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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23화 (223/272)

제223화. 성녀 각성 (8)

벤야민은 믿기지 않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신이 호수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신에 대한 경외심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그을린 채로.

그 죽은 모습이 매우 초라하고 하찮아서, 저게 정녕 에슈아를 두렵게 하던 그놈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살았다는 안도와 조카를 살렸다는 기쁨과는 별개로,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신을 죽이시다니. 분명히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벤야민의 말에 일라이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신이 아니다. 장어 놈이지.”

아버지의 우김에 벤야민은 기가 찼다. 아니… 그래. 자신이 봐도 물고기로 보이긴 하다만.

“장어라니요. 어디 아이작이나 할 법한 말씀을…….”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구이로 지졌다. 에슈아의 겨울 식량으로 좋아 보이는구나.”

벤야민은 얼굴을 짚었다.

‘빌어먹을, 아버지까지 아이작한테 물들었어……!’

이제 에슈아에서 멀쩡한 건 나뿐인가!

아니, 노엘과 고엘도 있나? 아니,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나쁜데!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성직자가 신을 죽였다.’

이제부터 닥쳐올 일이 예상 가지 않을 리 없었다.

“아버지, 뒷수습은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허, 뱀장어 하나 구웠는데, 뭐 그리 문제라고.”

“아버지!!”

벤야민이 뭐라고 하려는 그때, 누군가가 벤야민에게 와락 안겼다.

“아버지!”

“!”

레아였다. 벤야민에게 안긴 그녀가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신이 죽자, 그녀를 옭아매고 있던 신의 주박이 풀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지,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정말……!”

아무리 힘들어도 우는 법이 없던 딸이 감정을 토해내듯 눈물을 터트리자, 벤야민은 코끝이 아려왔다.

한 번도 우는 소리 없이 일찍 철든 아이였다. 처음 보는 딸의 눈물에 아버지로서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이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것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던 걸까.

“그래, 미안하다. 나 역시…….”

벤야민이 감격하며 딸을 안아주려는데, 품이 이상하게 허전했다.

“레, 레아?”

아버지에게 안겨있던 딸이 쌩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나 싶었더니, 그사이 아이작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작! 괜찮아? 아이작!”

아이작을 소중하게 안으며 살피는 모습에, 아버지는 아주 쬐끔 서운해졌다.

딸아, 아버지가 더 소중한 거 맞지? 그런 거지?

하지만 레아는 아이작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그를 애타게 불렀다.

“아이작, 괜찮아? 죽으면 안 돼!”

그러자 레아에게 안긴 아이작이 답했다.

“응. 나능 갱차나… 우웨엑!”

또다시 아이작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쏟아지자, 레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이작!”

아이작은 스윽 입을 닦았다.

하, 시바. 하루 빨리 해골왕의 마법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키워놔야지, 원.

그들은 급하게 아이작을 안곤 호수에서 육지로 향했다. 레아가 아이작을 치료하기 시작하자, 아이작의 몸 상태는 빠르게 좋아졌다.

그렇게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을 때쯤, 육지에 있던 조셉도 다가왔다.

“자식,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는데.”

조셉은 드물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아버지를 구해줘서 고맙다.”

“!”

“이 은혜는 이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반드시 갚을게.”

아이작은 의외라는 듯 조셉을 보았지만, 곧 호박이 넝쿨로 들어온다는 듯 푸흐흐 웃었다.

캬, 이 장사치 놈이 이렇게 나오네? 이놈이 에슈아를 떠나지 않고 남아 노예로만 있어 준다면, 대환영이지.

조셉은 개구쟁이 아이처럼 아버지를 안으며 킥킥 웃었다.

“뭐, 신을 죽인 이상 레아의 각성은 물 건너가긴 했지만, 상관없죠?”

그러자 벤야민은 바로 정색했다.

“상관이 없다니! 목숨은 건졌지만, 에슈아에서 성녀를 배출되지 못하면 치명적이다.”

“!”

벤야민은 이제부터가 문제라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가문의 존속이 걸린 문제였다.

“하필 각성의 신을 죽여버렸으니, 앞으로 가문은 어떻게 될지…….”

‘아니, 거기까지 갈 수도 없나.’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앞에 금의 추기경과 금의 사제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에슈아는 이게 무슨 짓인가.”

