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68화 (268/272)

제268화 내게 투표해 (3)

죽일 듯한 기세로, 카인은 일라이에게 다가갔다.

일라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 분명 아이작이 그랬지.

카인 베리트한테 백 프로 살해당할 거라고.

수백 년 전 망령이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죽이려고 하나 했더니.

‘이래서였나.’

정색한 일라이는 바로 성력을 발동했다.

번쩍!

푸른 성력이 사납게 치솟아 올랐다. 손을 뻗은 일라이는 서슬 퍼런 눈으로 카인을 노려보았다.

“죽여? 같잖은 소리 마라. 내게 정체를 들킨 순간, 제일 위험한 건 네놈이지.”

“!”

저놈이 자신에게 정체를 숨긴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단순히 빙의 사실을 들키기 싫어서?

아니지.

“네놈의 약점은 훤히 알고 있다!”

마침내 푸른빛과 금빛이 사납게 부딪쳤다. 강력한 두 성력이 서로의 목을 물어뜯을 듯 휘몰아쳤다.

쾅!!!

언데드화가 된 카인에게, ‘청’의 성력은 최악의 상성.

항마의 힘이 카인, 아니 율리오의 영혼에 사납게 반응했다. 푸른빛이 스치기만 해도 카인의 몸을 썩게 했다.

하지만 수백 년 치가 쌓여 있는 교황의 힘은 그 이상으로 막강했다.

쾅!!!

노련함 측면에서 차원이 다른 금빛의 힘은 그 위압만으로도 일라이를 찍어눌렀다.

‘성법을 못 쓴다고 하더니.’

실제로 본인이 성법을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성법을 쓰고 있는 건, 카인이 반지였다.

‘교황의 반지인가.’

뭐, 수백 년간 교황을 해먹었던 놈이다. 귀한 물건 한둘 정도야 숨겨놓고 써먹었겠지.

‘교황일 때 힘을 담아놓은 건가?’

곧 금색의 빛이 포탄처럼 떨어졌다.

일라이 역시 반격했다.

콰과광!

서로의 목숨을 진심으로 노리는 일격들이었다.

일라이는 율리오가 기를 쓰고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를 잘 알ㅊ다. 실제로 일라이는, 가짜 교황의 정체를 파악 할 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내 오랜 벗이여. 성인식이 되기 전에 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나? 내게 했던 그 약속을.

그들은 어린 시절, 서약을 했었다.

-서약의 신 이름 아래 진행한 서약대로, 너는 내게 충성을, 나는 네 가문 사람들을 지켜주마.

일라이는 교황이 될 율리오에게 충성하고 그 충심을 보장하는 대신, 율리오는 에슈아 사람을 지켜주기로.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실베스테르는 에슈아 사람인 아이작에게 손을 댈 수 없단 의미다. 설령 그놈이 증오스러운 해골왕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실베스테르가 진짜 두려워하는 건 그게 아니다.

서약을 했던 당시 실베스테르는 기분에 취해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이다.

-일라이, 네 충심을 약조받은 것까진 좋은데, 너는 얻는 게 없는 느낌이야.

-차기 가주로서 가문만 지켜진다면 난 만족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아, 기분이다! 네 소원도 얹어줄게. 말만 해!

-난 딱히 소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데?

-이 재미없는 놈. 그러면 가지고 있어. 나중에 생기면 말해. 이것도 서약에 추가한다?

-쓸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 그러든가.

실베스테르는 일라이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뭐, 수백 년간 살게 되면 정말 가끔 있긴 했다. 시대에 획을 그을 만한 뛰어난 인재들이.

실베스테르가 자기 후손들에게 관대했듯, 그런 녀석들은 특별히 신경 써줬다.

다만 인간들과 가까워지면 안 되는 이유로, 보통은 교황이 된 후에 발견해서 후원으로 끝났다.

하지만 일라이는 교황이 되기 전에 사귄 첫 친구였다. 그랬기에 더욱 심취해 너무 퍼줬지.

