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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272화 (272/272)

제272화 괜찮고말고 (4)

“저는…….”

아이작은 웃으면서 누군가를 보았다.

“사실 가주 자리는 가문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 오르는 게 옳다고 봐요.”

그가 바라본 이는, 다름 아닌 슈리였다.

아이작은 복잡한 얼굴의 슈리를 제법 따스한 눈으로 보았다.

그래, 심정이 복잡하겠지. 본인이 당장 9계위이기만 했어도 가주가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니까.

하물며 정당성을 논하기에도 슈리는 교황의 갈색 머리 핏줄이라고 외부인 취급받으며 배제당했다. 누구보다도 에슈아에 진심일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슈리가 늘 스스로 위축되는 이유였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보다 더 피를 깎는 노력을 하는 것도 아이작은 잘 알았다.

뭐, 어쩌겠는가. 하필 저놈 옆에 있는 게 울트라 캡숑 천재인 이 몸이라, 늘 부족해 보이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아무튼 슈리는 누구보다 가주가 되고 싶어했기에, 분하겠지만 지금도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 것이다.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아서 아이작이 웃었다.

“아시겠지만, 가문 일에 가장 애착이 강하고 진심인 건 슈리예요.”

[무엇보다 주인님의 말을 잘 듣죠!]

그래! 교황이 되었을 때 청을 내 것 마냥 다룰 수 있는 건 저놈밖에 없다고! 푸흐흐.

그러자 장로가 미간을 좁혔다.

슈리라.

솔직히 교황가의 피가 섞인 건 탐탁지 못하긴 하지만, 슈리가 가문에 진심인 건 알고 있다.

아이작을 도와 가문의 일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고 말이다.

‘무엇보다 청의 주신인 빛의 신과 계약한 게 크다.’

“하지만 추기경만 쓸 수 있는 비전은 반드시 9계위여야만 쓸 수 있다.”

“알죠. 그래서 현재로서는 당장 가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올려야 한다고 봐요.”

슈리는 크게 움찔했다.

도움이라니!

저 잘난 놈의 입에서 드물게 ‘도움이 된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라면…….

“너 설마!”

그 격한 반응에 아이작이 방긋 웃었다.

“그래. 네가 생각한 게 맞아. 지금으로선 에슈아에 제일 도움이 될 사람이지.”

그 말에 슈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역시 키나구나! 심지어 이 자리에서 말하는 걸 보면 이미 이야기까지 전부 끝난 거다.

“이 미친 새끼야! 제정신이냐!”

“저는 릴라이 숙부님이 좋다고 봐요.”

“그래, 하필 그 미친 릴라ㅇ… 쿨럭, 켈루켉! 뭐?”

아이작은 슈리의 반응에 푸헤헤헤 웃었다.

졸지에 숙부를 욕할 뻔한 슈리는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 날 가지고 논 거구나???’

정작 릴라이도 당황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얼핏 들었었는데. 키나를 생각한 거 아니었느냐?”

“에이, 숙부님도 참. 이 조카가 바보는 아닙니다. 키나 베리트를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청의 기사들이 따를까요?“

아이작은 힐끗 뒤를 보았다.

“실제로 장로님들 보세요. 지금 기절 직전이잖아요.”

장로들과 기사들은 뭔 소리였냐는 듯 파르르 떨면서 거품을 물고 있었고, 벤야민도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트린 채 넋이 나갔다. 레아 또한 끔찍하다는 듯 미간을 짚고 있었다.

“키나가 청의 가주라니, 끔찍해…….”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슈리를 자극해서 수련시킬 목적이었던 거였지, 키나는 청의 가주로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작은 키나를 금의 추기경 대체자로 생각하고 있다. 다섯 추기경의 지지를 받아야 교황 자리가 편안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사제 새끼들이 툭 하면 밥그릇 싸움한답시고 교황한테 지랄할 것 아냐.’

[그 전에 이미 풍기문란죄로 봉기를 일으킬 것 같긴 합니다만…….]

