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내게 투표해 (1)
흑의 추기경의 표정에, 아이작은 씨익 웃었다.
그래, 당황스러울 거다.
‘이 몸으로 하여금 직접 꼬시러 나오게 하다니. 가문의 영광으로 알라고.’
[괴롭히러 나온 게 아니고요?]
‘내 사랑을 듬뿍듬뿍 받게 되다니, 대대손손 눈물겨워 하라 그래!’
[눈을 뽑아내지나 않음 다행이죠…….]
그리고 아이작이 뭔가를 꺼내 들며 다가오자, 흑의 추기경이 바로 무기를 뽑아 들었다.
스릉!
흑의 추기경이 꺼낸 건 작은 흑색 화승총. 신성제국에선 흔하지 않은 무기다. 타국 문물에 적극적인 흑가의 수장 정도나 지닐 만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명백히 자신을 노리는 그 흉악한 무기에 아이작은 기가 찼다.
“뭐여! 무기는 왜 뽑는데!”
“왜긴? 내 인장을 빼앗아서 네 이름을 투표할 생각이 아니냐?”
…왓?
뭘 빼앗아?
아이작은 어이가 없어졌다.
“나 너 꼬시러 왔다니까???? 그딴 짓을 왜 해? 잠자코 가만히 있어!”
그 말에 흑의 추기경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아하. 얌전히 너한테 묶이라는 건가. 이제 보니 히레이처럼 날 납치하고서 흑의 추기경의 대리를 만들 셈이군.”
아이작은 이마를 짚었다.
‘납치라니…. 아놔, 내 이미지 돌려줘.’
[주인님한테 그런게 있었나요?]
있고말고. 해골왕한테는 고귀하고 지적이고 예쁘고 위엄있는 이미지가 있거든.
[…….]
“그보다 금의 추기경은 내가 한 짓 아니거든?”
그 외침에 흑의 추기경은 굉장히 의외라는 듯 보았다. 아이작에 대한 경계가 조금은 풀리려는 듯했다.
“…네가 금의 추기경을 제국 밖으로 내보낸 게 아니었나?”
“그건 맞지! 그 새끼가 날 방해할 거니까!”
“…….”
철컥.
총구가 아이작의 머리통을 향했다. 흑의 추기경의 눈빛은 더욱 불신으로 찼다.
아이작은 본인이 실수했다는 듯 외쳤다.
“걱정 마! 안 죽였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러나 정작 아이작은 당당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황이겠지만, 목숨은 붙어있으니 됐잖아! 죽지만 않음 된 거 아냐?!”
“………….”
흑의 추기경의 얼굴은 더욱 썩어갔다. 뭐 저딴 놈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냐는 표정이다.
저게 교황 후보라니. 대륙이 망할 징조다.
아니, 어떤 의미론 이거, 신들께서 추기경들에게 내린 시험이 아닌가? 나태해지지 말라고? 어딜 저딴 걸 품고 나라를 운영해보라는?
결국 흑의 추기경이 사람을 부르려고 하자,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힘을 드러냈다.
쾅!!
아이작의 등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힘에 흑의 추기경은 흠칫 놀랐다.
‘!’
무서울 정도로 강대한 힘이었다.
그 힘은 흑의 추기경이 저항을 하기도 전에 그를 묶어버렸다.
“…큭!”
검은 줄기와 같은 힘에 꽁꽁 묶인 흑의 추기경은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 드디어 마족의 본성을……!”
그러나 곧 흑의 추기경은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게, 이 힘은 마족의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둠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성력.
‘어둠의 각성신으로 각성한 초월단계의 힘인가.’
놀라운 건 그게 아니었다.
스르륵!
‘내게 붙어 있던 잡마들이 사라진다.’
추기경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던 검은 솜뭉치들이 녹아내렸다. 마치 막대한 교황의 성력에 의해로 정화되듯이.
곧 아이작이 말했다.
“네가 딸을 살리기 위해 마를 연구하는 건 알고 있어.”
“!”
