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봉인이 풀리면 (3)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하지만 일개 마족들이 내뱉는 간교한 마력과는 전혀 달랐다. 어둡지만, 틀림없는 신의 힘이었다.
마치 심해 같았다. 속은 굉장히 어둡지만, 이를 두고 타락한 악마의 세계라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꼭 그런 느낌이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저것의 본질은 어둠.
너무나 어두워 정신이 파멸하고, 내면의 어둠이 흘러나와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일 것 같았다.
그 존재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깊은 심연으로 끌려갈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작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자, 와라. 새끼야! 내가 제물이다!”
그 모습에 슈리가 기겁했다.
“야! 너 미쳤어?!”
슈리는 아이작을 노리는 어둠의 존재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처음엔 뭔가 했지만, 생긴 특징이라든가 행동까지, 분명했다.
“저건 어둠의 각성신이잖아!”
그 역시 에슈아의 성법 단계에 대해선 잘 알았다. 청의 힘은 두 단계로 나뉘는데, 바로 ‘인내의 단계’와 ‘초월의 단계’다.
현재 에슈아가 쓰고 있는 건 인내의 단계. 그 단계에 있는 1계위부터 9계위까지의 성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는 빛의 신의 힘을 받아서 쓰는 어둑한 빛의 단계, 달빛에 가까웠다.
거기서 더 밝은 빛을 내기 위해선 초월의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바로 어둠의 각성신을 통해 어둠을 삼키고,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완전체의 단계다.
즉, 현재까지 청은 어떤 의미에선 힘을 절반만 쓰고 있는 셈이었다. 현재 <인내의 단계>의 9계위 성법으로도 강하긴 하지만.
만약 초월의 단계에 도달하면?
압도적인 힘이 생기겠지.
해골왕을 무찌를 힘을 얻겠지.
<인내의 단계>는 이 어둠을 삼키기 위한 사전 단계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숱한 에슈아들이 어둠의 각성신을 삼켜 초월의 단계로 넘어가려 했지만, 죄다 실패.
‘할아버지도 사용해 보시다가, 결국 도로 봉인한 힘인데.’
결국 에슈아에서도 금기로 지정했단 걸 모르는 건가?
‘할아버지가 영원히 건들지 말라고 했을 정도면, 말 다했지.’
“저놈이 어떤 놈인데, 너 진짜 죽으려고 환장했어?! 그거에 손댄 사람들은 죄다 미쳤어!”
슈리는 아이작을 말리려고 했지만, 어둠의 각성신이 힘을 내뿜었다.
“크윽!”
어둠의 각성신은 아이작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무래도 아이작을 잡아먹기 전, 그를 탐색하는 듯했다.
-백금발, 신들의 사랑을 받는 아이구나.
어둠의 각성신은 아이작이 몹시 마음에 든 듯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이작은 성녀의 자식이었다. 육신만큼은 깨끗할 수밖에 없다.
-너는 더럽히는 맛이 있겠어.
그때, 릴라이와 기사들이 기도실에 들이닥쳤다.
“아이작!”
“소가주님…. 크윽!”
하지만 어둠의 각성신이 뿜어내는 강력한 힘은, 릴라이와 8계위 기사들을 밀어낼 정도였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아이작만 노리는 광경에, 릴라이는 이를 갈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챈 것이다.
‘노엘 형님…! 기어이 이렇게 나오는 것인가!’
이건 노엘이 ‘성녀 각성’ 성법을 발동했다는 증거였다. 산 제물을 노리고 온 것이겠지.
“아이작, 금방 구해주마!”
“아뇨, 괜찮아요!”
“!”
아이작은 주변을 뱅글뱅글 맴도는 검은 기운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래, 이걸 노렸다.’
뱀장어 각성신을 봤을 때도 꽤 능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어둠의 각성신?
‘생각 이상으로 더 강력한 신이다.’
금가가 소환해줬던 뱀장어와는 격이 달랐다. 이만한 놈이 에슈아에 잠들어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신들도 저놈으로 각성하려 했었다는 게, 뭔지 알겠네.’
동시에 아이작은 형법의 신의 그 말에서 또 다른 사실을 눈치챘다.
‘최고신은 빛과 어둠의 힘을 모두 가졌다.’