그러자 릴라이는 난처해했다.

사제직을 버리고 성기사가 된 시점에서, 가주의 뜻은 이미 버렸던 그였다.

“차라리 셋째 칼리야 형님은 어떠냐. 이번에 저주도 풀리셨고, 어머니의 힘을 가장 짙게 물려받아 능력도 뛰어나시다.”

그 말에 아이작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뭐? 멜리사의 힘?!

지금 해골왕 목 따일 일 있어?!

아이작은 칼같이 잘랐다.

“병석에 누워있던 사람이 갑자기 가주가 된다고 하면, 다들 불안해할 겁니다.”

“아니. 나는 아직 부족한 게 많고.”

“싫음 마시고요. 키나한테 맡기면 되거든요?”

“…아니. 내가 잘못했다.”

릴라이가 돌아서는 아이작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잡았다. 그도 키나만큼은 싫은 모양이다.

“그럼 결정됐네요. 차기 가주는 릴라이 숙부님으로.”

[이걸로 괜찮으십니까? 슈리로 점찍은 거 아니셨나요?]

‘릴라이 정도면 괜찮아. 릴라이라면 누구와 다르게 날 교황으로 추천해줄 거거든! 푸캭캭캭!’

어디 그뿐인가?

‘조카 팔불출이라 내 적들도 알아서 처리해줄걸?’

[그래도 슈리보다는 다루기 까다롭지 않나요? 숙부와 조카로서 갈등을 빚을 일도 있을 것 같은데.]

‘할부지 유언이라고 하면 장땡이야.’

[…솔직히 가주, 일부러 죽인 거 맞죠?]

어허. 새끼가 말이 심하네.

내가 할부지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재산이 내 예상보다 더 많아서, 어디에 쓸지 밤새 고민해도 안 되겠더라.’

[일부러 죽인 거 맞져?????]

‘그리고 내가 장담하는데, 릴라이는 가주 자리에 오래 안 있으려 할 거야.’

[예? 그게 무슨 의미…….]

‘곧 알게 돼.’

아이작은 속으로 웃으며 장례를 지시했다.

‘자, 그럼 나는 할아버지를 구하러 가볼까.’

[구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러엄. 내가 괜히 계약을 들이밀었는 줄 아냐?’

인간들의 영혼은 죽으면 신의 품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가거나, 둘 중 하나다.

지옥에 간 영혼이면 자신이 훔치기 쉽지만, 추기경쯤이면 지옥은 말도 안 되고.

‘그럼 당연히 신의 손으로 갈 텐데. 미쳤다고 신들한테 그 좋은 할아버지의 영혼을 주냐?’

죽기 전 악마와 계약을 한 만큼, 그 영혼은 아이작의 소유가 된다. 뭐, 쉽게 말해 중간에 가로채기한 거다.

‘이미 악마와 계약한 시점에서 할부지는 끝났어. 그 영혼은 이제 도망 못가 . 이제 내 거라고. 큭큭.’

[어우, 가주 놈. 진짜 관짝 열고 나오겠네…….]

‘아니지. 오히려 할부지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거든?’

[예?]

‘인간은 죽어서 신의 품에 간다고 했잖아.’

[그랬죠.]

‘할아버지는 악신의 노역장에 보내질 예정이었어. 끌려갔으면 평생 지옥 같은 노역을 했을걸?’

[헐. 명예로운 추기경인데요? 신의 종자가 그런 벌을 받는다고요??]

‘실비 놈 짓이겠지. 본인이 신이 된 후에, 구해주는 척 쉽게 데려올 수 있게 수를 쓴 거야.’

쓸 만한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신의 종자가 되기도 한다.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이지.

‘추기경들이 잡으러 갔으니 실비 놈이 지금쯤 내 계획인 걸 알아챘을 거거든.’

[그럼…….]

‘그래. 지금쯤 눈에 불을 켜고 할아버지 영혼을 찾고 있을걸? 다시 처리하려고.’

