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콘클라베 (1)
노엘이 각성신에게 잡아먹혔다.
어둠의 기운에 집어삼켜진 노엘은, 그 안에서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우득! 우드득! 까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노엘의 기운이 사라졌다. 그를 수호하던 신의 기운과 함께, 완전히.
툭.
동시에 노엘의 장신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집어 든 아이작은 미소를 지었다.
“끝났군.”
각성신도 어지간히 빡쳐 있던 걸까.
자신 때는 그래도 잡아먹기 전에 타락시키려고 별 지랄을 하더니. 노엘 때는 그딴 것도 없이 그냥 해치워버렸다.
아니, 산 제물로 취급해주는 것도 사치스럽다는 듯, 폐차 처리하는 것 마냥 가차 없이 뭉개버리다니.
뭐, 놈이 해온 짓에 비하면 허무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아이작에겐 오히려 좋았다.
결국 지 업보로 죽은 거잖아? 남의 눈에서 눈물을 뽑은 놈의 초라한 결말. 몹시 마음에 들어.
[캬, 역시 주인님. 빌어먹을 성직자 놈을 처리하셨네요.]
“뭐, 내 힘과 이 녀석 덕분이지.”
그 말에 타란블룸이 아이작에게 얼굴을 비벼왔다. 고래의 얼굴을 쓰다듬는 아이작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뭐, 노엘 놈은 이 녀석을 보고서 할아버지가 왔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뭐? 할아버지이?’
뭐래, 아무리 할부지라도 벌써 여기에 왔을 리가 없잖아??
지금쯤 한참 ‘콘클라베’에 대한 회의가 진행 중이겠지. 차기 교황을 뽑는 일이 그렇게 금방 끝날 리가 있나?
그런 의미에서 할아버지가 이번 일에 대해 안다는 말은 구라다.
“뭐, 억울하게 갔네. 푸흡.”
즉, 아이작은 할아버지가 온 척 일부러 타란블룸을 훔쳐온 것이다.
‘노엘 놈의 의지를 꺾는 데엔, 할아버지가 짱이니까.’
타란블룸은 유일하게 청의 가주만 부릴 수 있었다. 필시 일라이가 왔다고 생각해서 마지막 수도 못 써 보고 멘붕이 온 것이겠지.
“일부러 마지막까지 장치를 준비한 거지만, 속아줘서 고맙다?”
아이작은 노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주듯 얄밉게 웃었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진 마. 아무리 나라도 9계위와 승부를 보려면 골치 아프다고.”
물론 자신의 본 힘을 쓰면 추기경도 아닌 성직자 따위 골로 보낼 수 있긴 하지만, 노엘 그 새끼도 일단은 청의 나부랭이가 아닌가.
“항마의 성법이랑은 상극이라 귀찮다고.”
괜히 성녀들이랑 앙숙이었던 게 아니다.
[에이, 아무리 지금 몸 상태라 하셔도 주인님을 상대하기엔 풋내기죠. 청의 가주나 성녀들 정도면 모를까.]
“그렇긴 하다만, 에슈아 영지에서 쓰기엔 그렇잖아. 여기서 힘을 쓰면 내 땅이 다 파괴된다고.”
[하긴, 주인님의 힘은 어마어마하죠.]
괜히 존재 자체가 죽음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뭐, 마족을 부르려던 건 의외였지만.”
[예? 마족이요?]
“엉.”
아이작은 노엘이 마지막에 부리려던 수를 간파하곤 가증스럽단 듯이 웃었다.
“이 새끼, 내 부모를 처리한 마족들을 부르려고 했어. 그걸로 날 처리하려 했겠지.”
이렇게 확신한 계기는, 노엘이 꺼내 들려던 장신구 덕이었다.
각성신이 제일 먼저 뱉은 이 장신구에는 마족과의 계약서가 새겨져 있었다. 뭐, 노엘 놈이 교황청에 보낸 서신 내용을 중간에 훔쳐봤으니, 굳이 추리 안 해도 빤하긴 했지만.
