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괜찮고말고 (3)
카인 앞으로 한 무리가 몰려왔다.
청색을 몸에 두른 기사들, 그리고 적색을 두른 창기사들이다.
그들은 카인을 포박하려는 듯 길을 막았다.
‘청의 기사들과 적의 이단심문관들인가.’
이 새끼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보다 살해범이라니?
왜 이놈들이 알고 있는 건데?
카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라이의 죽음이 벌써 새어 나갈 리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그가 실종 처리를 하려고 한 게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술법을 써놨는데.’
일라이를 공격했던 그 순간부터, 그의 몸에 특별한 성법을 걸어둔 것이다.
일라이의 기운이 외부에 나가지 않도록, 하물며 그를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술법이었다.
죽었다는 사실조차 아직 몰라야 하거늘.
하지만 청의 기사들은 분노에 차 검을 뽑으려 했다.
“감히 가주님을!”
청의 기사들이 카인의 목을 딸 기세로 소리치자, 이단심문관들이 막았다.
곧 그들의 앞에 적의 추기경이 나타났다.
“신고를 받았다. 가주와 연락 중이던 아이작 에슈아가 범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그 말에 단숨에 모든 상황을 인지한 카인이 빡친 듯 이를 갈았다.
‘해골왕!!’
그 개 같은 놈이!
할아버지의 죽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싶더라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동시에 카인은 헉, 아차 싶었다.
‘설마 일라이가 벼랑에 떨어진 것도 놈의 수작인가?’
사실은 자살이 아니었던 건가?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일라이가 죽지 않았을까 봐.
‘이게 해골왕의 계략이라면, 그놈이 그냥 뛰어내렸을 리 없다.’
그는 초조해졌다.
징글징글 맞은 놈이지만, 그는 해골왕의 힘을 알았다. 놈은 만만한 놈이 아니다.
‘젠장. 그러면 서약신의 힘은 어찌 되는 거지?’
겨우 멈춰놓은 힘이 다시 움직이는 건가?
‘안 돼. 일라이의 영혼부터 찾아야 해!’
죽음과 관련된 건 해골왕의 특기 범위가 아닌가!
‘빌어먹을, 설마 이걸 위한 함정이었던 건가?’
갑자기 황실 뒷문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도?
그 생각에 미쳤을 때 카인은 헉, 하고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설마 신성드래곤도 일부러 당한 척한 거야?’
그래, 아마 맞을 것이다. 자신이 일라이와 만나 싸우도록, 일부러 모든 상황을 유도한 거야!
카인은 미간을 짚었다.
그 해골 새끼가 간교한 놈이라는 걸 잊었다. 평소처럼이 아니라, 더 치밀하게 접근해야 했는데.
아니지? 이건 억울하지?
솔직히 어떤 미친놈이 자기 조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나?! 그리고 어떤 미친 성직자가 해골왕과 손을 잡는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가문의 중요한 일로 이동 중이었거든요. 청의 추기경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이놈이!!!”
청의 기사들이 분노에 달려들려고 하자, 적의 추기경은 같잖다는 듯 웃었다.
“아. 그리 나오시겠다면 할 수 없지. 이쪽도 대감옥에 널 보내는 수밖에.”
대감옥이라는 말에 카인의 얼굴이 굳었다.
거기만큼은 안 된다.
신과의 교류도 완전히 끊겨버리는 제국 최악의 감옥.
영혼에 범죄자의 낙인이 새겨져 업이 사라지는 건 물론, 깊은 바다 밑에 있는 그 감옥에선 탈출도 할 수 없었다.
그 표정에 적의 추기경은 마치 악의 보스라도 된 것 마냥 푸후후 웃었다.
“네놈은 두 번 다시 태양빛을 못 볼 것…….”
“에잉, 꼬맹아. 고작 그거 가지고 되겠냐?”
“요즘 것들은 빠져가지고. 감히 주인님의 가문을 공격한 건데, 죽을 만큼 고문해서 없던 증거도 만들어내야지.”