“그래서 늘 그리 음침하게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거지. 뭐, 연구 효과도 없이 본인 몸만 해치고 있는 상황인 것 같다만.”
흑의 추기경은 마치 까마귀처럼, 목부터 발끝까지 피부를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검은 장갑을 꽁꽁 끼고 다닐 정도니, 말 다 했지.
그럼에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건 북부의 서늘한 환경과, 흑의 사제들은 전부 가면을 포함해 꽁꽁 싸매고 다니기 때문이겠지만.
“아마 그 옷 밑으로는 전부 썩어가고 있겠지? 인간이 독기에 가까운 마기를 감당할 순 없으니까.”
흑의 추기경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세라핀의 짓이군.’
세라핀, 즉 백의 추기경은 주치의로서 흑의 추기경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를 보는 아이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히 저 상태면 마에 잠식되어 얼마 못 가 자멸하겠군.’
[미친놈이네요.]
“딸, 에일린이 마에 당해 동결에 든 지 20년이랬나?”
그 이름에 흑의 추기경이 움찔했다.
곧 그의 매서운 눈빛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청의 소가주 입으로 그 이름을 꺼내지 마라. 역겨우니.”
20년 전, 마족의 습격 속에서 흑가의 공작 부인과 딸은 청가에게 구조받지 못했다.
상황상 어쩔 수 없었던 사고란 건 알지만, 흑은 청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새삼 본인들의 치부라고 생각하는 거냐? 한 번만 더 내 딸의 이름을 꺼내면, 네놈의 모가지를 꺾어주마…. 큭!”
“본인의 처지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나 하시지?”
“크윽!”
흑의 추기경의 목이 꺾였다.
아이작은 목이 졸려 괴로워하는 흑의 추기경을 보며 큭큭 웃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그 이름은 계속 꺼내야겠거든? 이쪽도 중요한 거래가 걸려 있어서.”
“…거래?”
아이작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백의 추기경이 내게 표를 던져줄 중요한 조건이지.’
사실 그는 백의 추기경과 이런 말을 했었다.
-아이작 사제는 교황이 되고 싶으시군요. 뭐, 사실 저는 안 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표를 드릴 수도 있죠.
-오?
-제 오랜 친구를 짓누르고 있는 슬픔을 해결해 주시면요.
-슬픔?
-청과 얽혀있는 흑가의 이야기는 아시나요?
-아. 흑가의 공작 부인과 공녀가 마족의 습격으로부터 구조받지 못해 죽은 사건 말입니까?
-네, 딸만큼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했는데, 마에 잠식되어 살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힘으로도 불가능했고, 성법부터 마법, 연금술, 정령술, 고대 의술… 대륙 그 누구도 해결 못 했어요.
-오.
-본인은 딸을 치료해 보겠다고, 본인을 마에 집어넣어 혹사하는 상황이에요. 솔직히 너무 무모하죠. 죽지 않도록 항상 처방을 해주고는 있지만 위태롭답니다. 하지만 만약에 아이작 사제가 그걸 해결할 수 있다면…….
백의 추기경은 거래를 청해왔다. 흑의 추기경을 구해달라고. 오랜 친구를 수렁에서 꺼내달라고.
그래서 물었었지. 고작 그런 걸로 투표권을 거래해도 되겠냐고. 신념에서 벗어난 짓을 해도 되겠냐고.
그랬더니 그녀는 이리 답했지.
-청, 적, 금, 흑. 각자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나라와 약자들을 위해 적(敵)들과 싸우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누가 지켜줄 수 있을까요?
-!
-백은 그 가여운 이들을 지키는 유일한 신앙이랍니다. 그리고 교황은 이 다섯 개의 신념을 모두 아우르는 자. 제 조건이면 교황 표는 충분히 받을 만한 자격이 되시지 않을까요?
그래, 그렇게까지 표를 거저 주고 싶다는데, 나서줘야지.
곧 아이작이 흑의 추기경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당신 딸 구해줄게.”
“!”
순간 흑의 추기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금세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표 전부 다 내놔, 새끼들아!”
…그게 구해준다는 사람의 태도냐?!
