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드러나는 진실 (4)
릴라이와 슈리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일대일로 싸우… 아니, 굴린다고?‘
슈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보다 저 새끼, 방금 릴라이라고 하지 않았…아냐아냐, 아냐! 내가 잘못 들었겠지.
‘그래, 암만 저 새끼가 패륜아여도 숙부들한테까지…….’
그러나 릴라이를 본 슈리는 뭔가 납득했다.
응…. 잘못 들은 거 아니구나.
릴라이는 얼굴을 두 손으로 짚으며 좌절 중이었다.
“슈리야.”
“옙.”
“이 숙부가 귀가 좀 안 좋아진 것 같다.”
“아뇨. 제대로 들으신 거 맞을걸요.”
“우리 착한 아이작이 그럴 리 없어.”
“아뇨. 저 새끼 원래 저렇습니다.”
“큰형님 부부랑 카야 건으로 아이작이 잠시 충격을 받아서!!“
“아니, 원래 저렇다니까요?”
“그럴 리 없…….”
“슈리! 릴라이! 이 자식들, 내 말 듣고 있냐!”
아이작의 성난 목소리에 릴라이는 좌절했다.
…성녀 각성 이후였을까. 벤야민이 ‘죽으려고 했는데 아이작 교육 때문에 다시 관짝 열고 나왔다!’ 하고 호통치며 날뛰던 이유가 이거였던 건가?
“아냐, 아냐. 우리 아이작이 그럴 리…….”
“릴라이! 너는 벤야민이랑 붙어! 지면 빡세게 굴릴 거야!”
부정도 할 수 없는 아이작의 외침에, 슈리가 눈치를 보며 다가갔다. 릴라이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쭈그리고 앉아 미간을 짚고 있었다.
뭐, 릴라이는 아이작이 젖먹이 때부터 키워온 실질적 아버지나 마찬가지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으리라.
이젠 콩깍지가 벗겨져도 이상하지 않다.
“숙부님,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해골왕, 이 버러지 같은 놈…….”
…예?
“해골왕! 저런 귀여운 아이를 타락시키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음. 이거, 해골왕 짓인 거야?
곧 아이작이 눈을 번득이며 외쳤다.
“지금 바로 벤야민이랑 조셉한테 여기로 오라 해!”
“이미 왔단다.”
“!”
벤야민과 조셉이 걸어오고 있었다.
수련장에서 웬 폭발 소리가 들려서 왔더니.“
이건 도대체 무슨 광경인 건지.
곧 아이작이 누군가를 찾았다.
“레아는?”
그 질문에 답하듯, 아이작의 등 뒤에서 포근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이작, 잘 있었어?”
레아가 아이작을 뒤에서 꼭 끌어안은 것이다.
레아는 성녀 각성 이후, 표정이 완전히 피었다. 원래도 어른스러운 성격이라 성숙하게 웃긴 했지만, 늘 어딘가가 어두웠는데. 지금은 딱 그 나이 대로 보였다.
[뭔가, 주인님을 더 좋아하게 된 듯하네요.]
그전에도 레아가 아이작을 좋아하는 낌새는 있었지만, 그땐 불안과 초조함이 더 깊었다.
과거엔 아이작을 같은 목적을 가진 조력자로 여기는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유일한 구세주로 보는 느낌이랄까.
‘뭐, 아버지를 구해줬으니 구세주 역할은 열심히 했지.’
레아가 흑화하면 이쪽이 곤란했으니까.
하지만 위스퍼가 음흉하게 웃었다.
[제가 보기엔 구세주 겸 남자로 보는 것 같은데요? 흐흐흐.]
‘어, 그건 네 착각.’
그런데 그때, 벤야민이 질색하듯 아이작을 보았다.
“그나저나 아이작, 너 이제… 속내를 숨길 생각도 없지?”
“뭔 개소리야, 속내라니… 아……!”
아이작은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그는 몇 연타를 먹어버린 듯한 릴라이를 보면서 아차 싶었다.
‘연기가 풀렸구나!’
젠장, 이 개 같은 청가 놈 쉐이들! 이 새끼들이 내 말을 개무시하는 바람에 빡쳐서 그만!
“수, 숙부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아니다. 이걸로 해골왕을 죽일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아니 그 해골왕이 나라니까, 새꺄?!
“아무튼, 왔으니 잘됐네요. 벤야민 숙부님! 싸워, 당장! 저놈들이 제 방법을 안 믿어!”
벤야민은 어이가 없었다.
조카야. 존대를 하든 반말을 하든, 하나만 할래……?
‘그보다 당연히 안 믿지.’
저놈들은 릴라이가 이끄는 청의 최정예 ‘범고래’들이었다.
청의 최고 등급 임무를 맡는 이들로… 그래, 쉽게 말하면 청에서 제일 엘리트 기사들이란 의미다.