즉, 양과 음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향하는 길이라는 거겠지. 어두울수록 빛은 밝게 보이는 법이니까.
‘가증스러운 놈들.’
어쩌면 그놈들이 해골왕을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 탓일지 모른다.
어둠에 익숙한 자신이 행여라도 빛에 손을 대 최고가 될까 봐. 마왕이 빛에 손을 댈 수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마저 없애려고.
그리고 아이작은 이놈을 보고 확신했다.
‘이놈이면 내 마력을 지키면서, 확실하게 업그레이드 가능할 듯.’
아니, 어쩌면 마력까지 성장시킬 수 있을지도?
푸흐흐흐, 아이작의 입가가 기쁨으로 씰룩거릴 수밖에 없다.
‘아마 지금쯤 교황청에서는 다음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열리고 있겠지.’
빠르게 죄를 인정하고, 다음 교황을 뽑아 기회를 도모할 것이다.
그리고 금가 새끼들이 바보도 아니고.
‘원래대로라면 나는 교황 선출 후보에서 제외되겠지만, 다 수를 써놨지.’
이제 필요한 건, 9계위의 자격뿐.
‘아무리 그래도 2품 사제 수준으론, 교황이 될 명분이 안 서잖아?’
뭐, 원래라면 기도하며 9계위까지 차근차근 올라야 하지만.
돌았나?
얌전히 틀어박혀 신앙생활을 하게?
‘각성의 신을 두고서, 내가 왜?’
초월의 단계에 가면 9계위보다 위인 거 아냐? 인내의 단계 자체가 이 어둠의 각성신에게 먹히지 않기 위한 단계라며?
그럼, 그냥 어둠의 각성신을 먹으면, 수련은 건너뛰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어둠의 각성신의 존재를 알게 된 아이작은 일부러 노엘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숙부들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 당부했다.
왜냐고?
자신이 어둠의 각성신을 풀어낼 수도 있지만, 그러면 괜히 폭주해서 애꿎은 에슈아 사람들까지 죄다 죽일 것이 아닌가.
하지만 노엘을 냅두면?
궁지에 몰린 노엘은 산 제물 형태로 카야를 각성시켜, 조카를 죽이려 할 것이었다. 그 방법만이 유일하게 본인이 살길이니까!
‘어쨌거나, 타겟이 나로 좁혀지면, 다른 놈들은 안 건들겠지.’
쓸데없이 힘 빼게 할 것 같냐!
전부 내 힘이야!
그랬기에 아이작은 릴라이를 향해 푸핳, 웃었다.
“기껏 나만 노리 게 하는 데 성공했는데, 괜히 건들지 마. 새끼야!”
“뭐, 뭐라고?!”
“어차피 에슈아가 5대로 우뚝서려면, 청의 힘을 백 프로 써야 하잖아…요?! 이놈은 어차피 먹었어야 해요!”
“!”
그 말에 릴라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설마, 이걸 노렸던 거냐!”
어쩐지 어둠의 각성신에 대해서 끈질기게 묻더니!
동시에 기사들은 뭔가 깨달은 듯 경악했다.
“설마, 아이작 도련님. 주변에 해를 안 끼치기 위해 본인만을 노리게 하신 건……!”
“뭐라고?!”
당황한 릴라이가 안 된다는 듯 외쳤다.
“아이작! 할아버지가 아시면 이번엔 엉덩이로 안 끝난다!”
숙부들이 화를 냈지만 아이작은 씨익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와라!”
“아이작!”
곧 어둠이 아이작을 집어삼켰다.
아이작은 깊은 잠에 빠졌다.
* * *
교황청.
성기사들이 엄숙하게 통로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수많은 사제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무려 교황 파직과 새로운 교황 선출과 관련된 일이었다.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던 1품 사제들이 임무를 종료하고 돌아온 것이다.
덕분에 기사들은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와, <침묵>의 신장도 왔어.”
“<존멸>도 오셨네요.”
“거의 10년 만에 보는 거 아닌가?”
“헉…. 저 인간은 대륙 반대편에 있던 놈 아냐? 절대 올 리가 없는데?”
“뭐, 사안이 사안이니까…….”
도착한 이들은 하나같이 보통 이들이 아니었다.
<신장>.
그들은 제국 밖에서 움직이는 최고 사제 무리들. 1품 중에서도 절대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선봉들까지 얼굴을 비췄다.
