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성녀 각성 (6)
소환장에 폭풍이 몰아쳤다.
“으아악! 서 있을 수 없어!”
“뭐라도 붙잡아!”
허리케인을 방불케 하는 거친 비바람이 소환장을 강타했다. 성직자들은 눈앞이 보이지 않는 거센 파도와 비바람에 쓸려갈 기세였다.
쿠구궁!
“크윽!”
이곳은 유일하게 신을 소환할 수 있는 금이 5대 신앙을 대표해서 신을 부르는 장소. 금의 신앙이 관리하는 공간이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막강했다.
호수와 멀찍이 떨어진 신전에 있던 이들도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재앙을 보는 듯한 이 상황에서, 산 제물이 있는 최중심지에 향한다는 건 꿈도 못 꿀 일. 그건 일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장, 성녀 각성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리되면 돌이킬 수 없다. 벤야민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의 경우엔 아마 괜찮을 것이었다. 손주는 제물의 대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성녀 각성과 연관 없는 자까지 삼켜지진 않을 거다.’
그러니 순수하게 먹힐 확률은 낮지만, 문제는 저기 들어간 게 하필 아이작이란 거지.
‘그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얌전히 숨어 있어도 신의 기운 때문에 짓눌려 죽을 판인데, 시비나 안 털면 다행이지. 하지만 저놈은 벤야민을 뱉게 하겠답시고 신의 몸에 설사약을 처넣고도 남을 놈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신과 조우한 아이작 눈이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물론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건 덤.
‘시바. 고작해야 신 놈이 감히 누구를 잡아먹어?’
위스퍼도 빡쳐서 난리를 쳤다.
[조지죠! 당장 뱀장어구이로 만들어버리죠! 어디 각성을 담당하는 놈이이이!]
저 용처럼 생긴 신은 <각성의 신>. 기원과 소망을 먹고, 그 대상의 힘을 업그레이드해 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놈을 보는 아이작은 핏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뭐, 금쪽의 신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빡치긴 하지만, 저놈이 하는 말 때문이었다.
‘뭐지? 나까지 먹는다고? 산 제물은 성녀의 직계만 된다고 했는데?’
아이작도 각성의 신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몇백 년 전, 교황이 해골왕과 싸울 때 활용했던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성기사들의 힘이 갑자기 세져서 당황한 적이 있지.
‘뭐, 그래 봐야 이 몸이니까 다 처발라 버렸지만.’
[하지만 그때의 공물은 산 제물이 아니라, 인간진영의 10년 치 식량 아니었나요?]
‘뭐, 그 공물이 변형되어서 산 제물이 된 거겠지.’
산 제물을 쓰면서 힘의 위력은 더 올라갔을 것이다.
‘소망이란 결국 얼마나 절실하냐의 문제라.’
하물며 직계 가족이라면 더욱 효과가 커지겠지. 그래서 아이작도 나름 산 제물이란 시스템에 납득하고 있던 참이었다.
산 제물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10계위가 되려면 그쯤은 바쳐야 겨우 그만한 힘을 한 번에 얻겠다 싶었다.
그런데 뭐?
레아와 직계도 아닌 나까지 처먹어?
눈치 빠른 아이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길 수밖에 없다.
‘이제 보니 다 쇼였구나?’
[예?]
‘사실 제물은 누가 되든 상관없던 거였어.’
[정말이요?]
‘그래. 성녀에게 부채감을 심어주려고 일부러 직계를 고른 거야.’
아니나 다를까, 가까워지는 용이 입을 쩝쩝 다셨다.
[뭐, 한 마리만 먹어도 되지만, 많을수록 배가 부르니 좋겠지.]
심지어 신 놈의 새끼가 식탐까지 생겼어?? 원수 놈에게 식량 취급을 받은 게 열 받긴 했지만 그는 곧 풉, 비웃었다.
‘허, 뭐 그래. 이해는 한다. 이 몸같이 뛰어난 상급품을 보면 침이 줄줄 나는 게 정상…….’
