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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시키는 대로
“넌 뭐야?”
“아~~. 전 남편분이시구나.”
웬 놈이 아랫도리에 수건만 걸치고 욕실에서 나오며 날 반겨준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놀라서 허둥대지 않나?
일단 더 급선무부터.
“그년은 어디 있어?”
“근데 왜 말을 놓고 그러실까. 거 알만하신 분이.”
자세히 보니 나보다 어려 보인다.
“자기이이. 배달시킨 거 벌써 왔어? 이걸로 계산해. 자기 돈 쓰지 말고.”
이지영.
내가 다시는 ‘지영’이란 이름 쓰는 여자랑 엮이나 봐라.
첫사랑에 실패한 것도 손지영, 회사에서 짜증 나게 까부는 것도 차지영. 앞으로는 지영만 보면 무조건 걸러야겠어.
가만 저 카드.
시발 내 한국카드잖아.
손에서 카드를 낚아챘다.
내 집에서 내 카드까지 그건 못 참지.
“둘 다 나가.”
“니가 뭔데? 무슨 권리로?”
“긴말 필요 없고 꺼져.”
“내 집이야. 내 집.”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이밀며 자기 집이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통한다.
띠띠띠.
“여보세요 112죠. 남의 집에 곧 이혼 예정인 여자랑 그 내연남이 안 나가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거 무슨 죄죠? 퇴거불응이었나.”
“하하하하.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일단 전화 끊어.”
“네. 당장 와주세요. 주소도 불러드리겠습니다. 동탄 ···.”
동탄은 인터넷에서 조롱당하는 도시다.
인간 ATM으로 여자한테 돈 가져다 바치는 호구들의 집합소라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퐁퐁남’이라던가.
월급 헌납하고 내무부장관에게 용돈 쥐꼬리만큼 얻어쓰면서 설거지까지 도맡는 남자를 그렇게 부른단다. 한때는 웃고 넘겼지만 이제는 아니다. 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사실 112 안내원은 그런 일에는 경찰이 출동할 수 없다면서 일단 사건이 발생하면 그때 다시 전화해달라며 아까 끊었다.
“네. 지금 당장 부탁드립니다.”
“서지오 씨. 그쪽이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이 아파트 내 명의야.”
잠깐.
내가 잘못 들었나?
“무슨 개소리야?”
“미국 출장 가 있는 동안 내 앞으로 돌려놨어. 위자료 미리 받아둘 겸해서. 다행이지 뭐야. 그쪽이 사고 쳐서 빚쟁이 되기 전이니까. 나한테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설마?
이 미친것이 내 인감으로 도대체 무슨 짓을?
“시발 개 같은.”
찰칵.
내연남이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지금부터 전부 찍습니다. 하시는 말과 행동들은 모두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요. 저라면 냉정하게 머리를 식히고 일단 지금 이곳을 벗어날 겁니다.”
“서지오 씨. 이 분 변호사야. 그러니 충고 듣는 게 좋지 않겠어?”
아주 지독한 것들에게 걸렸구나.
“내가 대출까지 받고 죽을 고생하면서 마련한 집을. 바람피워서 애까지 낳은 주제에. 그것도 둘씩이나. 도대체 넌 인간이긴 한 거냐?”
“어? 하나 아니었어요? 난 딸 한 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둘이야 이 병신아.”
“그게 지금 중요해? 중요한 건 서지오 씨 그쪽과 그쪽 집구석이 성격 차이로 날 힘들게 했고 엉뚱한 곳에 투자한답시고 우리 돈을 전부 날렸다는 거야.”
대꾸할 가치도 없다.
넌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잖아. 우리가 아니라 내 돈이다.
어지간한 빨래는 전부 세탁소에 맡기고 매일 배달 시켜먹으면서 그게 왜 니 돈이야?
“변호사. 계속 찍을 거야?”
“힘으로 싸우면 제가 질지도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서 찍어야죠. 전 여기서 빠질 테니 나머지는 두 분이 알아서 하세요.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저 새끼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니 잠잠해지면 백프로 다시 연락한다에 내 전 재산, 아니지 이제 남은 것도 없구나.
