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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67화 (267/272)

제267화 내게 투표해 (2)

한편, 일라이와 카인이 조우한 그 무렵.

아이작에게 텔레파시로 연락이 왔다.

다름 아닌 사피엔이었다.

[아이자악…. 나야.]

머릿속에 울리는 사피엔의 목소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기가 좀 세긴 하지만, 그 청아하던 목소리가 골골거리듯 푹 잠겨있다.

그 목소리만 들어도 상황이 끝났음을 바로 깨달은 아이작이 큭 웃었다.

‘그래. 잘했어? 목소리 들으니 계획대로 잘한 것 같긴 한데.’

사실 아이작은 사피엔과 계획을 세워뒀었다. 카인 베리트와 연관해서 말이다.

그래서, 무슨 계획이냐고?

[네 말대로 놈이랑 맞짱을 떴어…….]

‘오, 그 새끼. 안 넘어올 줄 알았는데. 결국 넘어왔구나?’

[뭐어…. 그놈이 두려워한 건 내 삼촌이지, 내가 아니니까. 그놈한테 나는 이제 갓 성룡이 된 꼬맹이가 아닐까……?]

뭐, 그것도 그러네. 사피엔은 태어난 지 200살도 안 된 애송이니까.

어쨌거나 아이작은 사피엔과 카인 베리트를 맞붙게 했다.

일단 사피엔에게는 카인을 보자마자 복수심에 불탄 척, 먼저 공격하라고 지시했었다. ‘네놈이 내 삼촌을 죽인 장본인이냐?!’ …뭐, 대충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실베스테르를 잘 안다.

상대가 그리 나오면 실베스테르는 상대를 더욱 하찮게 본다.

그리고 가뜩이나 오만한 성격에 신성드래곤에게 품은 수치심과 악의, 그런 것들이 한데 섞인 자라, 저돌적인 애송이에게 철퇴를 내리겠다는 가학심을 드러낼 게 분명할 터.

[아이작…. 나, 네 말대로 단순 무식하게 덤벼들었어…….]

‘그래그래. 그 새끼한테 네 정보는 없을 테니까, 그게 네 본모습이라고 생각하겠지.’

실제로는 굉장히 머리가 좋아서 100가지 수를 앞지르고, 실베의 일격에 당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데도, 네 말대로 피떡이 되어 깨지는 척했어.]

‘응응. 그랬구나. 잘했어.’

[나… 성질 죽이고 진짜 열심히 했어.]

‘응 알지알지. 그래서 카인 베리트는?’

[나 진짜 열심히 했다고!!]

‘응, 안다니까? 그래서 카인 베리트는?’

[씨이! 내가 마력 역류를 일으키니까 쓰러졌다고 생각했는지, 황실에 당당히 피해배상을 요구하고선 나갔어!]

‘뭐라고? 역류? 너, 마력핵은?’

그러자 사피엔의 목소리가 묘하게 해맑아졌다.

[이제 걱정해줄 마음이 드는 거야?]

‘아니, 파괴되면 네 가치가 떨어지잖아.’

[씨이! 마력핵은 여러 개이기도 하지만 파괴된 건 가짜라서 상관없어.]

‘그래? 그럼 말한 건 붙여놨겠지?’

[응…. 그놈이 가진 물건, 시한폭탄 마법을 걸어놨어. 최후의 발악처럼. 그리고 놈이 일라이 에슈아랑 만났을 때 그걸 발동하란 거였지?]

‘그래.’

[그럼 지금쯤 일라이 에슈아랑 그놈이랑 만났겠네…. 마법이 발동했으니까.]

‘좋았어.’

[그런데… 정말 둘이 만나게 하면 되는 거야?]

‘엉. 너한테 이겼다는 자만감 때문에 힘을 쓰는 데 그렇게 겁먹지도 않을걸. 할아버지한테도 그냥 정체를 드러낼 거야.’

[둘이 만나게 해도 괜찮아?]

‘응. 만나면 할아버지는 내게 표를 줄 수밖에 없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일라이 에슈아 괜찮냐고. 그 망령 놈, 생각보다 강했어. 솔직히 일부러 반격을 안 하긴 했지만, 나도 아팠어.]

