!
명백하게 아이작을 노린 공격이었지만, 일라이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쾅!!!
푸른빛과 금색의 빛이 호수 위에서 거칠게 맞부딪쳤다.
쿠구궁!
“으악!”
“크윽!”
엄청난 섬광과 함께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마치 호수의 모든 물이 뒤집힐 듯한 어마어마한 폭풍이 의식장을 휩쓸었다.
그와 함께 일라이는 빡친 듯 손을 휘둘렀다.
“새끼가, 물이 있는 곳에서 감히 누구한테 덤벼.”
일라이가 주먹을 쥐자, 호수 위로 거대한 용오름이 폭발하듯 치솟아 올랐다. 신전을 쓸어낼 정도의 거대한 쓰나미가 금의 사제들을 습격했다.
“물, 물이!”
“이쪽으로! 커헉!”
방해꾼들을 막아낸 일라이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여긴 내가 처리할 테니, 서둘러라!”
그는 먼저 호수 중앙으로 보낸 손주를 확인했다. 아이작이라면 필시 벤야민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었는데…….
번쩍!
일라이는 등 뒤에서 번쩍이는 섬광에 얼굴이 드물게 굳었다. 인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엄청난 빛이 등 뒤에서 쏟아졌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일라이가 모를 리 없다.
쿠구구!!
“……!”
신의 강림.
고개를 돌린 일라이는 절망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줄기 안에서, 금빛을 휘감은 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형태는 짐승으로, 마치 용과 닮았다.
그건 신수나 마수 따위가 아니다.
‘신.’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크기의 존재가 거기에 있었다.
일라이는 본능적으로 늦었음을 깨달았다.
‘한발 늦었다.’
그는 다급하게 벤야민에게로 가는 아이작을 불렀다.
“아이작! 돌아와라! 더 이상은 위험하다!”
이대로면 아이작까지 신에게 먹혀버리게 된다.
그는 황급히 아이작을 불렀지만, 아이작은 듣지도 않고 호수 중심 쪽을 향해 멀어져갔다.
“아이작!”
일라이의 목소리가 멀어질 때쯤, 아이작은 호수의 중앙에 도착해 있었다.
[저기 있네요!]
작은 점으로 보이지만, 닻을 내린 배에 묶여 있는 건 틀림없는 벤야민! 아이작은 바로 배 쪽으로 다가가 올라탔다.
텅!
낯익은 얼굴이 배 위로 올라오자, 벤야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작?!”
안경을 벗은 채 공물로 바쳐질 준비를 마친 그는 새하얗게 질렸다.
“네가 왜 여기에… 아니! 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러나 아이작은 길게 말할 시간이 없다는 듯 벤야민의 밧줄을 풀었다.
“됐으니까, 빨리 나갈 준비나 해요!”
“미쳤느냐? 당장 썩 돌아가!”
“아 됐고, 얌전히 따라ㅇ…….”
“그만하라지 않느냐! 여기에 있다간 너까지 먹힌다!”
아이작은 빡친 듯 벤야민을 보았다.
아오. 이거, 확 기절시켜서 데려갈까?
그러나 뭐라고 하려던 벤야민의 얼굴이 굳었다. 아이작의 등 뒤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금빛의 존재 때문이었다.
[제물이 둘이라.]
“!”
인간 따위는 미물로 보이게 하는 강대한 힘이었다. 그동안 인계에서 볼 수 있었던 천사나, 터주신, 신수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격이 다르다는 의미였다.
[하급품 하나랑 최상급이라. 이번 제물은 굉장히 쓸 만하겠어.]
아이작은 거슬린다는 듯 목을 우득거렸다.
[누굴 먼저 먹어줄까?]
그 말에, 아이작은 살벌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먹혀야 할 건 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