그래, 첫 친구였고, 잘만 키우면 자신의 업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설마, 이럴 줄 알았겠나.

망할 신성드래곤에게 정체를 들켜 교황이 되기도 전에 내빼야 할 일이 생길 줄은. 미래를 보고 계약한 그 서약이 족쇄가 될 줄은.

어쨌든, 일라이는 아직까지 그 소원을 빌지 않았다. 물론 일라이가 그 서약의 존재를 잊었다면 상관이 없지만…….

“네가 날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그 ‘소원’ 때문이겠지!”

“큭!”

일라이의 성난 외침에 카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래, 젠장!

“네놈이 잊을 리가 없지!!”

곧 공간이 뒤흔들리면서, 일라이와 카인의 시야가 바뀌었다. 카인이 다른 곳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황궁에서 꽤 떨어진 외딴 야산이었다. 산속에 불시착한 카인은 다급히 일라이를 찾았다.

그는 꽤나 초조해 보였다.

‘만약 그놈이 골치 아픈 소원을 빌면 곤란하다.’

이러다가 자신의 힘을 빼앗아 달란 소원이라도 빌게 되면……!

끝이었다.

하필 서약의 신을 보증으로 맹세한 거라, 무시할 수 있는 계약도 아니었고 말이다.

‘이리된 이상, 계약 상대를 죽여서 서약 자체를 폐기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래.

이놈부터 처리하고, 해골왕도 처리하자!

다른 놈도 아니고, 해골왕에게 이 나라를 빼앗길 것 같나?!

“끝장을 내주마!”

작정한 듯, 산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카인은 산을 날려버리려고 했고, 일라이는 그 피해를 최소화시키려는 듯 상대의 힘을 상쇄했다.

쾅! 쾅!

그렇게 얼마나 부딪쳤을까.

숨을 헐떡이는 카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일라이, 나한테 피해를 준 건 대단하다만 숨어 있어도 소용없어. 너도 눈치챘지? 왜 네가 이 자리에서 죽을 거라고 한 건지?”

그리고 숨어 있는 일라이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카인에게 당해서?

아니다.

‘저 개놈. 내 심장에 뭔 짓을 해놨구나.’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카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뻐해! 네 해골왕의 저주를 풀어준 대신 다른 장치를 해뒀으니까!”

일라이를 즉살시킬 수 있는 자폭장치였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해골왕의 저주 대신 장치해둔 것이다.

물론 특별한 지정 키워드가 아니면 절대로 발동하지도, 제거되지도 않도록 조치했다.

잠시 후, 카인이 읊조리듯 키워드를 발동했다.

“Habent sua fata libelli.(책들에겐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

그 순간, 키워드에 반응하듯 일라이의 심장이 뚫렸다.

푸악!

“……!”

피를 토하며 쓰러진 일라이는 아이작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작이 말했던, ‘백 프로’ 죽는다는 말이 바로 이거였나……!’

반면 카인도 힘들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얼굴은 흙빛이었고,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뭐, 나도 서약을 어기는 셈이니 페널티는 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성법도 못 쓰는 이 몸에 오래 있을 생각도 없었거든.”

…뭐라고?

그럼 설마, 또 누군가에게 빙의할 생각인 건가?

그 말이 맞았는지, 카인이 큭 웃었다.

“널 죽이고, 해골왕을 없애고, 개같은 신성드래곤들도 없애고! 난 다시 업을 세워 승선한다. 해골왕 따위가 교황이 되게 가만 둘 것 같냐!”

또다시 키워드가 발동했다.

일라이의 심장이 또다시 터졌다.

‘…젠장. 성력은 쓸 수 없다.’

이미 몸을 치료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이작의 말 때문이었다.

-카인 베리트를 만나면, 절 교황으로 추천할 수밖에 없을걸요?

그래. 그 머리 좋은 놈이 괜히 그런 말을 한 게 아닐터.

순간 일라이는 아차 싶었다. 아, 설마… 이 상황을 다 예상하고, 할아비를 구해주려는 건가?

그래, 틀림없다.