“제물이 돼야 하는 놈들이, 신을 죽이다니. 성직자가 지금 무슨 짓을!”

그들의 등장에 에슈아 일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이다.

금의 사제들은 당혹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딱 걸렸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은 우리 금의 문제가 아니다. 신은 5대 신앙이 모시는 공동의 존재! 모든 신앙이 너희를 힐난할 것이다.”

“드디어 금기에 손을 댔구나, 에슈아.”

설마 이런 식으로 정체를 드러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해골왕을 죽이지 못한 것도, 사실은 그쪽의 첩자였던 거지.”

“당장 이 건을 이단재판에 회부해서 에슈아를 처형해야 합니다!”

그 말에 레아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얼어붙었지만, 일라이가 가족들을 보호하듯 나섰다.

“이단재판?”

“!”

일라이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쓴 기술이 뭐라고 생각하지?”

“뭐?”

“나는 항마의 성법을 썼을 뿐이다. 신이 항마의 성법에 맞고 죽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일라이의 말에 금의 사제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뭐가 어째?!

이게 무슨 말이냐는 듯, 금의 추기경이 급히 지시했다.

“즉시 확인해라.”

그조차도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일라이의 말이 맞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호수에 나갔던 금의 사제들이 정신이 나간 얼굴로 다가왔다.

“각하. 그… 맞습니다. 청의 항마성법입니다.”

“뭐라고?!”

이게 무슨…! 그럴 리가!

금의 사제들은 미쳤냐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항마의 성법은 언데드나 마속성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다.’

신에게 절대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 통할 리가 없는데…….

그때였다.

“그래. 정말로 항마의 성법이었지?”

“!”

마치 낙뢰라도 맞은 듯, 금의 추기경이 움찔했다. 일라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상황이니, 오히려 니들에게 묻고 싶군.”

“!”

“금은 언제부터 신이 아닌, 마를 섬기고 있었지?”

…미친, 뭐라고?!

그 광경에 레아에게 안겨있는 아이작은 낄낄낄 웃어댔다.

‘할부지, 왜 저리 심할 정도로 과격하게 태워버렸나 했더니.’

설마 흑마법을 쓴 흔적을 지워버리려 한 건가?

아이작은 힐끗 일라이를 보았다.

‘뭐, 추기경들이라면 흑마법의 기척을 못 느낄 리 없지.’

지금은 거리가 있었기에 일라이만 눈치챈 듯하지만, 본격적으로 조사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히 흑의 추기경의 손에 들어가면 시체 분해 과정에서 뭔가를 눈치챌 수도 있었다.

곧 금의 사제들이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멀긴 했지만, 저는 분명 봤습니다! 화염이 터졌습니다!”

“맞습니다, 그 화염은 필시 성법이 아닌, 마법……!”

그 말에, 아이작이 뭐라고 반박하려는 그때-

철썩!!

“커헉?!”

일라이가 돌연 아이작의 등을 내리쳤다. 그 강력한 힘에 아이작은 바로 피를 토했다.

“우우에에겍!!”

아물었던 내상이 터진 것이다.

일라이는 눈을 번득이며 바로 금의 사제들을 협박했다.

“네놈들은 이 부상이 뭐라고 생각하지?”

“예??”

“저 신이 내뿜은 힘에 의해, 우리 귀여운 손주가 내상을 입었다.”

그 말에 피를 토하는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할부지. 괜찮아!

‘그냥 내가 먹은 해골왕 뼈의 짓이라고 할 생각이었다고!’

얻는 게 있으니 그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할 생각…….

철썩!!!

“꾸에에엑!”

또 등짝을 맞은 아이작이 다시 피를 토했다.

일라이는 한층 더 분노하듯 금의 사제들을 노려보았다.

“분명 우리 애가 철이 없어 숙부를 구하려고 뛰어든 건 맞다. 하지만-”

철썩!!!

“꾸에에엑!”

“사악한 힘을 써서 우리 애를 이 꼴로 만든 게 누구지?”

…시발!! 손주 잡네!!!!

“그렇지? 아이작? 신이 널 이렇게 만들었지?”

이 새끼가 입 안 맞추면 아예 기절시키겠다는 눈빛이네!

아무튼 의도는 알겠어!

저놈들한테 몽땅 뒤집어씌우려는 건 알겠다고!