“고작 대감옥? 사지의 두맥을 끊고, 두 눈깔을 뽑은 다음에 혀를 잘라 가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물러물러! 썩 그 자리 물러나라, 내가 할 테니!”
적의 추기경은 제 뒤에서 아웅거리는 선조들의 비난에 미간을 짚었다.
“선조님들은 제발 좀 그만…….”
도대체 자신을 어디까지 쫓아다니며 꼰대질을 할 것인가……!
그 광경을 힐끗 보던 카인이 슬쩍 뒷짐 진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곳에 있는 전원을 몰살시키는 수밖에 없다. 지금 저들이 자신을 고작 견습 사제로 얕보고 있는 만큼, 몰살은 쉽다.
그런데 그때였다.
콰직!
“커헉!”
거대한 신수 두 마리가 카인의 팔을 물어뜯었다. 분수 같은 피가 튀기고, 카인이 고통에 쓰러졌다.
뭔가 싶을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십니까? 범인이 입막음하고서 도망치려 하잖아요.”
“!”
백의 추기경이었다.
결국 술법을 쓰는 데 핵심인 팔을 다친 카인이 백의 추기경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청의 추기경께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라면 첫 신고자가 제일 수상한 거 아닌가?”
그러자 백의 추기경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고요.”
“허. 백이라면 자비를 배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러자 백의 추기경이 안쓰럽다는 듯 웃었다.
“과거 5대 신앙을 아우르셨던 분이 기본조차 모르시네요.”
“뭐?”
그녀의 웃는 눈이 지독하게 차가워졌다.
“우리 백은 동료가 아닌 자에겐 자비 따위 없답니다.”
벌레 취급하는 그 눈빛에 카인은 굴욕적이라는 듯 치를 떨었다.
이 자식들이 감히……!
* * *
그 무렵, 일라이의 시신과 조우한 에슈아 저택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가주님!!”
“할아버지!!!”
레아와 카야, 슈리. 그리고 벤야민도 충격을 받은 듯했다.
관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건 틀림없는 일라이였다.
“릴라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아버지가 왜……!”
벤야민의 질문에 일라이를 데려온 릴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작의 연락에 아버지를 찾으러 갔던 그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숙부님. 할아버지가 습격을 받으신 것 같아요.
-뭐라고?!
-연락 중이었는데, 끊어졌어요. 느낌이 안 좋아요. 빨리 가주세요.
아이작이 말한 장소 근처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을 땐, 심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청의 기사들도 충격에 빠져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살인범을 찾아라!”
그때였다.
“용의자는 이미 이단심문관에게 넘겼어요.”
“아이작!”
그들은 당황한 듯 아이작을 보았다.
“용의자라니?”
“할아버지가 흑가의 공녀를 깨워보겠다고 하시곤 나가셨었어요.”
벤야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20년 전 사고가 아니냐. 설마 아버지가 그 일에 손을 대셨다고?”
“예. 얼마 전 그 일로 흑가하고 좀 감정적으로 다투셨거든요. 그게 걸리셨나 봐요.”
[아니. 실제로는 그런 일도 없었잖아요. 흑가하곤 얽힌 일도 없었고요.]
“그리고 깨울 방법을 찾아내셨다고 저랑 연락 중이었는데, 갑자기 습격을 받으셨어요.”
“뭐라고? 그게 누구냐!”
“카인 베리트요.”
“뭐?! 카인 베리트?”
“분명 그놈이 흑가의 공녀를 살리는 걸 막으려고 것 같다고 하셨어요.”
“!!!”
[저기요. 흑가 공녀는 아무 상관 없잖아요. 가주는 그냥 주인님이 카인 베리트랑 만나보라고 해서 만난 거잖아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다들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설마. 흑가의 공녀를 그리 만든 게 금가란 의미냐? 아버지는 그 일에 휘말리셨고?”