‘암. 괜찮고말고.’

[…아팠다고!]

‘응. 그렇구나.’

[씨이!]

사피엔이 슬퍼하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흑의 추기경을 보았다.

“자, 그런 의미로 가보시죠? 따님을 깨워보러.”

* * *

“너, 설마 율리오냐?”

일라이는 당황스러웠다.

본인이 묻고도 어이가 없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더욱 기가 찼다.

“아. 이래서 네 앞에서는 힘을 쓰기 싫었어.”

“……!”

“일라이. 잘난 것도 적당히 잘나라고. 너 너무 감이 좋아. 그렇게 감이 좋으면 오래 못 산다고.”

일라이는 말문이 막혔다.

“…네가 정말… 그 율리오 베리트라고?”

그 되물음에 카인은 화가 뻗치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래. 나다, 일라이. 40년 전 죽은, 네 둘도 없는 단짝이자 브루티오의 형! 히레이의 큰아버지! 교황이 되어야 했지만, 성인식 날 동생에게 살해당한 그 율리오 베리트!”

“허.”

일라이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왜… 네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왜 죽어서 장례까지 치른 친구가 눈앞에 있는 건지.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수백 년 전의 교황, 실베스테르도 너란 거냐?”

“그래! 어디 실베스테르뿐이야? 할리스토, 르넬리오, 라노, 마르코, 세비오, 요한, 율리오, 카인 베리트! 그것들도 전부 나다!”

일라이는 기가 찼다. 저놈이 말하는 이름은 전부 실베스테르 이후의 교황들이다.

‘그럼 역대 교황들은 전부 저놈이었다는 의미인가.’

그 말이 맞는지, 카인은 화를 삼키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중간중간 단명한 놈들을 제외하면,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었다.”

그는 죽고, 또다시 베리트가의 장남에게 빙의하고, 교황이 되고. 그런 식으로 매번 새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내 나라, 내 신성제국을 키워왔다. 그런데 무슨 황실 따위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일라이는 대답 대신 침음을 흘렸다.

아아, 이제야 이해가 간다.

교황이 황제를 그리 무시했던 이유를.

얼마나 같잖아 보였을까. 수백 년간 후손의 몸을 빌려 이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려왔는데, 고작 반세기도 안 살았을 황제가 정사를 논하는 게.

별 볼 일도 없는 애송이 놈들이 본인과 같은 자리에 서려 한다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현재 일라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왜. 네가 그 아이의 몸에 있는 거지?”

“왜긴 왜야. 쌍둥이 동생 브루티오에게 살해당하고서 영혼으로 떠돌다가 이 몸으로 다시 태어난 거지. 그러니 좀 더 반겨주지? 우리 친구잖아.”

그 답에 일라이의 눈이 사나워졌다.

“개소리 하지 마라. 살해당한 것까지도 전부 계획이었던 거잖아.”

“아. 역시 거기까지 눈치챘나.”

카인은 한숨을 쉬면서도 가슴에 있는 걸 토해내듯 웃었다.

“그래. 브루티오에게 날 죽이라고 했다. 너도 알겠지만, 내 동생은 정신이 불안해서 말이야. 조금만 자극해줘도 폭발하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반응하게 유도하기도 했고.”

즉 동생에게 지속적으로 열등감을 심어 가스라이팅을 해왔단 의미다. 언제든지 자신의 패로 이용하기 위해! 일라이도 눈치 못 채게끔 모범생을 연기하면서!

“그리고 성인식 날, 집에 돌아가는 마차에서 일부러 싸운 뒤 동생을 자극해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왜냐고?”

카인은 같잖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황제의 신성드래곤 놈이 내 정체를 눈치챘거든. 빙의한 망령이 있다면서 날 잡아내려 했으니까!”

“!”

“그래서 죽어서 놈으로부터 도망가야 했어. 그렇게 죽은 뒤 자수하려는 동생을 협박해서 교황으로 앉히고, 신성드래곤을 쫓아내고, 지금껏 뒤에서 제국을 움직여왔다. 그렇게 내 정체를 알아낸 신성드래곤을 죽이고 난 뒤엔 기회를 엿보다가, 이 카인 베리트의 몸에 들어온 거지.”

