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네가 왜 여기에 있어? (1)
아이작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맞다! 청의 여신!”
완전히 잊고 있었던 아이작은 이마를 짚었다.
원래는 짝퉁을 마법으로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청의 여신에게 대리를 맡길 생각이었지.
하지만 멜리사 보고 빡쳐서 본 힘을 쓰다 보니 청의 여신을 생각 안 했네. 아니, 아예 존재를 잊었네.
[아이고…. 불쌍한 여신. 존재감 어째요.]
아, 그러게 누가 날 빡치게 하래!
[아니… 뭐, 사실 주인님이 마법을 쓰신 시점에서 청의 여신은 필요가 없긴 했죠.]
아이작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시바…. 어쩌지? 여신을 지옥으로 보내버렸는데?!’
[와. 통구이다, 통구이. 영혼까지 소멸되겠는데요?]
‘아니! 그래도 명색이 주신인데, 살아남지 않을까?!’
[그냥 지옥도 아니고, 제일 센 지옥에 보내버려 놓으시고요?]
‘…어음.’
할 말을 잃은 아이작은 미간을 짚으며 깊이 고민했다. 그래도 제 딴엔 양심은 좀 찔리는 모양이다.
‘…구해와야겠지?’
[신들도 기피하는 그 생지옥에서요? 주인님 몸으로는 아직 지옥에서 못 버틸 것 같습니다만.]
그 말을 듣는 아이작은 땀을 더욱 삐질삐질 흘렸다. 미안하긴 한데, 그럼에도 가기 싫어서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는 얼굴.
그는 힐끗, 적가의 기사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늬들……”
“예?”
“잠깐이면 되니까 용암이 끓어넘치고, 숨을 쉬는 순간 기도와 폐가 다 타버리는 곳에 다녀오지 않으련?”
………네?
적가의 기사들의 표정에 아이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 완전히 잊었다.’
자신 정도 되는 놈이 이걸 잊을 줄이야.
[이쯤 되면 일부러 잊으신 거 아닙니까?]
하지만 뭐, 괜찮았다.
‘주신이니까, 지옥 따위에서 죽진 않겠지.’
응…. 그래…. 죽진 않겠지.
그렇게 혐오하듯 바라보는 건 형법의 신이다. 그 시선에 아이작은 너무 그러지 말라는 듯 따졌다.
‘아, 왜. 잠깐 거기서 좀 있으라 그래! 교황이 되면 소환 성법으로 꺼내준다고!’
[그 전에 마력핵이 먼저 녹지 않을까요?]
‘다른 애도 아니고 내 짝퉁 놈이야. 내가 교황이 되기 전까진 버티겠지!’
[어휴. 하긴, 뭐. 솔직히 여신의 힘만 있음 됐죠. 본체 따위 알게 뭡니까. 있어봤자 주인님을 쫓아내기나 할 텐데요.]
‘…그렇지? 하긴. 신들은 막말로 성력 배급기지.’
[아, 그러면 계속 지옥에 가두고서 성력만 뽑아 쓸까요?]
빌어먹을 마족들의 생각을 읽은 형법의 신은 경악하듯 보았다.
‘이 미친! 저놈이 교황이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는데……!’
도대체 신을 뭐라 생각하는 건지!
하지만 아이러니한 건, 저놈의 몸뚱이는 그 어떤 사제보다 가장 신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형법의 신으로서는 머리를 움켜쥘 수밖에 없다.
‘이제 믿을 건 키나랑… 다른 교황 후보들뿐이다.‘
아이작을 방해할 순 없으니, 최소한 그놈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그럴 때였다.
“가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큭…….”
쓰러져 있던 에슈아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일라이도, 릴라이도 머리를 움켜쥐며 일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눈뜨자마자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건?”
“……!!”
저택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푸른 저택은 운석이라도 맞은 듯 절반이 사라져버렸고, 정원은 흔적이 안 보이다 못해 지하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큰 구멍이 나버렸다. 근처 기물들도 마력에 휩쓸려 새까만 재만 남았다.
그나마 저택의 절반은 남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라고 해야 할까.
“이… 이건 도대체.”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택을 이따위로 만든 건 해골왕의 짓이 틀림없을 터.
기사들의 부축을 받던 릴라이가 급히 주변을 살폈다.
“해골왕은?!”
“없습니다!”
“도망갔나?”