[하급품. 네놈도 맛있게 먹어주마.]
…시바. 하급품이 내 쪽이었냐?!!
신은 몰랐냐는 듯 느릿하게 비웃었다.
[신앙심만 보면 네놈은 질이 가장 떨어진다. 잘도 사제가 되었군?]
“그럼 처먹지를 말지?!”
[그럴 순 없지. 하자는 있지만 능력만 보면 특등품이니까.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지?]
곧 아이작에게 흥미를 느낀 신이 점점 가까워졌다. 솔직히 하자가 있네, 어쩌네 했지만, 사실 그 하자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아이작은 최상급이었다.
‘뭐지? 이 정도의 힘이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데?’
교황? 아니, 그릇만 보면 이미 교황과 맞먹긴 하지만, 저건 교황이 아니다.
그럼 뭐지? 인계에서 저만한 힘을 가질 건 교황밖에 없는데?
뭐, 상관없나?
저걸 먹으면 자신도 큰 힘을 얻을 것이었다. 오히려 성녀를 각성시켜주는 대가치고는 차고 넘치지.
[이번 대의 에슈아는 굉장히 기특하구나. 어디서 저만한 걸 구해와서는. 이번엔 특별히 신경 써서 각성을 시켜주마.]
그 말에 벤야민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아이작이라면 그래도 영향이 없을 줄 알았는데……!’
레아를 각성시키는 데, 직계가족이 아닌 아이작까지 먹으려한다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대로면 정말 아이작까지 먹힐지도 몰랐다.
벤야민이 급하게 외쳤다.
“아이작, 내가 시간을 끌 테니 어떻게든 도망쳐라! 너라면 도망칠 수 있다!”
“뭐, 인마? 빌어먹을 신 앞에서 도망치라고? 어떻게 그런 심한 모욕을! 아무리 사랑하는 돈ㅈ… 숙부 놈이라고 해도! 뒤지고 싶으세요?!”
“…….”
아이작의 말에 벤야민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 되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네가 죽으면 에슈아는 어쩌라는 것이냐!”
“!”
벤야민은 숨을 토해내듯 외쳤다.
“네가 가문에 있기에 나도 당당한 마음으로 제물의 길을 택한 것이다. 네가 에슈아를 이끌어줄 것을 아니까!”
“……!”
에슈아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골왕을 죽이지 못한 업보를 안고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사들을 독려하고 에슈아를 지키고자 했다.
청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했으니까. 언젠가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되찾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녀석을 죽게 할 순…….
“아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소중한 조카를 죽게 하고 싶진 않다.”
“!”
벤야민에게 있어 아이작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형님의 아이였다. 아무리 능력이 없다 한들 조카 하나 못 지켜서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 모습에, 다가오는 신이 피식 비웃었다.
[그리 안 싸워도 된다. 어차피 둘 다 한번에 삼켜줄 테니. 고통도 뭣도 없을 것…….]
신이 다가오려는 그때였다.
움찔.
아이작에게 가까워지던 신이 어째서인지 멈칫했다.
뭐지?
아이작에게 다가갈수록 뭔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상급신이라도 얼어붙게 할, 냉소적이고 고압적인 이 느낌.
‘잠깐. 이 느낌은?’
신은 순간 얼어붙었다.
틀림없었다.
‘최고신?!’
잠깐, 왜 이런 곳에서 최고신의 기운이?
그리고 그 주춤한 상황을 눈치챈 건지, 아이작이 씨익 웃었다.
“왜 그래? 우리 잡아먹는다며?”
[품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냐?]
“숨겨? 숨기긴 뭘 숨겨? 아 혹시 이거 보고 놀란 거야?”
아이작은 능청스럽게 손의 토시를 풀어 헤쳤다. 그러곤 손등이 보이도록 높이 들어 보였다.
“눠무 죄송해서 어쩌지? 제가 신의 종자가 되어서 아직 자기소개도 안 했네요.”