‘뭐, 이 상태론 어떤 놈이랑 계약한 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도대체 어떤 미친 새끼들이 신성제국 추기경이랑 계약을 한 거야?”
그래도 에슈아의 장남과 성녀를 처리할 정도면, 일개 마족은 아니란 건데.
‘그러고 보면 마족 놈들, 갓난아이 때도 날 처리하러 왔었지.’
그건 계약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이겠지?
그럼 지금도 날 처리하려 오려나?
‘뭐, 상관없지.’
그래봐야 마족이라면 전부 해골왕의 따까리 놈들이 아닌가. 그랬기에 아이작는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듯, 꿀렁거리는 각성신을 노려보았다.
저 새끼가, 그냥 사람만 처리하라니까 가진 재물까지 다 씹어 삼킬 기세네.
“야, 뒤질래? 다 처먹지 말고 돈 될 만한 거 내놔.”
[아씨,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데.]
“뭐라는 거야. 니가 개새끼냐? 신 새끼지.”
그러자 그건 그렇다며, 어둠의 각성신이 노엘의 물건을 툭툭 뱉었다.
데굴데굴, 탁탁!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에, 아이작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노엘이 품고 있던 고가의 장신구들도 장신구들이지만, 무엇보다 곱게 말려있는 땅문서들과…….
‘가주의 인장!!’
틀림없었다.
도장처럼 생긴 저 물건은 밀랍 인장이었다. 보통은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밀랍 봉인을 찍을 때 쓰는 물건이다.
에슈아 직계들은 기본적으로 약식 인장을 가지고 있지만, 저걸 그딴 거랑 비교하면 안 되지.
‘저건 평범한 인장이 아니다.’
에슈아의 문장 <윈터 나이츠 소드>가 온전하게 새겨진 건, 오로지 저 가주의 인장뿐!
청의 최고 의사이자 최고 결정권을 가진 자의 표식인 만큼, 가주를 상징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휴대하기 좋은 인장 반지가 있어서 그걸 쓰고 있고.’
저 가주의 상징물은 할아버지가 따로 보관해두던 것이었다.
원래는 장남인 아담 에슈아에게 준 것이었지만, 그가 죽고 계속 가주실에 있던 물건. 소가주인 아이작에게조차 절대 빌려주지 않던 물건.
그런 만큼 아이작으로서는 웃을 수밖에 없다.
“푸하하하핳하! 노엘 이 새끼가 죽어서도 좋은 걸 떨구고 가네. 할부지가 기뻐하겠어!”
[오, 청의 가주한테 돌려주게요?]
“미쳤냐??? 이건 내 꺼야!”
사탕을 빼앗길 새라, 아이작이 푸흐흐흐흐, 웃어댔다. 경기를 일으키고 눈이 돌아갈 정도의 웃음.
“이게 웬 떡이야. 가주의 인장이면 시바, 할부지 허락 없어도 에슈아 일을 총괄 할 수 있단 거잖아! 할부지 이 시바 놈이 나한테 일만 시키고, 권한은 안 줘서 빡치던 참이었는데!”
위스퍼는 불길해졌다.
[…도대체 가주 몰래 뭘 하시려고?]
“일단 할부지가 금지시킨 것들? 그리고 얻은 땅문서는 떡값으로 좀 써야지.”
[떠, 떡값이요?]
아이작은 흐흐흐 순진하게 굴지 말란 듯 사악하게 웃었다.
“콘클라베 말야! 교황이 그냥 될 수 있는 줄 알아?! 결국엔 지지층이 없으면 후보에 오르지도 못한다고! 뇌물이라도 처먹여야 말을 들어 처먹든 말든 할 거 아냐! 크흐흐흐. 그런 의미에서 노엘 놈, 죽어서도 유용하네.”
[그런데 왜 청의 가주가 기뻐한다고…….]
“어차피 나한테 주려고 했을 텐데, 당연히 기뻐하겠지!”
