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봉인이 풀리면 (1)
뜻밖의 말에 청의 가주는 당혹스러웠다.
실베스테르라니. 난데없이?
그도 그럴 게, 그는 몇백 년 전의 교황으로, 역대 교황 중에서 손에 꼽히는 성군이 아닌가.
물론 청에겐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왜냐고?
그는 에슈아의 한 성녀를 처형하고, 이름을 지우고, 청을 없애려고 했던 자였다. 성녀의 타락을 빌미로 에슈아 전원을 이단심문으로 끌고 가 멸문시키려 했다고 한다.
물론 해골왕이 델로스를 멸망시킨 뒤 수면 위로 나오려고 하자, 어째서인지 무마되어 버렸다지만.
뭐, 어떤 의미로는 해골왕이 에슈아의 멸문을 막아준 거지.
그런데 왜 새삼 몇백 년 전의 인물을? 그런 일라이의 눈빛에, 사피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냄새가 난다고 했잖아.”
“!”
“우리 신성드래곤들은 신과 계약한 모든 교황의 기운을 알고 있단 말이야. 근데 이미 죽었어야 할 놈의 냄새가 제국 내에서 느껴진다고. 그것도 현 교황한테서.”
순간 일라이는 제 귀를 의심했다.
뭐가 어째? 누구?
현 교황이라면, 그 가짜 교황?
“설마 브루티오를 말하는 거냐?”
“그래.”
사피엔이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나 했더니……!
동시에 사피엔은 눈을 번득였다.
“지금의 가짜 교황은 교황의 자격이 없기에, 실베스테르의 스티그마를 쓰고 있었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
여기까지 말했으면 일라이가 눈치를 못 챌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 어쩌면 동생 놈에게 사주해서 진짜 교황… 그러니까 네 친구인 율리오를 죽이게 한 것도 그 망령 실베스테르일지도 모른단 거지.”
“……!!”
일라이의 얼굴이 굳었다.
생각해보면 일리는 있다.
율리오가 죽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쌍둥이라도 상식적으로 동생이 형을 죽이고, 형 행세를 하는 게 쉬운 일일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즉,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물론 어디에 숨어있을지는 몰라. 단지 확실한 건, 흙으로 돌아가야 할 망령이 아직도 살아서, 신성제국에 간섭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자기 대신 움직여줄 일꾼을 부려서.”
바로 그때였다.
쾅!
갑자기 숨이 막힐 것 같은 살의가 느껴졌다. 청의 수장이나, 드래곤의 수장조차도 일순 공포를 느낄 수준의 살의였다.
당황한 그들이 시선을 같은 곳으로 돌렸다. 문 쪽이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자의 얼굴에, 일라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
흉흉한 얼굴로 자신들을 보고 있는 건, 청의 막내였다. 단지 인간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뿐인데, 그들은 마치 괴물에게 삼켜지는 듯한 환각을 보았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아이작이 말했다.
“뭐? 누구?”
두 수장들을 찍어누를 듯한, 압도적이면서도 묵직한 살기. 찌르르한 공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그 위세에 일라이도, 사피엔도 순간 숨을 멎었다.
무섭다. 저게 어찌 고작 16살짜리가 보일 수 있는 살의와 분노, 위압감일까 싶었다.
그것도 실베스테르라는 이름에? 인계를 주름잡는 5대 신앙의 수장을, 4대 드래곤 중 하나를, 기백만으로 누른다고? 일라이는 순간 놀라우면서도 저 아이가 누구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역겨운 기분이 들면서도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실베스테르라니.
어찌 그놈을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친구를, 형제를 앗아간 존재인데.
아이작의 흉흉한 살의에 일라이가 그를 불렀다.
“…아이작?”
그 부름에 아이작은 언제 화냈냐는 듯, 팔짱을 낀 채 방긋 웃었다.
“사피에엔. 느 여기서 므흐냐??”
사피엔은 입을 삐죽거렸다.
“시할아버님과 우리 결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일라이는 기가 찬 듯 사피엔을 보았다.
“시할아버님 아니다.”
“시할아버님이 날짜를 잡아 주신다고 했다.”
“내가 언제.”
“시할아버님이 우리 손주들의 이름을 지어준다 하셨다.”
“도대체 몇 단계를 건너뛰는 거냐.”
그러자 사피엔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결혼 허락만 해 주시면 손주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 광경에 아이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여간.’
사피엔이 일라이를 만나러 갔다고 해서, 기겁하여 달려온 그였다. 황태자 정원에 설치한 개구멍… 아니, 게이트를 통하면, 에슈아 저택까지는 한 방이었으니까.
자신이 결혼을 거부할 것 같으니, 가문의 어른들을 꼬시려고 온 건 훌륭한 전략이었다만, 글쎄?
‘네가 뭔 말을 해 봤자, 울 할부지는 드래곤들을 싫어해.’
멜리사 건으로 인해 그쪽과는 겸상도 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레아도 그걸 알기에 결혼하기 싫어하는 아이작에게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어차피 할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리란 것이다.
그랬기에 아이작은 푸흐흐흐 초승달 웃음을 지었다. 뭐, 혹시 몰라 호다닥 와보긴 했다만.
역시 청의 가주.
이건 뭐,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결혼을 반대하고 있군.
‘그래그래, 역시 믿을 건 우리 할부지뿐…….’
“손주님만 주시면, 신성드래곤 수장의 이름을 걸고, 신랑을 시할아버님을 공경하는 모범적인 후계자로 만들겠습니다.”
푸흡, 소용없어, 자식아. 울 할부지가 그딴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갈 사람으로 보…….
“…진짜로?”
“?!!”
일라이가 흔들리자, 아이작의 목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할부지이이! 그딴 거에 넘어가지 마앍!!!”