보통은 신과 계약한 상징인 각인을 은근히 드러내려고 한다. 성직자들에겐 본인의 신분증이니까. 하물며 그게 상급신이라면 더욱 가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작은 일부러 봉인이 걸린 토시를 끼고 다니며 숨겼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각인이 잘 보이게 흔드는 아이작이 웃었다.
“너, 이거 앞에서 개겨도 되겠어?”
[?!]
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아이작이 보여주고 있는 각인은 틀림없는 최고신의 문양.
심지어 그냥 문양이 아니었다.
‘선점의 문양?’
쉽게 말해, 신이 찜해놓았다는 의미다.
게다가 눈에 가장 잘 보이는 부위라니……!
각인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을수록 신의 관심도가 높다는 뜻. 노출도는 신의 관심도와 비례한다는 말이다.
그 증거로, 지금도 아이작의 주변에서 서슬 푸른 냉기가 휘몰아쳤다.
신이 당혹감을 숨기며 되물었다.
[뭐지? 네놈은 뭔데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냐?]
그 말에 아이작은 씨익 웃었다.
그래, 이놈.
당황스러워하길 기다렸다!
놈이 각인에 시선을 뺏긴 그 순간, 아이작이 바로 뭔가를 꺼냈다. 그건 다름 아닌 딸랑이… 아니, 금막대.
<청의 비전- 투환>.
성녀들이 주로 쓰던 기술로, 물건을 포환처럼 무식하게 내던지는 기술이다. 거의 광속으로 날아가는 포환이라, 맞으면 죽는다.
해골왕 때도 이 기술로 툭 하면 멜리사한테 처맞아서 골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딸랑이에 성법을 건 아이작은 신의 주둥이를 향해 그대로 내던졌다.
쾅!
물론 성법은 신 앞에서는 의미가 없지만, 입에 골인시키는 것만으로 충분! 곧 딸랑이가 놈의 입에 들어간 그 순간, 아이작이 외쳤다.
“벤야민! 눈 감앗!”
“!”
숙부의 눈을 가린 아이작이 바로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헬 플레어>.
그 순간, 딸랑이에 응축시켰던 마력이 폭발했다. 동시에 딸랑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쾅!!!
마치 몸 안에서 폭발이 일어나듯, 엄청난 화염이 신의 몸 안을 바싹 태워버렸다.
[크악!!]
신은 괴로운 듯, 몸을 비틀었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며 캬아, 웃었다.
뭐 해골왕의 고유 마법까지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무난한 마법을 썼건만.
‘그래도 더럽게 아플 거다!’
그 광경에 위스퍼가 한 소리 했다.
[이러다가 죽겠습니다, 정말 죽이셔도 됩니까? 각성은요?]
‘크흐흐. 상관없어. 내가 괜히 직접 신을 상대하러 온 게 아니지.’
긴가민가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까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각성의 핵심은 저놈의 내장 기관이다.’
[예? 그럼?]
‘저것만 뜯어내면 신이 없어도 각성시킬 수 있지.’
[헉, 그럼!]
하지만 괜히 신이 아닌지, 놈이 눈을 부릅뜨며 일어났다.
[감히 종자 놈이 신을 향해!]
…아, 역시 좀 부족했나?
[시건방진 놈이!]
결국 신이 아이작을 삼킬 듯 험악하게 달려들자, 아이작이 재빨리 손등을 들이밀었다.
“진짜 나 먹을 거야? 어? 감히 이거 앞에서?”
[크윽……!]
최고신의 문양 앞에서 신이 다시 주춤했다. 그러자 아이작이 씨익 웃었다.
“벤야민! 눈 감아!”
그러곤 또다시 신의 입을 향해 날아가는 금막대!
<헬 플레어>.
쾅!!!
[이놈이! 본때를…….]
“진짜 나 공격할 거야? 이거 앞에서?”
[크윽!]
“벤야민! 눈 감아!”
쾅!!!
[젠장, 이 빌어먹을 놈이…! 성녀 각성을 원하지 않는 것이냐……!]
“벤야민 눈 감앗!”
쾅!!
벤야민은 이제 눈을 뜨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