그때였다.
“아니, 처리된 듯하다.”
“!”
낯익은 목소리에 릴라이도, 가주도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레아랑 카야, 그리고… 칼리야 형님!”
은발의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제 정문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곳을 통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형님이 어떻게!”
아이작의 숙부이자 셋째인 칼리야는 해골왕의 저주로 인해 시한부가 되었다.
멜리사를 가장 닮아 제일 강하지만, 툭하면 피를 토할 정도로 몸이 약했다. 그래서 본가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을 텐데?
그러자 레아가 말했다.
“콘클라베 과제 때문에 수도로 가는 중이었는데, 숙부님이 수도에서 해골왕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셔서 합류하게 되었어요.”
“!”
“그런데 진짜로 해골왕의 힘이 느껴져서… 급하게 여기까지 왔는데, 알 수 없는 결계 때문에 수도에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아마도 아이작이 접근을 막는 결계를 친 탓에 그들이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런 마당에 에슈아 저택에서는 본 적도 없던 마력이 치솟아 오르기까지 했으니, 아마 초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결계가 풀린 다음이었다.
“칼리야, 너……!”
평소라면 시체에 가까웠을 칼리야의 혈색이 묘하게 좋다.
그뿐이 아니었다.
“형님, 지금 성력을 쓰고 계신 거죠?”
그의 몸을 따라 은은하게 돌고 있는 건, 틀림없는 성력.
하지만 성력을 쓰면 바로 피부터 토하는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다고?
“설마 너…….”
일라이도, 릴라이도 흔들리는 눈으로 칼리야를 보았다.
“예. 자세한 건 확인해봐야겠지만, 숨을 쉬기가 편합니다. 아무래도 저주가 풀린 것 같습니다.”
“?!”
뭐라고? 저주가 풀렸다고?
놀란 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 기사들은 기쁜 듯이 소리쳤다.
“정말 해골왕이 처리된 건가?”
“그놈을 처리했다고? 도대체 누가!”
그 말에 일라이가 흠칫했다.
“아이작은?”
기사들은 그 말을 어찌 알아들은 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아이작 도련님이 처리하신 거겠군요!”
“예, 저희 중에서 마지막까지 버티고 계셨으니까요.”
“그래, 아이작이……!”
릴라이도 감정이 북받치는 얼굴이었지만, 정작 일라이의 표정은 심각했다.
“아이작은 어디에 있느냐.”
심상치 않은 가주의 눈빛에 기사들은 당황했다.
가주께서 이리 화를 내시다니. 소가주의 안전은 생각도 않고서 기쁨부터 외치는 자신들을 질책하는 것일까.
“저,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안 보이시는군요.”
“죄송합니다. 방금 전까지 계셨는데…….”
바로 그때였다.
“저 찾으셨어요, 할부지?”
“!”
익숙한 목소리에 일라이가 미간을 좁혔다. 손자가 웃으며 다가오자, 할아버지의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아이작…….”
마주한 둘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잠들기 전, 그 수면 마법을 누가 썼는지 모를 리도 없는 일라이다. 또한 그게 일개 수준이 아니란 것도 안다. 거기에 해골왕의 저주까지 풀린 듯한 지금 이 상황.
이해가 안 간다. 자신들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나?
‘아이작,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그건 마의 아이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짐작건대 아이작은…….
“너…….”
일라이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건 조부, 아니 신성제국을 지키는 추기경의 눈이었다. 마족을 경계하는 최고 사제의 눈인 것이다.
하지만.
‘…왜지?’
왜 수상쩍어야 할 놈이 성스러워 보이지?
일라이는 드물게 제 눈을 비볐다.
이상하게 아이작의 몸에서 은은한 후광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마족을 배척하는 성자의 기운이었다. 그러니 당황할 수밖에.
‘…젠장. 뭐지? 왜 저 녀석한테서 신의 기운이?’
동시에 그 혼란을 지켜보는 아이작과 위스퍼는 뭔가 깨달은 듯 푸흡 웃었다.
[주인님. 이거 좋은데요?]
‘그러게. 효과 죽인다.’
아이작은 지금 짝퉁 놈에게서 수거한 청의 여신의 힘 때문에 파워업을 한 상태였다. 뭐, 여신의 본체는 지옥에 있지만, 그 힘은 유효한 듯했다.
아니, 유효한 수준이 아니지.
