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괜찮고말고 (1)
-다음은 없어용. 이제 죽으세용.
뭐, 인마?
일라이는 제 눈을 의심했다.
지금 이 녀석이 뭐라고 했나.
뭐? 이제 뭐라고?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안심하고 죽으시라고용.
얌마, 내가 네 할애비다!!!
일라이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가슴은 이미 활화산이 되어 눈과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용암을 뿜어낼 것 같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왜 그러냐는 듯 뻔뻔했다.
-제가 ‘백 프로’ 죽는다고 이미 말했잖아요.
이 자식이?
-할아버지가 지금 상황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일라이는 눈을 감았다.
괘씸하지만 뭐, 짐작은 했다. 솔직히 일라이도 알고 있었다.
‘이건 회복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심장 곳곳에 이미 치명적인 구멍이 뚫렸고, 피는 빠져나갔으며, 몸은 차갑게 식고 있다. 교황이나 백의 추기경이라도 이건 회복시킬 수가 없겠지.
물리력이 아니라 술법으로 파괴된 심장이다보니, 아마 재생 성법도 듣지 않을 것이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겠지. 아마 청에게 짐만 될 것이다.
겨우 되살아나기 시작한 청에게 짐 덩어리가 될 순 없다.
분명 아이작도 그걸 알기에…….
-할부지. 어차피 그 몸으로는 추천 표 주러 못 와요. 그러니 그리 손자를 위해 굳이 애쓸 필요 없어요. 빨리 편안해지세요.
뭐, 인마????
설마 지금 추천 표 못 주니까 죽으라는 게냐!!
-그게 아니라, 버텨봤자 의미가 없단 거죠. 그래봐야 할부지만 고통스럽다고.
젠장, 이거 열받아서 죽으려고 해도 못 죽겠네!!
참다 못한 일라이가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는 곧 끈이 풀린 마리오네트처럼 쓰러졌다.
“쿨럭, 쿨럭…….”
아무래도 의지로도 안 되는 단계에 닥친 모양이다.
-그러니까 발악해도 소용없대도요. 걱정해줘도 말을 안 듣네.
그 말에 일라이는 흐릿한 의식으로 하늘을 보았다.
그래, 내가 손주를 차암 잘 키웠지.
기특해서 아주 눈물이 나, 눈물이.
너무 기특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려고 하네.
-그러니 해골왕하고 계약할 기회를 드릴게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에요.
일라이는 제눈을 의심하듯 문구를 보았다.
지금 뭐라고? 누구랑 계약?
설마 지금 신성제국의 고결하기로 유명한 청의 추기경한테, 마의 수장 따위와 계약을 하라고 지껄인 거냐?
-날 믿으면, 청과 청의 사람들은 내 영혼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끝까지 지켜드리죠.
“……!”
일라이는 말문이 턱 막혔다.
솔직히 아이작의 의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마족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내뱉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름을 건다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겠다는 증표였다.
그래서 해골왕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내심 가슴이 뭉클해졌었다. 해골왕을 보는 눈도 내심 달라지려 했지만…….
-참, 우리 내기 내용은 기억하죠?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뭐, 인마? 내기?
죽어가는 할아버지한테 내기이?
-아, 왜. 설득에 성공하면 추천 표를 받아 가겠다고 한 거.
…설마 이것도 설득으로 치는 거냐?
-넹.
…진짜로?
-에잉. 싫으면 나도 그냥 청을 나가버리고.
일라이는 기가 찼다.
야, 이 자식아. 이쯤 되면 이미 내기가 아니잖아. 어차피 네놈이 이기게 되어 있는 거였잖아.
‘이 천하의 불효막심한 놈.’
솔직히 이쯤 되면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는 묘하게 든든했다.
그때, 다시 한번 아이작이 보낸 글귀가 바뀌었다.
‘!’
마지막 지시까지 본 일라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넌 그런 생각이구나.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죽기 전에 해골왕의 솜씨를 직접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
-아. 근데 나도 인간이랑 계약하는 건 처음이라 잘 될까 모르겠네.
이 자식, 정말 믿어도 되는 거냐???
그때, 때마침 카인이 죽어가는 일라이를 발견했다.
“죽어라, 일라이!”
“!”