* * *
그 무렵, 일라이는 황궁의 뒷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들 눈엔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일라이가 그런 곳으로 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작 때문이다.
‘아이작은 교황이 되기 위해, 추기경들을 포섭하고 있다.’
실제로 자신에게도 이리 말했지.
-할아버지를 설득하면, 교황 표 좀 내어주실래요?
-허, 그래. 설득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오키. 그럼 내기한 겁니다?
그래서 일라이는 아이작과 내기를 했다.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아이작에게 표를 주겠다고.
하지만 다른 추기경들은 몰라도, 자신은 절대 설득하지 못할 텐데. 뭘 어쩌려고?
그랬더니 놈은 이리 말했지.
-카인 베리트와 단둘이 만나보세요. 그럼 내기에서 제가 이길 수밖에 없을걸요.
도대체 왜? 카인 베리트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그전에 왜 수백 년 전 망령이 자신을 노리는데? 무슨 연관이 있어서?
-아, 그전에 일단 할부지는 충격적인 사실을 먼저 알게 되겠죠.
충격적인 사실?
성직자가 빙의 술법을 쓴 것 때문에?
아니면 수백 년 전 교황이라는 사실 때문에?
‘새삼 과거의 망령을 보고서 놀랄 일이 뭐가 있어서.’
사피엔의 말을 들은 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던 참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일라이의 앞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황궁 뒷문으로 나오고 있는 카인 베리트였다.
연금 상태였다가 막 풀려난 듯했지만, 불명예스럽게 뒷문으로 나오는 걸 보면 죄인 취급인 건 여전한 듯했다.
그는 황궁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신성드래곤을 이미 만난 건가?’
어째서인지 굉장히 화 나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라이를 확인한 카인이 언제 썩은 얼굴을 했냐는 듯 웃었다.
“아,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는 슈리가 알고 있으니, 네놈도 알겠군.”
-만나면 놀랄 테니, 각오 단단히 하시고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
갑자기 황궁 뒷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지면이 뒤흔들리고, 파편이 여기저기로 튕겨져 나갔다.
급히 성력으로 몸을 방어한 일라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테러인가?”
그러나 곧 일라이는 아차 싶었다.
…아니, 설마 놀란다는 게 이거였나?
‘아이작, 되도 않는 수를… 어?’
폭발이 일어난 장소는 다름 아닌 카인의 몸이었다. 가지고 있던 물건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카인은 짜증 섞인 얼굴로 몸을 털었다.
“아. 신성드래곤, 끝까지 별 시답지도 않은 짓을…….”
그러나 일라이는 충격적인 눈으로 카인을 보았다.
다름 아니라 그의 몸에서 감돌고 있는 신성력 때문이다. 폭발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쓴 듯했다.
그러나 그 성력을 보는 일라이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아니, 말이 안 되는 수준이 아니다. 그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동시에 그 표정에 카인 베리트는 아, 하고 미간을 짚었다.
“아. 그래. 맞다. 네 앞에서는 성력을 쓰면 안 됐지.”
“…말도 안 돼.”
형의 자리를 찬탈한 가짜 교황과 싸울 때, 일라이는 그에게 말했었다.
-진짜 교황의 힘을 쓰지 못하는 이상, 너는 내 적수가 못 된다.
어린 시절, 교황가 형제와 대련해오면서 그들의 힘을 기억하는 일라이였다. 그래서 그걸로 가짜도 판별해낸 것이 아닌가.
동생과 형의 성법을 똑똑히 기억하기에, 몸이 바뀌는 한이 있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그 특유의 성법 형태를.
그런 만큼 일라이가 이 낯익은 기운을 모를 리가 없다. 아니, 그뿐인가? 심지어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너…….”
그 확신에 찬 목소리에 카인은 망했다는 듯 보았다.
일라이는 그제야 아이작이 왜 그런 내기를 해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저놈은 가짜 교황에게 살해당한 진짜 교황.
사악한 실베스테르의 부추김에 동생에게 살해당한 형.
자신의 죽은 친구.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했던 놈.
“…너, 설마 율리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