그러니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잘 숨겨놔야지.

그럼 할부지를 맞이하러 가볼까.

* * *

‘빌어먹을. 이건 뭐냐.’

일라이는 머리가 아팠다.

그러니까… 대충 자신이 죽었다는 건 알 거 같았다. 마지막 순간,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는 벼랑으로 뛰어내렸으니까.

온몸이 찢기고, 후두부가 박살 났지. 그 후유증이 머리로 몰려오는 것 같다.

그래서, 왜 그딴 미친 짓을 했냐고?

아이작이 마지막에 보낸 메시지가 이런 것이었으니까.

-이제 벼랑으로 뛰어드세요. 망령이 죽이기 전에 먼저 죽는 겁니다. 나만 믿으면 꼭 살려줄게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니까.

그 말에 아이작의 계획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율리오한테 죽으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겠지. 그래서 먼저 죽고, 해골왕의 도움을 받아 살아나는 방법을 택한 거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직자가 마왕을 믿다니. 내 팔자야…….’

해골왕과 계약한 게 꿈인가 싶었지만, 꿈은 아닌 듯 눈앞에 익숙한 문자가 떠올랐다.

해골왕이 보내온 마력 문자였다.

-할아버지께. 이걸 보고 있다면 깨어났다는 건데, 깜짝 놀랐죠?

-할부지 몸은 현재 심장이 너무 망가져서, 아무리 나라도 고쳐놓는 데 한 달쯤 걸릴 것 같거든요? 그때까지의 임시 몸이에요.

임시 몸?

이 새끼가 설마 스켈레톤 안에 쑤셔 박은 거냐? 뭐 이리 사후경직 마냥 뻣뻣해?

-참, 몸 주인한테는 허락받았으니 걱정 말고요.

“……?”

몸 주인이라니??

스켈레톤의 허락인가 싶었더니, 갑자기 천진난만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서 울려 퍼졌다.

[꺄아, 정말 청의 추기경님이세요??? 정말로 정말로? 저 진짜 팬인데! 꺄악!]

…뭐?

[제발 부탁드려요! 저 좀 도와주세요!]

동시에 본인이 어디에 들어왔는지 깨달은 일라이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뭐냐. 이거 어찌 된 거냐?!

설마 이거… 흑가의 공녀 몸이냐?! 어?

그러자 문자가 이어졌다.

-별건 아니고. 내가 잠깐 공녀의 몸 상태를 확인해 봤거든요? 그런데 공녀의 영혼이 바로 옆에 있지 뭡니까. 몸에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데, 육신에 마기가 너무 쌓여서 들어가질 못해 옆에서 훌쩍거리고 있더라고요. 아이고 안쓰러워 어째.

…뭐가 어째?

-외부에서는 마기를 빼기 느무느무 힘들어서. 하지만 할부지라면 청의 성법으로 신체의 마기쯤이야 쉽게 정화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몸으로 운기조식이든 뭐든 해서, 마기 좀 날려보라고요. 애가 집 들어갈 수 있게.

……뭐, 인마? 뭘 하라고???

운기조식이 뭔데??

-어차피 몸을 고치고 있는 동안, 우리 할아버지 갈 곳도 없거든요? 쉬는 김에 청의 신앙의 수장답게 공녀도 좀 살려주세요. 흑가의 일은 청의 업보인 셈이라 할아버지도 찝찝하셨잖아요.

뭐????

-뭐, 하는 김에 공녀인 척, 흑의 추기경을 설득해서 날 교황으로 추천하게 하면 더 좋구. 사실은 이게 더 본론이기도 하고.

잠깐…….

-아무튼, 그거 해결해주면 원래 몸으로 돌려줄게여.

[저 이제 드디어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아이작 님과 가주님만 믿으면 되나요?]

-참, 흑의 추기경한테는 들키면 안 되는 거, 알져?

모든 상황을 인지한 일라이가 핏대를 세웠다.

이, 미친 손자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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