그는 마침내 일라이의 목을 치기 위해 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비틀거리던 일라이가 벼랑 밑으로 뛰어내렸고, 카인은 몹시 놀란 듯 멈춰 섰다.
그 얼빠진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며 일라이는 큭 웃었다.
그래.
이미 이 가문은 아이작, 네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구나.
하지만 이것도 뭐, 괜찮다. 이미 교황 놈한테 나라가 놀아나고 있었는걸.
저 망령 놈의 말대로라면, 청은 반드시 멸한다. 그것도 신에 의해. 그건 이미 인간인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필 해골왕이 자신들의 가문에 태어난 것에는 어떤 큰 뜻이 있는 거겠지.
그러니, 아이작.
가문을 부탁한다.
그렇게 에슈아의 97대 가주, 일라이 에슈아가 눈을 감았다.
* * *
[주인님, 벼랑 밑에서 일라이 에슈아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샤브나크의 보고에 아이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청의 가주는 죽었다.
문제는 함께 있던 그 실비 놈인데…….
[카인 베리트는 가주가 벼랑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는지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었습니다. 한참을 근처를 서성이다가 자리를 떠났습니다.]
‘좋아.’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위스퍼는 의외인 듯했다.
[저는 주인님이 가주를 구해줄 거라 생각했는데요.]
‘물론 내가 직접 가는 방법도 있긴 했지.’
하지만 그래선 의미가 없다.
‘할아버지는 거기서. 실비 놈 앞에서 죽었어야 해.’
왜냐고?
‘그래야 실비 놈이 안도하고서 수면 위로 나올 테니까.’
실베스테르.
놈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째서인지 힘을 못 써서 운이 좋았을 뿐이지, 괜히 신성제국에서 수백년동안 군주로 군림했던 놈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간 쌓아왔을 성력만 봐도 녹록치 않다. 막강한 놈이었다.
거기에 놈은 금의 신들과 교류하는 놈이니, 사실상 금의 신의 힘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아직 힘을 키우는 중이니, 정면전은 불리하고.
하지만 그 말은 또 의외네.
‘금의 신들이 교황들이었다고?’
아이작은 히죽 웃었다.
동시에 그는 왜 금의 신들이 자신을 유독 싫어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설마 나와 면식이 있던 교황놈들이어서였나?’
자식들이 서운하게 신분 좀 올랐다고, 냄새도 깔끔하게 지우고 말이야.
‘감히 우리 사이에 안면몰수를 해?’
그리고 이쯤되면 왜 놈들이 자신의 뒷통수를 쳤는지 알 것도 같지 않은가.
신들이야 뭐 몇몇을 빼곤 다 같은 놈들이라지만, 자신에게 사기 계약을 가져온건 금의 신들이 주축이 아닌가?
어쨌거나 승선 이야기는 꽤 열받으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머리좋은 일라이도 자신의 제안에 응한거겠지.
그는 이미 본인들의 선을 넘어선 일이란 걸 단번에 깨달은 것이다.
그도 그럴게 역대 교황들은 청과 사이가 안 좋았다.
하지만 금의 신들이 교황이라면, 그들이 청에게 영원히 호의적일리 없으니까. 단순히 자신들이 그 신들에게 잘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니까. 해골왕을 품은 자신들을 어떤 형태로든 멸망시킬 것임을 알았기에.
일라이도 그걸 정확하게 읽고, 신과 겨룰 수 있는 해골왕과 손을 잡은 것일터.
‘뭐, 하지만 어떤 의미론 잘됐지.’
할아버지를 설득할 겸 그를 보호하기 위해 실비와 맞붙인 것이지만, 생각보다 얻은 게 더 크다.
일단 할아버지가 놈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분명 할아버지의 소원 때문에, 그 잘난 빙의술도 막혔을 거다.’
서약의 신의 이름을 건 계약은 막강했다.
그리고 아무리 실베스테르가 승선을 노린다고 해도, 그는 아직 인간이었다. 힘이 막히는 걸 막을 수 없을 터.
‘놈의 빙의만 막을 수 있다면, 놈이 도망가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첩자가 진짜 골치 아픈 건,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디 그뿐이야?
교황은 신이 될 수 있다는 귀한 정보를 들을 줄이야.
‘이걸로 교황이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는데?’