…진짜로? 주려 했을까?
그렇게 아이작이 낄낄거리며 인장과 땅문서를 챙길 때였다.
“아이작! 무사하냐!”
“?!”
목소리에 기겁한 아이작이 재빨리 인장과 문서를 숨겼다. 다가온 건, 아이작을 찾으러 온 숙부들과 슈리였다.
슈리는 당황스러워하는 아이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방금 뭐 먹었냐?”
“으, 으므것드 안 무겄는데?”
숙부들은 급히 주변을 살폈다.
“아이작, 노엘 형님은?!”
그러자 아이작이 반사적으로 입에 넣었던 인장을 스윽 꺼내 숨기면서 말했다.
“글쎄요, 그놈이라면 업보를 치르지 않았을까요?”
업보.
그 단어의 의미를 눈치챈 숙부들과 슈리가 깊게 탄식했다. 특히 릴라이는 가슴이 찢어진다는 듯, 아이작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는 부모의 복수를 위해서, 제 손에 피를 묻혀 혈육을 쳐내는 짓을 했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모를 없앤 노엘에게 그만큼 증오심을 품고 있었구나.
저 어린것이 품었을 분노가 안쓰러워서, 릴라이는 가슴이 저미는 듯했다.
“아이작, 이 숙부가 그저 미안하구나.”
깐깐한 벤야민도 드물게 토닥였다.
“부모의 복수라니, 휴가라도 다녀와라. 특별히 휴가 비용은 두둑하게 내어주마.”
“내가 널 좀 잘못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심지어 슈리마저도 안쓰럽게 안아주자, 아이작은 기가 찼다.
부모의 복수?
‘새끼들이 뭐래?’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솔직히 부모를 처리해줘서 해골왕한테는 좋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 몸의 부모 정도면 영혼을 눈치챌 수도 있으니.’
카야가 그 모양이었으니, 이쯤 되면 유전일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뭐,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뒤처리부터 해야겠지.’
아이작이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 * *
한편, 에슈아 저택은 난리가 났다.
“예? 노엘 님이 사라지셔요?!”
“노엘이 행방불명되었단 말이냐?”
소집된 원로들과 장로들, 청의 기사들, 노엘의 사람들은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이작은 자신도 마음이 아프다는 듯 슬퍼했다.
“지금도 찾고는 있으나, 기대는 안 하는 편이 좋겠죠.”
“……!!”
아이작은 일부러 노엘을 실종 처리했다.
하지만 실종은 개뿔. 행방불명으로 처리했지만, 에슈아의 모든 이들이 알았다.
‘숙청당하셨구나!’
‘저 아이작한테……!’
그들은 공포에 떨었다.
세상에, 아이작이 노엘을 처리하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동시에 에슈아 사람들은 아이작이 보이는 행동의 의미를 알아챘다.
‘이건 장례도 치러주지 말란 의미다.’
애도조차 하지 말란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엘의 사람들만 남긴 아이작이 턱을 괸 채 살벌하게 웃었다.
“니들하고는 언젠가 깊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
그 눈빛에, 노엘이 에슈아에 데려왔던 손가락들이 공포에 떨었다. 어딜 봐도 ‘자,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라고 말하는 눈빛이 아닌가.
그래서 소름이 돋았다.
원래 에슈아 편이던 사람들은 충격은 받았을지언정 차라리 잘 되었다 싶겠지만, 그들은 달랐다.
‘젠장, 이렇게 되면… 나가리가 아닌가.’
‘무슨 소리야, 아직 헨나 님이 계시잖아!’
교황의 동생이자, 청의 가주의 후처가 아직 에슈아에 있었다. 그리고 노엘도 고엘도, 사실상 헨나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래, 아무리 소가주셔도 우릴 협박하다니. 가주께서도 기강을 흔든 죄로 용납을 안 하실 것…….’
그러나 아이작이 씨익 웃었다.
“이게 뭔지 보이나?”