“허.”

그런 것이었나. 일라이는 허망함마저 들었다.

그 뒤는 뭐,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겠지.

카인 베리트가 된 후엔, 손자로서 교황과 조우하면서 신성제국을 움직여온 것일 터.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배신감이 들지만, 일라이가 근본적으로 배신감을 느끼는 부분은 다른 게 아니다.

“그래서, 네놈이 우리 가문에 저주를 걸었냐?”

가짜 해골왕을 만든 건 실베스테르다. 그 말인즉, 80년 전 에슈아에 저주를 건 것도 저놈이란 의미다.

그래, 실베스테르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저놈이, 자신들과 자식 그리고 청을 없애려고 했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애초에 저놈은 80년 전 에슈아에 저주를 걸어놓고는 뻔뻔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친구가 되었단 것이 아닌가!

-일라이, 너희 가문의 저주는 꼭 풀리면 좋겠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에슈아의 저주를 불쌍히 여기는 척, 친구로서 해결 방법을 찾아주는 척.

“내가 괴로워하는 걸 옆에서 즐기고 있었던 건가?”

그러자 카인은 깊게 탄식했다.

“아니야, 일라이, 그렇지 않아. 넌 숱한 인간들 중에서도 제일 쓸 만했고, 지금도 내겐 친구라고 할 만한 유일한 녀석이야. 그래서 한이야. 널 죽이지 못한 채 떠난 게.”

“뭐라고?”

“일라이, 기억나지 않아? 어릴 때 심하게 앓았던 일? 뭐, 그땐 가벼운 폐렴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간 모양이다만.”

“…….”

일라이의 표정이 굳었다.

아마 열다섯일 때쯤이었을 것이다. 일라이 역시 심한 고열과 각혈에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래, 마치 제 셋째 아들처럼.

“에슈아 사람들은 해골왕의 저주라며 슬퍼했다지. 곧 죽을 거라면서. 그러면서 넌 지금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일라이의 표정이 뭔가를 눈치챈 듯, 얼어붙었다.

“맞아. 내가 살려준 거야. 고마워해.”

“뭐가 어째?”

“내 귀여운 여동생, 헨나. 그래. 지금의 네 후처 헨나가, 예나 지금이나 널 너무 좋아했거든.”

“……!”

“네가 죽어가자, 본인도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으려고 해서, 그래서 살려뒀어. 나는 내 후손들에게는 각별하거든.”

“허.”

“본인이 원하기도 했지만, 헨나를 너희 가문에 넣으면 좀 쉽게 멸문시킬 수 있을 줄 알았지. 너는 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청을 그냥 멸문시키긴 힘들었거든. 그래서 너희 가문에 빚을 지우고, 헨나를 가주의 후처로 보내버린 거지.”

일라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친, 뭐 이런……!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딱 이 말만 했다.

“왜 그렇게 청을 없애려는 거지? 왜 그렇게까지 빙의에 집착하는 건데?”

그 물음에 카인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허. 착각하지 마. 본인의 임무도 망각하고서 해골왕에게 동정하는 성녀 가문 따위, 중요하지 않아. 그냥 눈에 거슬릴 뿐이지.”

“……!”

“그리고 내가 빙의를 하는 이유는 간단해. 청 따위보다, 나한테는 업을 쌓는 게 더 중요하거든.”

“업?”

“그거 알아, 일라이? 신들 중에서 특히 금의 신들이 왜 그리 해골왕을 싫어하는지?”

“……?”

갑자기 해골왕 이야기를 한다고?

도대체 왜…….

“금의 신들은 교황들이기 때문이지.”

“…….”

순간 당황한 일라이는 그답지 않게 반문했다.

“뭐?”

“교황들은 죽어서 신이 된다고.”

뭐가 어째?

“승선(昇仙)이라고 하지. 물론 나는 아직 신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말이야.”

…뭐라고?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말해주는 줄 알아?”

“……!”

“여기서 널 죽일 것이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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