원래 아이작은 교황이 되어 신들과 교류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엿을 먹일 생각이었다.
사실 그걸로도 만족이었지만, 이거라면 죽은 뒤에는 신이 될 수 있단 의미 아닌가?
그럼 본진에서 그놈들을 직접 조우하는 것도 가능하단 거잖아?
‘더욱 추천을 받아서 교황이 돼야겠구만. 푸헿, 푸헤헤!’
개놈들. 전부 가만두지 않겠다.
[그럼 이제 일라이 에슈아의 쓰임은 끝난 건가요?]
‘아니.’
[하지만 죽었잖아요?]
‘무슨 소리여. 내가 할부지랑 약속했잖아.’
-날 믿으면, 청과 청의 사람들은 내 영혼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끝까지 지켜드리죠.
청의 사람들엔 할아버지도 포함이야. 그러니 확실히 지켜줘야지.
‘물론 아이작이 아닌 ‘해골왕’의 이름을 걸고.’
마왕은 사악하게 웃으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거기엔 깊게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설마 교황청 지하에 이런 걸 숨겨놨을 줄이야.’
소녀는 투명한 관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사고를 당한 흑가의 공녀였다.
[여긴 교황청에서도 흑의 구역 같은데, 장소 전체에 시간을 동결하는 술법이 걸려있군요?]
‘그러게.’
개소리 말라며 사라진 흑의 추기경을 쫓아왔을 뿐인데, 이런 걸 발견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관찰하는 아이작은 씨익 웃었다.
‘할부지가 목숨과 맞바꿔 좋은 선물을 주고 가셨어. 흑의 추기경도 잘 설득하라고 말야.’
[예? 그게 무슨?]
아이작은 대답 대신 우르르 몰려 오는 사제들을 힐끗 보았다.
“네 이놈!”
“여긴 출입금지 구역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가면을 쓴 검회색 복장의 사제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곧 그들은 아이작의 얼굴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군가 했더니, 청의 소가주가 아닌가!”
“…그보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지?”
어떻게?
아이작이 씨익 웃었다.
“이렇게?”
아이작이 손을 까닥거리자 강한 풍압이 일어났다. 푸른 기운과 함께, 사제들이 비명을 지르며 벽 쪽으로 밀려났다.
“크악!”
아이작이 공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자, 흑의 사제들이 급히 공녀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고 했지만-
“니들 나와.”
“!”
아이작은 귀찮다는 듯 목을 까닥거렸다.
“니들은 그거 치료 못 해.”
뭐라고??
아이작은 한번 말로 했으면 알아서 꺼지라는 듯 사제들을 걷어찼다.
빠각! 퍽! 빠각!
“커헉!”
“컥!”
가볍게 사제들을 처리한 아이작이 곧장 공녀에게로 향했다.
태연하게 관을 열어 공녀의 목을 짚고는 상태를 파악했다. 아이작은 곧 그녀의 몸에 얽힌 마력이며, 그녀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까지도 알았다.
‘흠. 대충 그렇게 된 거구만.’
이거, 생각도 못 한 거물이 얽혀있었네. 이 정도면 진짜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간 셈인데?
바로 그때였다.
쾅!
아이작과 헤어졌던 흑의 추기경이 문을 박차고서 들어왔다. 상황을 전달받은 그는 몹시 화가 난 기색이었다.
“뭐 하는 거지?!”
그는 아이작의 목이라도 도려낼 기세였다.
“이곳은 본가의 금지구역이다. 흑의 구역에 청의 사람이 왜 들어와!”
청가 놈이 깨어나지 못하는 딸을 놀리려고 온 건가?
“신앙의 규율을 무시하는 놈이 교황은 무슨 교황! 나와! 교황을 당장 후보직에서 파직시키겠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태연했다.
“따님이 일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각하.”
뭐?
“저라면 당장이라도 따님을 살릴 수 있겠네요.”
뭐라고?
흑의 사제들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보았다. 하지만 정작 아이작은 여유로운 태도로 자리에서 낑차, 일어났다.
“아, 그런데 저는 이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여.”
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여.”
“…….”
“…….”
몇 초 뒤, 추기경과 흑의 사제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뭐가 어째?????
누가 돌아가ㄱ… 아니, 그보다-
그게 할아버지를 여읜 손주의 표정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