이 기특한 놈.

‘그래, 만약 온다면 바로 지금쯤……’

그러나 10초.

20초.

30초… 1분.

…음.

너무 큰 기대였나?

혹시나 싶어 기운을 분출해봤지만, 아이작의 기척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니, 이 새끼. 올 생각도 없다.

마중온 건, 거지 같은 카인뿐.

“거기에 있구나? 역시 바퀴벌레 같은 성녀 핏줄. 한 방에 죽지도 않는군.”

카인이 점점 다가오자 일라이는 끄응, 나무에 기댔다. 그 와중에 피는 폭포수처럼 줄줄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나마 성녀의 핏줄이라 즉사하진 않았지만, 정말 위험하다.

…눈앞이 흐리고 어지럽다.

숨은 쉬기 힘들고… 젠장.

할아버지 죽는다, 이놈아!

추천표 필요한 거 아니었냐, 이놈아!

빨리 안 오면 진짜 할아비 죽는다!!

하지만 이 새끼는 정말 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라이는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렇게 죽나 싶을 그때-

화륵!!

“……!”

일라이의 눈앞에 처음보는 보랏빛의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이건……?’

마력의 불꽃이었다.

하지만 일개 마족의 마력이 아니다.

‘이건 해골왕의…….’

곧 죽어가는 일라이의 앞에, 마력으로 된 문구가 떠올랐다.

-할부지, 아직 살아 있죠?

그 낯익은 말씨에, 일라이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불효막심한 자식.

…그렇지만 반갑다.

‘그래도 이놈이 할아비를 살리려고 하는구나.’

곧 일라이에게만 보이는 해골왕의 글씨가 다른 내용으로 뒤바뀌었다.

-일단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용.

-소원부터 갈기시구영.

“……!”

소원이라니.

이걸 또 그렇게 하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진 않죠?

뭐, 그래. 모르진 않지.

율리오와 했던 계약에 대해서 아이작에게도 말해줬으니, 그걸 이용하라는 것일 터.

‘그다지 쓰고 싶진 않았지만.’

이리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결국 그가 읊조렸다.

“…서약의 신에게 원한다.”

그 목소리를 들은 카인이 발작하듯 움찔했다.

“안 돼!”

“…서약에 따라, 계약자에게 바란다. 계약자는 죽음으로 참회하라. 단 너는 두 번 다시 빙의도, 힘도 쓰지 못한 채 영원히 참회해야 할 것이다.”

“이 새끼!”

곧 일라이와 카인의 발밑에서 서약의 신의 문양진이 떠올랐다.

그 문양진에서 나오는 힘에, 카인은 비명을 질렀다. 소원이 효과가 있는지, 카인은 괴로워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일라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걸로…….’

하지만 그때였다.

“하. 하하하.”

카인이 웃으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꼴 좋다는 듯 친구를 보았다.

“어쩌지, 일라이? 통하지 않는 것 같은데.”

“……!”

“아무래도 내가 살아있는 몸이 아니라 피해갔나 보네. 아쉬워서 어쩌지? 개죽음을 당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컥!”

카인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몸이 썩어갔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젠장, 힘이!’

힘이 봉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약의 신의 힘은 카인의 근본 술법이라고 할 수 있는 <빙의>까지 앗아가려고 했다.

‘안 돼. 이대로면 빙의술까지 막힌다!’

카인은 급히 일라이를 보았다.

‘서약의 신의 힘이 마저 돌기 전에 계약자를 없애야해!’

중간에 계약자가 죽으면 서약은 파기되고, 이것도 무효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카인의 계획을 모를 일라이도 아니다.

그는 일찌감치 자리를 벗어났다.

성녀의 핏줄 덕분에 심장은 앞으로 몇 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목만 안 잘리고 버티면, 카인이 힘을 빼앗기는 게 먼저겠지.

그랬기에 일라이는 아이작의 지시를 기다렸다.

‘자, 아이작. 하란 대로 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그다음은…….’

-다음은 없어용. 이제 죽으세용.

…뭐, 인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