아이작이 내민 물건에, 노엘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헉!”
‘가, 가주의 인장?’
‘저건 장남의 죽음 이후로 절대 안 꺼내시던 물건이 아닌가.’
설마 가주께서, 아이작 도련님을 완전히 인정하신 건가?
저것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아이작을 공격하는 건 곧 가주를 공격하는 의미로 알라’는 의미다.
에슈아가의 실질적 권한이 아이작에게 넘어갔단 의미!
비록 교황의 세력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에슈아의 일원인 그들로서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이 느긋하게 의지에 기대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자, 난 마음이 넓으니 특별히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지.”
“!”
“노엘과 관련된 모든 걸, 빠르게 정리해라. 그리고 처분한 모든 걸 내 앞에 가져와.”
결국 노엘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의 모습에 아이작은 푸흐흐 웃었다.
이제 콘클라베를 진행 중인 수도에서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면 이제 뭘하면 된다?
‘교황이 되기 전에, 에슈아에 비자금을 잔뜩 만들어놔야지!’
푸헿, 푸헤헤헤!
* * *
그 무렵, 수도의 교황청.
교황 선출이 한참 진행 중인 교황청에서, 일라이는 탄식을 흘렸다. 그는 기가 차다는 듯, 청의 기사와 함께 온 고래를 보았다.
“타란블룸…. 넌 또 왜 거기서 나오느냐?”
이 새끼가 또 어디로 사라졌나 싶었더니.
하지만 뭐, 범인이 누군지 찾을 것도 없어 보였다.
‘뭐, 보나 마나 아이작이 데려갔겠지.’
일라이는 됐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청의 기사가 황급히 서신을 내밀었다.
자신이 콘클라베 때문에 수도에 있는 동안, 에슈아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라 이른 참이었다.
에슈아 장로들이 보낸 서신을 찬찬히 확인하던 일라이가 곧 미간을 좁혔다. 서신엔 어둠의 각성신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요약하자면, 어둠의 각성신으로 초월의 단계에 도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기껏 교황 선출을 하게 되었으니 청에서도 힘을 다하기 위해 어둠의 각성신을 불러냈다는 내용.
일라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노엘 놈, 역시 내가 여기 있는 사이에 일을 벌였구나.’
청의 초월의 단계는 무슨?
보나 마나 아이작을 죽이려는 거겠지.
뭐, 예상은 했다만, 콘클라베를 앞두고 뭔 집안싸움인지.
일라이는 피곤한 듯, 청의 기사를 보았다.
“알았다. 노엘은 내가 처분할 테니…….”
그러자 청의 기사가 어째서인지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주인님. 끝까지 읽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엉……?”
이 거지 같은 걸 더 읽어야 해? 안 그래도 노엘의 사람들이 보낸 서신이라 복장만 터지는데?
하지만-
뒤를 읽는 일라이의 표정이 급격히 이상해졌다.
-가주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교황 세력을 처분하고 뜻을 받들라는 의미, 분명히 전달받았습니다!
-저희도 헨나 님과의 연을 끊고, 개과천선하겠습니다!
-아이작 님을 따르겠습니다!
“……???”
아니, 이 새끼들이?
글로만 봐도 느껴지는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과 알랑방귀에, 일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엘의 세력이었던 놈들이 왜 아이작을 따르는데?
아니, 왜 따르는가는 중요하지 않지.
‘아이작이 굴복시켰구나.’
하지만 그놈들을 어떻게?
아니, 어떻게 굴복시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홀로서기에 성공했구나. 그래, 내 도움도 없이 기특…….’
-가주께서 아이작 도련님께 땅문서를 주신 것도 확인했습니다.
-아이작 님의 의지에 따라 재산 처분을 돕겠습니다!
-가주께서 아이작 님께 인장을 주신 건 그런 의미겠죠!
-가주의 뜻대로!
일라이는 굳었다.
잠깐.
…인장이라니?
그걸 왜 걔가 가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