아이작은 바로 이거라는 듯,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예.”
[와, 이걸 이렇게 뒤집어씌우신다고……?]
“저는 할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아이작……!”
“그놈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새끼는 흑가에 마수를 뻗치고, 진실에 다가서는 할아버지까지 죽였어요. 똑같이 죽음으로 참회하게 할 겁니다.”
[…이쯤 되면 실비 놈이 억울한 것 같은데.]
그때,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이해 못 하겠는데.”
“아버지!”
“형님!”
고엘이었다.
그는 아이작을 의심하듯 노려보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왜 가주께 위험이 있는 걸 알았으면서도, 굳이 흑가로 간 거지?”
“형님.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릴라이가 노려보자, 고엘이 쯧 혀를 찼다.
“멍청아, 아이작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아이작이 위험을 감지한 순간 구하러 갔으면, 아버지는 사셨을 거라는 거다. 왜 그때 흑가에 가가지고는…….”
사실 고엘로서는 이 상황이 화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교황이 되면 다음 가주는 슈리인데, 지금 이리되면 아이작이 가주가 될 판이 아닌가.
슈리가 9계위가 될 때까지만 아버지가 버티기만 하셨어도……!
하지만-
“넌 지금 애한테 뭐라는 거냐! 그리고 그리 따지면, 위치상 가까운 건 바로 너였다! 고엘!”
“켁, 윽……!”
벤야민의 공격에 고엘은 깨갱 입을 다물었다.
벤야민은 흑의 사제들이 주고 간 확인서를 보며 눈을 짚었다.
“분하지만, 살아날 가능성이 없으셨다.”
분석 결과 즉사에 가까운 처참한 상처였다.
“버티시다가 아이작에게 범인의 이름을 전달하신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잘못한 건 아버지의 위기를 파악 못 한 우리지.”
“윽…….”
그 말에 아이작은 흑흑 슬퍼했다.
“아닙니다. 고엘 숙부님 말이 맞아요. 다 제가 부족한 탓이죠.”
“아이작……!”
“그리고 할아버지는 제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셨어요. 자신 대신 흑가의 공녀를 살리라고. 우리는 약자를 지키는 가문, 그때 지키지 못했던 이를 지금이라도 지켜줘야 한다고요.”
[아니. 가주는 그딴 말 안 했잖아요.]
닥쳐.
“전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흑가 공녀를 살리겠습니다.”
[가주는요?]
‘걱정 마. 그쪽도 살릴 거니까.’
그런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아까운 인재를 버릴 순 없지.
“참, 할아버지의 몸은 절대 화장하지 마세요.”
“뭐?”
청의 장례 문화는 화장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우셨을 텐데, 가시는 길은 고통 없이 보내드리고 싶어요.”
[님이 죽으라고 했으면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많이 아프셨을 텐데… 불 속에까지 넣을 순 없어요!”
[…태우면 육신을 못 쓰기 때문이면서.]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흑흑흑.”
“아이작……!”
“흑흑, 할부지!”
아이작이 슬퍼하는 척을 하자, 가족들은 가슴이 미어진다는 듯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곧 일라이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 장로들이 침음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아이작. 지금 상황에서 꺼낼 말이 아니란 건 알지만, 차기 가주 자리가 문제다.”
“!”
“너는 현재 교황 후보다. 즉, 후계를 잇지 않는 걸 택한 셈인 거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네가 교황을 포기하고, 가주 자리를 이어주길 바란다만…….”
아이작은 슬픈 듯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제게 교황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교황은 절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따를 생각입니다.”
[와. 가주 놈 저거, 억울해서 관에서 벌떡 일어나겠네.]
장로들은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네가 후계자인 건 맞다. 그러니 차기 가주를 지목할 권한도 네게 있다. 누굴 고르겠냐?”
그 말에 아이작은 한숨을 쉬었다.
“원래라면 슈리였겠죠.”
그 말에 슈리가 움찔했다.
곧 아이작이 답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