‘피를 흘리면서 말해야 효과가 좋은 건 알지만, 진짜 아프…….’

철썩!!

"꾸에에엑!”

의도 알았다고, 자식아! 그믄! 그므으으은!

[그 손자의 그 할아버지네요. 주인님도 저놈들한테 몽땅 뒤집어씌우려고 하셨잖아요. 의혹의 여지 자체를 안 남기려고.]

그래, 그렇긴 한데.

[마법 쪽은 드래곤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셨잖아요.]

‘티 났냐?’

[빤하죠. 드래곤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면, 주인님한테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캬, 이 결혼 사기꾼. 결혼하기 싫어서 수작 부리시는 것 보소…….]

‘아, 왜! 내가 결혼 따윌 할까 보ㄴ……!’

철썩!!

“우꾸에엑!”

결국 할아버지의 등짝 스매시에 죽을 것 같았던 아이작이 답했다.

“…눼. 신이 언데드라는 걸 깨닫고 성법을 쓰려 했는데, 그 힘이 역류해서는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금의 사제들은 억울해했다.

“모함입니다! 조셉 에슈아가 해골왕의 탈리스만을 훔쳐 온 것처럼, 저놈도 마법과 관련 물건을 들고 온 것입니다!”

아이작의 귀가 쫑긋 솟았다.

‘어엉…? 해골왕의 뭘 들고 와?’

그러자 금의 추기경은 골치 아파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시신의 조사? 그거야 흑가에 넘기면 된다. 워낙 훼손이 심해서 건질 게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뭐라도 나오겠지.

하지만 사실 그게 무의미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항마의 성법으로 신의 목숨이 끊기다니……!’

청의 가주 역시 그걸 지독하게 파고들 게 분명했다. 하필 교황이 서고 건으로 벤야민을 죽이려고 한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하지만 뜻대로 해줄 것 같으냐?

청 주제에 건방지게. 오히려 지금 위험한 건 자신들뿐이 아니거늘.

곧 금의 추기경이 말했다.

“경위야 어쨌든, 에슈아가 각성의 신을 죽인 건 맞다. 너희는 이제 더 이상 성녀를 키워낼 수 없지.”

“!”

“너희는 에슈아의 가장 큰 비전을 잃는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 5대 신앙의 자격이 사라졌다. 다른 이들도 모두 동의할 테지.”

금의 추기경의 말에, 에슈아의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한 말이 틀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일라이도 침묵했다.

그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는 듯했다. 사실 그는 이 모든 걸 감안하고 핏줄을 구하길 선택한 것이었다.

‘신을 죽이기로 결정한 시점에서, 성녀는 포기한 것이다.’

성녀를 키워내지 못하면 에슈아는 무너진다.

하지만 아이작이 말하지 않았는가.

가족들 역시 소중한 손가락들이라고.

그랬기에 일라이는 택한 것이다.

“우리는 작은 것을 지키는 신앙. 그깟 명예와 자격이 무엇이 중요한가.”

“!”

“작은 손가락들을 지켜냈으니, 청으로서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레아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금의 사제들도 순간 놀란 듯 넋을 잃고 일라이를 보았지만, 금의 추기경은 혐오하듯 그를 보았다.

“끝까지 번지르르한 말만 하기는. 그러면 박탈에 동의하는 거겠지? 그럼…….”

그런데 그때, 아이작이 씨익 웃었다.

‘각성을 왜 못 해. 시바 놈들아.’

레아에게 폭 안겨있는 그는 여우처럼 웃으며 위스퍼에게 지시했다.

‘시작해라.’

[넵!]

그는 신의 몸에 손을 댔을 때, 위스퍼의 일부를 안에 심고 왔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아니나 다를까, 신의 육신에 몰래 숨어 있던 위스퍼가 흐흐흐 웃으며 신의 내장기관을 뜯어냈다.

콰직!

그러곤 주인이 시키는 대로 내장기관에 힘을 실었다.

그 순간, 놀라운 빛이 터져 나왔다.

번쩍!

“어?”

눈부신 빛이 레아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바로 그 빛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빛은!”

“각성…! 성녀 각성의 빛이다!”

“뭐라고?!”

신이 죽었는데, 각성이라고?

금의 추기경이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어?”

레아뿐만 아니라, 0계위인 벤야민과 조셉에게도 각성의 빛이 발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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