그런 최상급 엘리트들한테 지금까지 수련하던 방식을 버리고 이상한 걸 들이미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싸우라니……?
“각성시켜준 건 고맙다만, 5계위와 6계위랑 싸우라는 건, 저놈들한테 굉장한 실례인데.”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생명의 은인이신 작은 주인님이 시키시는 일이면 다 합니다!”
기사들이 눈을 번득이자, 벤야민이 알은체를 했다.
“아…. 니들, 델로스에서 장기 뜯겼던 놈들이구나.”
“예! 아직 아이작 님을 인정하지 않는 개놈들이 있긴 하지만! 각성할 수 있다면, 부러워 미칠걸요!”
“공사는 가려라. 릴라이, 빨리 헛소리하는 저놈들 데리고 돌아가…….”
“좋다. 받아주마.”
“?!”
릴라이가 형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검집은 뽑지 않았다.
“내가 이기면 아이작은 나한테서 해골왕 대가리를 깨기 위한 수련을 받는 거다! 이 숙부가 확실한 길로 이끌어주마! 형님은 6계위시니까, 특별히 검은 안 뽑겠습니다!”
벤야민은 기가 찼다.
“9계위가 0계위한테 뭘 진심으로…….”
그러자 아이작이 얼른 벤야민과 조셉에게 속삭거렸다.
그 말을 들은 벤야민과 조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그렇게만 하라고?
릴라이는 분노했다.
“죽일 각오로 최선을 다해라, 니들!”
그러나 기사들은 몸을 푸는 조셉을 보면서 난처해했다.
“최선을 다하라니…….”
“아무리 그래도 조셉 도련님이 저희를 이길 리 없잖습니까. 암만 아이작 님이 직접 각성시키신 거라지만… 어?”
검을 챙 뽑아 든 조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어어어?”
기사들은 당황한 듯 주위를 살폈다.
사라진 조셉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
“헉!”
조셉의 기척을 느낀 것도 잠시, 그들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분명 하늘에서 기척이 느껴졌던 조셉이 어느 사이 기사들의 품 안에 들어온 것이다.
“어, 어어어???”
그러곤 조셉은 씨익 웃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푸른 안개>.
강력한 성력이 폭발하듯, 기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날아갔다. 순식간에 8계위 기사 둘이 당하자, 릴라이가 언성을 높였다.
“너희들, 똑바로 해! 주인 가문이라고 그렇게 봐줄 필요는…….”
“아니…. 봐드린 게 아닙니다!!”
“뭐??”
봐준 게 아니라니?
그러나 기사들은 오히려 당황한 듯 조셉을 보고 있었다.
조셉의 검술 실력은 그를 가르친 자신들이 제일 잘 알았다. 딱 3계위 수준. 그런데 이렇게 바뀐다고?
“뭐지? 5계위인데 전혀 다른…….”
도대체 아이작이 뭔 짓을 했길래……!
하지만 그를 믿지 못하는 릴라이는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나중에 단체 기합이다!”
그렇게 외친 릴라이는 바로 벤야민을 향해 달려갔다.
벤야민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성법을 발동했다. 아이작이 말해준 방법대로였다.
번쩍!
강력한 푸른빛이 날아오자, 릴라이는 대수롭지 않게 검으로 쳐냈…….
‘어?’
쳐내기는 개뿔, 성법이 검을 뚫고 들어왔다.
“잠…! 큭!”
뚫고 들어온 성법이 릴라이의 몸통을 스쳤다. 위력이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물체를 투과하는 성법이군?’
청에서는 잘 쓰지 않는 적가 계열의 성법인데.
곧 하늘에서 장대비 같은 빛이 떨어졌다.
검과 방패 등 물리적인 도구를 쓰는 성기사들에게는 효과적인 투과 성법이지만, 이 성법의 약점은, 같은 성법!
<인내의 숨결>.
릴라이가 방어 성법을 펼쳤다.
괜히 차기 가주로 거론된 게 아닌지, 강한 성법을 다룰 수 있는 릴라이의 성력에 푸른 배리어가 머리 위로 생겨났다.
‘저 성법은 어차피 연달아 쓰지 못한다. 공격이 끝나면 즉시 빠져나가서…….’
나가서…….
…어?
슝슝슝!
“잠…! 성법도 통과한다고?!”
배리어를 뚫고 들어온 화살비에, 릴라이는 드물게 비명을 질렀다.
“릴라이 님!”
릴라이가 화들짝 놀라 몸으로 화살비들을 피해냈다.
그러자 성법을 연달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낙뢰가 떨어졌다.
이에 릴라이는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검 뽑을 뻔… 아니, 안 뽑으면 위험하다!
릴라이가 검을 뽑아, 떨어지는 성법을 모조리 검에 흡수시켰다.
콰지직!!