“조건 좀 말해봐라.”
할배에에에!!!
아이작의 인성을 고쳐준다는 말이 몹시 인상적이었던 걸까. 일라이의 눈빛이 바뀌자, 아이작은 다급하게 사피엔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 사고 치지 말고, 내 방으로 좀 가자.”
끌려가주는 사피엔은 드물게 얼굴을 붉혔다.
“방…? 앗, 그런 거야? 좀 갑작스럽지만… 좋, 좋아. 마음의 준비를 할게…….”
아, 좀!!!!
“아니면… 리드당하는 게 좋아?”
“아니이읽!”
아아악! 미치고 환장하겠네!
밖으로 나온 아이작은 응접실 밖에서 한숨 섞인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슈리를 발견했다. 저택에 오자마자 다짜고짜 ‘사피에엔 어딨어!!!’ 하고 멱살을 잡았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됐으니까, 낌슈리. 얘, 앞으로는 저택에 출입 못 하게 해라.”
“…드래곤을 어찌 막냐마는. 그보다, 이제 너한테 다가가도 되냐?”
“엉?”
슈리는 아이작의 눈치를 살폈다.
저택으로 돌아온 아이작을 사피엔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준 건 좋은데, 하필 응접실 안에서 교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실베스테르’.
그 이름이 나온 순간, 아이작의 얼굴이 완전히 변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아이작의 모습… 아니, 솔직히 그런 위압감과 살의는 살면서 처음 느껴봤다.
전에 델로스에서 봤던 진마?
아니, 그딴 놈들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
형체 모를 괴물이 눈앞에 있는 줄 알았다. 아마 대륙의 검성이 있었어도, 그 순간의 아이작 앞에서는 새끼 고양이가 된 느낌이었으리라.
솔직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죽는 줄 알았다. 슈리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가가도 되는 거지?”
“헛소리 말고.”
그때, 위스퍼가 의문을 품었다.
[아까 드래곤이 말한 망령 이야기는 진짜일까요?]
‘신성드래곤이 말한 것이니, 거짓은 아닐 거다.’
아이작은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그 개 같은 실베스테르.
모든 일의 원흉이 살아있다니.
‘만약 사실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아서 금에 간접적으로 입김을 넣고 있던 거야. 허수아비 교황을 세워 제국의 일에 관여하고 있던 거지.’
행여나 본인이 신성제국에 숨어있단 걸 들킬까 봐, 신성드래곤은 내쫓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금가가 왜 그리 청의 말살에 집착했는지도 이제 알겠어.’
[예?]
실베스테르는 원래도 청을 말살하려던 교황이었다.
‘하물며 수백 년 전의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면, 상식적으로 정상적인 모습은 아닐 테고…….’
곧 아이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금기에 손을 댔을 수도 있겠군.’
어쩌면, ‘언데드’로 말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과거 죽은 자였던 누더기 해골은 인간이 되었고, 과거 영광을 누리던 자는 누더기 언데드가 된 셈이니까.
‘그리고 언데드는 청의 힘 앞에서는 쥐약이지.’
[그럼……!]
청이 괜히 퇴마의 신앙인가?
마족, 특히 언데드 퇴치는 청의 주특기.
어쩌면 그랬기에, 더 청이 궁지로 몰리게끔 조종한 것일 수도 있다. 정말 언데드가 된 거라면 본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건 청일 테니까. 뭐, 정말 그놈이 있는지는 조사해 봐야겠지만.
어쨌든 놈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자신이 하필 그 청에서 태어났다는 거다.
‘푸흐흐. 오히려 잘됐지.’
아이작의 눈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원한은 있었지만, 이미 죽은 놈인지라 후손을 괴롭히기도 양심에 찔리던 참이었는데.
‘언데드의 주인으로서, 아주 지옥을 보여주마.‘
어쨌거나 각성을 할 이유가 하나 더 는 셈이다.
아이작이 슈리에게 말했다.
“낌슈리. 급한 건 아닌데, 교황청을 돌아다니면서 흙냄새가 나는 사람을 찾아봐.”
“흙?”
그리고 아이작은 사피엔을 보았다.
다름 아닌, 어둠의 각성신 때문이었다.
‘어둠의 각성신이라도 신은 신이다. 대비를 하긴 해야 해.’
그랬기에 아이작이 사피엔에게 말했다.
“너한테 가르칠 게 좀 많다. 슈리가 도구를 가져올 테니까, 당장 시작하자.”
사피엔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도구? 그랬던 거야…? 청의 소가주는 그런 쪽 취향이야? 그래, 잘 알아두겠다.”
“…….”
으아아악!! 미치겠네!
* * *
그 무렵, 노엘은 에슈아로부터 이어진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은 에슈아에서 꼭꼭 봉인해둔 비전이 숨겨져 있는 곳. 마와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발견한, 마에 익숙한 에슈아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 어둠이 묻힌 곳이다.
‘에슈아가 왜 인내의 신앙인가.’
마의 유혹에서 견뎌내기 위해, 혹독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청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갈고닦아 높은 수준의 신앙심을 갖게 된 이들조차, 이 어둠 앞에서는 한순간에 유혹되고, 파멸했다. 괜히 에슈아가 포기한 비전이 아닌 것이다.
그 때문에 에슈아 사람의 접근을 금지하고 있어, 들어가는 것이 까다로웠다.
아니, 애초에 굳이 접근을 안 했다. 아이작조차도 까다롭게 느낄 정도로.
그러나, 노엘에게는 다르다.
“아이작, 감히 네가 날 능욕해?”
노엘은 아주 예뻐 보인다는 듯이, 어둠의 각성신을 찾아왔다.
“어디 산 제물이 되어 죽어봐라.”
다음 순간.
노엘은 어둠의 각성신의 봉인을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