‘이거면 신앙심이 없어도 성스러운 효과 쩔겠는데?’
그러니 그들로서는 소악마처럼 웃을 수밖에 없다.
[이거 조금만 더 가지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게. 그래도 될 것 같다.’
원래는 청의 여신의 힘을 에슈아에 보관해둘 생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저놈들을 주는 것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제일 안전하지 않을까?
뭐, 일단 할아버지의 오해를 푸는 것부터 해야겠다만.
그때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해골왕이 나타나다니!”
“!”
에슈아 저택에 흑과 백의 추기경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해골왕이 나타난 사건이 모두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니, 귀에 들어간 정도가 아니지. 그만한 힘을 쓸 수 있는 건 마족 중에서도 오직 하나가 아닌가.
그 흉악한 마법에 새하얗게 질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 최강의 존재가 제국 안에 들어오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해골왕은 지금 어디에 있죠?”
그러자 일라이가 아이작을 슬쩍 추기경들의 반대쪽에 구겨 넣으며 말했다.
“괜찮다, 놈은 이미 처리했다.”
그 말에 추기경들과 그들을 따라온 시종 사제들이 경악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해골왕을 처리하다니?
“지금… 뭐라… 예? 예?”
“처리했다고.”
“예?!”
“도대체 누가!”
“멜리사 성녀님… 아니면 각하께서 처리하셨습니까?”
“그건…….”
일라이는 골치 아픈 듯 미간을 좁혔다. 사실 잠들어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해골왕이 퇴마된 게 아니라, 아이작과 흉계를 꾸미는 것이라면…….
하지만 그때였다.
“아이작 님이십니다!”
“!”
목소리를 높인 건 다름 아닌 아이작에게 구조된 적의 기사들이었다.
묘하게 촌스러운 옷차림에 추기경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들이 외쳤다.
“아이작 님이 해골왕에게 납치되었던 저희들을 구해주셨습니다!”
“성력으로 해골왕을 무찌르는 광경을 보셨어야 했는데!”
“이 은혜는 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이번엔 일라이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로 아이작이 해골왕을 없앴다고?
아니, 그보다 얘들은 또 누구야??
* * *
“그러니까… 너희들이 160년 전…의 아니, 안테 세페트 공작의 자손이라고?”
“예!”
“해골왕에게 붙잡혀 있었고?”
“예!”
“아이작이 해골왕을 잡는 것도 봤고?”
“예! 그렇습니다!”
끄으으응.
일라이는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아이작이 정말로 해골왕을 잡긴 한 모양이었다.
그는 미간을 짚으며 레아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다른 교황 후보 가문에도 해골왕의 망령이 나타났었다는 거냐?”
“네. 피해가 컸어요.”
그래, 하지만 아이작이 해골왕을 없애자 그 망령들도 사라졌다는 거지.
그리고 이놈들의 증언까지…….
곧 아이작을 찬양하는 적의 기사들을 보는 릴라이가 일라이에게 속닥거렸다.
“이 상황을 알면, 적의 추기경이 아이작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품지 않을까요? 교황 건도 추기경의 추천이 있어야 하는데… 이거라면 확실한 우리 편이 될지도…….”
“아니. 쿠테타가 일상인 미친 가문이다. 선조가 나타났다고 해서 반길 리가 없어.”
오히려 적대감을 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 분명 그럴 터인데…….
‘뭐? 카루스 세페트??’
장난하나?
그 사람이면 현재 적가가 찾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닌가?
자신들이 해골왕을 잡는 게 사명이듯, 각 가문에는 중대한 가문사들이 있다.
그리고 적가에게도 분명 잃어버린 공백의 역사가 있었다. 그 역사의 열쇠를 쥔 세대의 인물들인 것이다.
릴라이는 수긍했다.
“적의 공작가가 몹시 좋아하겠군요. 여기로 오는 중이라던데.”
아니. 좋아만 할 뿐이겠냐.
그 시절의 적가의 사람이면 능력적으로 가장 빛을 발할 때의 인물들이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아이작 님! 평생 따르겠습니다!”
“오냐!”
“주군!”
“오냐!!”
그 적가의 선조란 놈들이 아이작을 찬양하고 앉아있다는 거지…….
일라이로서는 피곤한 듯 하늘을 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봐도 이거, 족보 꼬인 것 같은데.
괜찮은 거 맞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