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자리를 넘기시죠 (3)
가주는 제 귀를 의심했다.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눔의 자식이, 뭐?
교황이 안 된다니까 지금 뭐라고?
“가주 자리를 넘겨주시죠.”
“…지금 협박하는 게냐?”
죽기 싫으면 교황 추천하라고?
그 당혹과 분노가 섞인 표정에 아이작은 천사처럼 웃었다.
“에이, 그럴리가요. 그냥 가주 자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자리 뺏기기 싫으면 교황으로 추천하라고???”
그 말에 아이작은 진짜 너무한다는 듯했다. 어떻게 그렇게 해석을 하느냐는 것이다.
“할부지. 제가 그렇게 패륜아는 아닙니다.“
너 패륜아야, 새끼야.
“이유가 있으니까 달라고 하는 거겠죠?”
네가 언제 이유 같은 걸 따졌다고?
일라이가 물었다.
“…설마 본인이 가주가 되어, 본인을 교황으로 추천하겠단 거냐?”
“그딴 귀찮은 짓을 왜 해요? 어차피 다른 추기경들이 두고 볼 것 같지도 않고.”
그 말에 일라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 자식, 그러면 설마…….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할아버지는 그냥 그 자리를 제게 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눈치 빠른 일라이는 괘씸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이 자식. 차기 가주한테 교황 추천을 시킬 셈이구나???’
그리고 높은 확률로 저놈이 올릴 차기 청의 가주는…….
‘슈리군.’
슈리는 아이작과 가장 가깝고 친하니까.
물론 슈리 본인은 끔찍하게 질색하며 부정하겠지만, 어쨌거나 아이작 대타가 슈리인 건 맞으니까.
‘하지만 슈리는 아직 9계위가 아닐 텐데.’
추기경의 자격 조건이 안 된다.
그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아이작 스윽 웃었다.
“제가 교육은 좀 합니다.”
…뭘 하려고……?
“그리고 할아버지. 제가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가주님께 ‘은퇴하십시오’가 아닌, ‘가주 자리를 넘기십시오.’라고 한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러자 일라이는 드물게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게 가주 자리가 넘어가는 경우는 둘뿐이다.
첫 번째, 세월로 인한 작위 승계.
즉 후계가 장성하면 선대가 직접 물려주는 것이다. 제일 일반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불가항력.”
“!”
“현 가주가 죽으면, 자동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죠.”
뭐, 인마?
일라이는 경계하듯 아이작을 보았다.
‘드디어 마족의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그러나 아이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간 지내온 정이 있으니, 그냥 솔직히 까놓고 말씀드릴게요.”
“뭘.”
내 모가지를 따겠다고?
“할부지. 곧 돌아가실 겁니다.”
그래. 이 자식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이 은혜도 모르는 놈…….
“카인 베리트한테 살해당해요. 그것도 백 프로로.”
…뭐라고?
* * *
슈리는 땀을 삐질 흘렸다.
‘뭐지.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지.’
슈리는 쫄아서 눈앞의 인물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일라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이작을 만나고 온 가주께서 갑자기 호출하셨다.’
뭐지.
심지어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뭐지?? 나 뭐 잘못했지?’
가뜩이나 가주님은 어려운데!
아이작 그놈은 어떻게 할아버지를 안 무서워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던 슈리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있을 때였다.
“슈리. 네 나이가 스물하나더냐.”
슈리는 놀라 고개를 퍼득 들었다.
“예? 아, 예! 그렇습니다!”
“고엘이 좋은 혼담들을 가져왔지만, 전부 거절했다고 들었다.”
슈리는 난처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 그건! 제가 아직 부족해서 수련에 집중을 하다 보니…….”
“듣자 하니 마음에 둔 아이가 있는 것 같다던데.”
“헉, 그건!”
“아이작의 종자, 샤브더냐.”
슈리는 허억,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일라이는 측은한 눈으로 손자를 보았다.
“그 아이가 그리 좋더냐.”
“아니… 아니, 그게, 그게요. 오해십니다! 그냥 아이작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 주변에서 오해를……!”
“솔직히 말해도 된다. 샤브면… 그래. 예쁘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아이가 아니더냐.”
그러자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하냐는 듯, 슈리가 일라이를 보았다.
“정정해 주십시오, 가주님.”
“뭐?”
“샤브는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
일라이는 침묵했다.
…아이고야. 그 강을 건넜구나…….
할아버지의 측은한 표정에 슈리는 커흠, 민망한 듯 기침을 했다.
“압니다. 저도 신분상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닌데.
“아버지는 샤브가 출신부터 불분명하다고 꺼리시지만, 아이작에게 그리 충성하는 걸 보면 믿을 만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진실을 아는 일라이는 대답 대신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이작이 그러더구나.”
“무엇을… 말씀입니까?”
“본인을 교황으로 추천하기 싫으면, 가주 자리를 내놓으라고.”
“예?”
“가주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더구나.”
“예?”
“가주 자리를 내놓으라고.”
“예?”
“널 가주로 올린다고.”
“……예??!”
슈리는 비명을 질렀다.
시바, 이 미친 새끼가!!!!!
‘이 새끼가 할아버지한테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진짜 미친 건가?’
심지어 자신을 끌여들여???
‘이 자식, 할아버지가 안 되니까 나한테 교황 추천을 시킬 모양인데.’
슈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가주님 그게요…. 그놈이 제정신이 아니… 아니, 아닙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그저 형으로서 제대로 못 가르쳐서 그렇습니다! 제가 대신 머리를 박겠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일라이는 해탈한 듯 천장을 보았다.