그리고 회의장 내부.
청의 가주가 교황의 증표, 스티그마를 내려놓으면서 최종 판결을 내렸다.
“가짜 교황이라는 결정적 증거 확보. 이로써 교황의 자리를 신께 되돌리고, 신성제국을 이루는 5대 신앙 열두 신장들의 합의에 따라 콘클라베를 진행함을 알린다.”
짧은 말과 함께, 한순간에 현 교황의 파직이 결정되었다.
“문제는 차기 교황인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동시에 금의 사제들이 말했다.
“고민할 것이 있습니까? 당연히 현 베리트의 장자인 키나 베리트 공자가 되는 것이 맞죠.”
“맞습니다. 이건 5대 신앙의 약속입니다. 언제나 금가가 교황을 맡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곳곳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문제를 일으킨 게 금가인데, 장난합니까?”
다른 신앙의 거센 반발에 금의 사제들은 이를 갈았다. 어쩌다가 현 교황이 파직되는 수모를 당해 콘클라베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일단 아이작 에슈아가 교황이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지.’
‘어차피 2품 사제니, 자격도 안 되겠지만.’
‘2 품사제도 조건이 안 되는데, 겨우 된 게 아닌가.’
‘치유 성법도 제대로 못 다루는 놈이 갑자기 9계위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다음 교황은 1품 사제 중에서……!”
그런데 그때.
적의 추기경이 워워, 진정시키며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으로부터 강력한 계시가 떨어졌다. 차기 교황은 성자라고.”
“성자요?!”
“진정한 빛이 제국을 우롱하는 어둠을 걷어낼 것이라고. 아마 이번 일을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특별히 후보를 정해주셨다.”
그 말에 금의 사제들이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곧 적의 추기경이 말했다.
“엄격하고 평등하게 세상의 룰을 관리하시는 규칙의 신께서, 친히 뜻을 내려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불만이면서도 납득했다.
‘규칙의 신이라면 굉장히 정의롭고 까다롭지.’
‘그분이라면 믿을 만해. 그거라면 공정하겠지.’
‘일단 아이작은 나가리겠군.’
금의 사제들은 안심했지만, 곧 누군가가 말했다.
"성자 후보면 아이작 에슈아도 있지 않았습니까?”
“장난합니까?! 9계위도 아닌 자를 어찌!”
금의 사제들의 번들거리는 눈빛에 청의 가주는 미간을 좁혔다. 척 보니 이것들, 어떻게든 아이작을 배제하려고 작정했다.
하지만 이걸 예상 못 한 일라이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아이작은, 절대 콘클라베의 후보조차 될 수 없다. 일라이가 보기에도 아이작은 한참 멀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을 수도로 보내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걱정 마세요, 할부지. 한 방에 자격 맞춰놓을 테니까.
이 자식이, 대체 어떻게 맞춰놓겠단 거지?
* * *
그 자격을 맞추기 위해 어둠의 각성신을 발동한 아이작은 눈을 떴다.
춥고 어두웠다.
‘어둠의 각성신한테 잡아먹힌 건가.’
주변에 보이는 건 꿀렁거리는 어둠뿐.
보통은 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어 가는 게 정상이다. 그리고 이성과 희망을 잡아먹힌 채 미쳐 날뛰게 되겠지.
아니나 다를까, 어둠이 아이작의 몸을 노리듯 슬금슬금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 만의 포식이냐.
어둠의 각성신은 아이작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그러다 아이작의 몸에 있는 마력의 기운을 느꼈는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꼬마가. 나름대로 나를 이겨보겠다고 어둠을 접한 모양이구나. 뭐, 이런 떡잎들이 가끔 있었지.
아이작은 가증스러웠다.
뭐? 어둠을 접해?
‘어둠의 각성신이라고 한들, 생물이 가진 어둠을 자극하고 끌어내는 놈에 불과한 주제에.’
-신들도 내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쓸 만한 떡잎이라도 나한테는 안 돼.
아이작은 푸핫 웃었다. 이 새끼는 왜 자기가 순순히 삼켜진 건지, 전혀 모르는구나?
“어디서 어둠으로 소꿉장난이나 하는 놈이, 어둠 그 자체한테 덤벼?”
-뭐?
아이작의 눈이 마안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