그 힘이 상당해서 릴라이조차도 바닥으로 내리찍히는 느낌이 들었다.
쿵!
하지만 이깟 걸로 당할 자신도 아니었다.
쾅!
힘을 모조리 흡수시켜 땅으로 흘려보낸 릴라이가 좀 힘겨웠다는 듯 웃었다.
“대단하십니다, 형님.”
아이작이 추구하는 각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강하긴 강하다.
하지만 그래봐야 조금 발전한 수준!
“제가 좀 힘들 정도면 분명 마지막 필살기셨을 텐데, 어쩌죠? 이런 걸로는 절 이기실 수 없습니다.”
“허. 너, 뭐 착각하는 거 아니냐?”
“…예? 착각이요?”
“이딴 게 필살기일 리 없잖아.”
“…그게 무… 헉?!”
릴라이는 벤야민의 머리에서 번쩍이는 번개구름에 입을 떡 벌렸다.
벤야민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릴라이, 똑바로 해라. 9계위란 이름이 울겠다!”
그 말과 함께, 눈부신 낙뢰가 쏟아졌다.
엄청난 폭발이 일며 릴라이와 기사들이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폭발이 잦아들었을 때쯤, 그들은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릴라이 님!”
싸운 이들뿐이 아니었다.
결과가 빤하다며 지켜보던 슈리나 기사들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그러니까 5계위가, 8계위 기사 두 명을 이기고… 0계위였던 사람이 9계위를 이겼다고?!”
“어머.”
슈리는 괴물 보듯이 아이작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 도대체 둘한테 뭔 짓을 한 거냐……!’
그 시선에 아이작은 씨익 웃었다.
“자, 숙부님. 이제 제 말대로 하실 거죠? 제가 각성시키면 이렇다니까요?”
릴라이는 멍하게 아이작을 보았지만, 곧 웃었다.
“알았다. 이 숙부도 네게 배우마.”
“!”
“다른 기사단들도 네 말에 따르게 하지. 그간의 수련법은 잊으라고 하마.”
아이작은 이거라는 듯이 푸흐흐 웃었다.
아무리 가주라도 기사단의 훈련 방법 자체는 각 팀을 운영하는 사령관의 정책을 존중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기사단 외에는 손댈 수가 없었는데.
‘내 기사단만으로는 수가 좀 부족하거든. 이걸로 청 전체를 철저하게 개조해주마.’
[개조해서 어쩌시려고요? 진짜 천사랑 신들을 조지시게요?]
‘그것도 있지만, 교황의 스티그마를 얻었잖냐. 그거면 신계와 이어진 문을 열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금은 교황을 손절할 거야.’
[진짜요?]
‘그놈들이 할 생각은 빤해. 그럼 곧 교황 선출, <콘클라베>를 열겠지.’
자신이 이 ‘콘클라베’를 열게 하려고 지금껏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는가?
‘내가 이것만을 보며 달리고 기다렸다.’
신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필수 조건.
‘교황!’
당연하겠지만, 금가는 거기서 키나를 올릴 것이다.
‘뭐, 다른 성자 후보들도 오겠지. 일단 1품 사제 시험부터 통과하려 할 거고, 서로 죽이려고 난리를 치겠지만.’
[아, 그러면 주인님은 방어 목적으로 기사들을……!]
‘뭔 소리야! 선수필승! 암살! 라이벌은 죄다 슥삭 해버려!’
[예?! 키나 베리트도요? 걘 주인님을 좋아하잖아요?]
‘뭐래?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 전쟁에서 개소리하면 뒤지는 거지.’
[아이고. 애 울겠네, 울겠어…….]
뭐, 실은 콘클라베에 제일 방해가 될 노엘이랑 금의 추기경 처리를 위해서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였다.
짝짝짝짝.
“대단하다, 대단해. 역시 소가주다워.”
“!”
낯익은 목소리와 박수 소리에 모두가 흠칫 놀랐다.
“그걸로 청을 각성시키고 있었구나?”
그곳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노엘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더 대단하군. 그럼 그걸로 우리 쪽도 각성시켜라. 같은 에슈아 아니냐.”
벤야민과 릴라이는 기가 찬 듯 노엘을 노려보았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저게…….”
릴라이가 나서려는 걸, 아이작이 막았다.
“너희를 각성시켜달라고? 내가 왜?”
“왜? 아이작.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될 텐데?”
“뭐?”
“에슈아는 여아를 낳은 쪽을 우대해주지. 아버지가 괜히 날 못 내쫓는 게 아니란다. 그런데 너희가 이러면 안 돼지. 하물며 최종적으로 가주가 되려면 성녀의 추천도 필요할 텐데. 니들이 카야의 아버지한테 이러면 되나?”
그 말에 형제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이작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 카야 아버지라고?”
이 새끼가 뒤질려고?
그 웃음에 노엘은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