“…아니다. 한술 더 뜨는 사람이 있어서 괜찮다.”
“…예? 그게 누구…….”
누구긴 누구야.
이 이야기를 했더니, 멜리사는 미친 듯이 웃었지.
-가주? 그 정도야 내주지 그래?
…멜리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때 슈리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내년에 성인이 되긴 하나, 애가 철이 없어 하는 소리입니다. 저 역시 가주가 되기엔 부족하고요. 그러니…….”
바로 그때였다.
“니가 안 하면 키나 줘버린다?”
……뭐, 인마?
슈리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제 귀를 의심했다. 목소리는 창가 쪽에서 들렸다.
응접실 창가에서 얼굴을 슥 내민 건 다름 아닌 아이작. 슈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저놈이 지금 뭐랬냐?
“키나한테 뭘 줘?”
“가주 자리.”
“왜 하필 키나인데??”
“그놈이 베리트를 버렸다더라. 그럼 가능한거 아니냐? 추기경으로 올리면 자연스럽게 교황 후보도 사퇴될 거고.”
슈리는 뭔 말을 하나 했다며 어처구니없어했다.
“장난하냐? 이 경우라면 당연히 릴라이 숙부님이지. 에슈아의 피도 안 섞인 놈이 어떻게 가주가 되는데?”
“글쎄. 가계를 보면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데.”
뭐라고? 가계?
불안해진 슈리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너 그게 무슨 말인데!”
하지만 슈리가 불안해하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픽 웃으면서 창가에서 벗어났다.
“뭐, 네가 안 된다면 할 수 없지.”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에 슈리는 창가로 달려갔다.
“야! 걔는 죽어도 안 돼! 가주 자리는 내 거야!! 야! 너 거기 안 서!”
두 손자들의 실랑이에 일라이는 다시 천장을 보았다.
이 할아비, 아직 안 뒤졌다, 이놈들아.
* * *
‘개자식. 결국 끝까지 말도 안 해주고.’
슈리는 씩씩거리면서 카인이 연금된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아이작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가주를 내놓으라 했냐고? 간단해. 실베스테르를 보고 확신을 한 것뿐이야. 할아버지는 곧 죽어. 혼란이 없게 미리 옮기려는 것뿐이야.
슈리는 이를 갈았다.
‘할아버지가 카인한테 살해당한다고?’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아이작은 이리 말하지 않았는가.
-정 궁금하면 직접 가서 확인해보든가?
그런 말까지 들은 슈리로서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다.
‘카인 베리트. 그 정도로 강하다는 건가?’
마침내 연금된 방에 들어가자, 안에 있던 카인 베리트가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슈리를 본 카인은 신성드래곤을 데리고 온 건가 싶었는지, 바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신성드래곤은 없어. 나 혼자야.”
“!”
이에 카인은 멈칫하며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아, 슈리 형님이 어쩐 일이시죠? 아이작 님의 명이신가요?”
그러자 슈리는 같잖다는 듯, 문을 쿵 닫았다.
“연기하지 마. 어차피 당신 정체는 다 알고 있으니까.”
“!”
“그 위대한 실베스테르 교황이시잖아?”
“……!”
카인이 놀란 듯 바라보자, 슈리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래봐야 금 기술을 쓴 시점에서 당신에 대한 존경심은 없으니까.”
“호오.”
카인이 뭔가를 하려고 하자, 슈리가 바로 경고했다.
“어허. 곧 신성드래곤이 올 테니 헛짓거리 하지 마. 네게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거니까.”
“물어볼 것?”
“그래서 수백년 전 교황은 할아버지와 무슨 관계셨지?”
그 질문에 카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이러면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겠군.’
자신의 정체가 새어 나가면 곤란한 건 사실이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야. 해골왕을 처리할 좋은 찬스다.
‘해골왕, 내부에서 박살 내주마.’
하물며 하필이면 자신을 찾아온 게 누구인가.
“슈리. 교황의 피를 이은 내 후손아.”
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어디서 개수작을.”
“경계하지 말아라.”
그 말을 들은 슈리는 순간 움찔거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카인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고위사제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위엄이었다. 그래,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게 되는 그 힘. 그리고 사제들은 느낄 수 있는 아군의 냄새.
“후손아. 베리트가 아닌, 이 나라를 사랑하는 성직자로서 말해주마.”
“예?”
“네가 이럴 때가 아니다.”
“뭐?”
“이 나라와, 너희 가문을 망하게 하려는 자가 있다.”
“…그게 무슨.”
카인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작 에슈아. 그놈은 해골왕이다.”
그 말에 슈리의 눈이 커졌다.
뭐?
순간 슈리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본 카인이 기대했던 반응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놈이 어떻게 해골왕을 처리했다고 보지? 너도 의심 가는 구석은 많았을 텐데?”
슈리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교황이었던 자다. 심지어 해골왕을 증오하는 자로서, 섣불리 그의 이름을 꺼낼 리도 없다.
“…정말로?”
“그렇다. 그놈은 에슈아에 태어나 너의 성녀 가문을 없애려는 사악한…….”
“푸하화하헤헿! 존나 웃기네. 걔가 어떻게 해골왕이야. 차라리 니 엄마가 내 엄마라고 해라! 아, 이게 바로 선조들의 개그인가? 근래 들어 최고로 웃겼다!”
실베스테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친.
진실을 말해줘도 믿지를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