“어딜 도망가려고. 날 지켜줘야지. 동탄에서 매장당하고 싶어? 고객을 유혹해놓고 이제 와서.”
“유혹이라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 사적으로 잠시 친분을 쌓은 것뿐입니다. 공사는 구별하자고요. 그리고 유혹은 사모님이 먼저 했잖아요. 그것도 총각인 저를.”
구역질 나는 것들이네.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
지금 이년놈을 조지는 것보다 아파트가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건지 그게 더 중요해.
“변호사니까 좀 물어볼게. 내 집 명의가 넘어갔다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야?”
“직접 다른 변호사 찾아서 상담하세요.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야겠다. 어떻게 마련한 아파튼데.
개같이 일하고 안 먹고 아껴가면서 대출금을 거의 다 갚았다. 그런데 이 피 같은 목숨줄을 홀라당 저 것한테? 말도 안 되지. 빚쟁이들한테 뺏기면 차라리 억울하지는 않겠다.
“당장 내 이름으로 원상복구 시켜놓을 변호사부터 찾아야겠어. 옷 입은 놈으로.”
“내가 받을 위자료랑 퉁치는 걸로 해.”
“퉁?”
주둥아리가 퉁퉁 부을 때까지 패고 싶지만 내 남은 인생이 더 소중하다.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정말로 물어주느라 집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어.
정신 바짝 차리자. 법보다 주먹이 가깝지만 돈은 훨씬 더 가까이 필요하다.
좃과 뇌가 싸우면 항상 후자가 패배했다.
그래서 이지영이라는 여자와 결혼까지 했고.
왜 그땐 몰랐을까. 알 리가 없지. 아니다. 알았더라도 그땐 아랫도리가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지.
뇌가 시키는 대로 가야 살아남는다.
“집은 포기하는 걸로 알아둘게. 나도 양심은 있는 여자야. 원래대로라면 아이들 성인 될 때까지 양육비도 받아야 하지만 그건 내가 양보하고.”
휘말리지 말자.
대화와 타협은 인간끼리 하는 것.
짐승에게 인간의 도리를 논하는 건 시간 낭비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반드시 집을 되찾는다.
필요한 짐부터 챙기자.
띠링.
[(광고) 축하합니다. 한국카드 특수 광고대행업체에서 제공하는 스페셜 캐시백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서두르세요. 마감까지 캐시백 혜택을 결정하지 않으시면 ···. (더 보기)]
해도 해도 너무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네.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번호는 분명 걸어봐도 안 받을 테고.
한국카드 고객센터로 전화부터 걸었다.
[여보세요.]
[네. 좋은 오후 되세요. 항상 고객님을 응원하겠습니다. 한국카드입니다.]
[제가 지금 한국카드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 카드에 캐시백 혜택이나 이벤트가 있나요?]
[기본 한국카드 포인트가 제공되고 있습니다만 따로 캐시백 혜택은 없습니다. 다른 문의 사항은 없으십니까?]
[스팸이 계속 와서요. 무슨 광고대행업체라면서.]
[네. 고객님. 스팸 문자 때문에 많이 힘드셨죠? 저희 한국카드는 고객님의 광고 수신 동의가 없이는 어떤 홍보나 광고 문자도 발신하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정보가 다른 경로로 누출된 적 없으신가요?]
[알겠습니다. 하여튼 캐시백 이벤트라는 건 없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고객님.]
[알겠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역시 불법 스팸 문자가 맞네.
아까 번호랑 이번 번호 둘 다 신고하고 차단했다.
하지만 분명 또 오겠지.
아예 ‘캐시백’이라는 단어 자체를 스팸 등록해놨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가지 몇이 전부다.
다 새로 살 수는 없지. 이제부터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
일단 심호흡부터 하자.
불과 몇 시간 전 죽으려고 했던 게 어이없네.
그래. 앞날이 창창한데 죽긴 왜 죽어.
아파트 팔아서 빚 일부 갚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으면 되지. 저년한테 위자료는 오히려 내가 받아야지. 그걸로 빚 갚는데 보태자.
“잘 가. 다음에는 법정에서 보겠네.”
“지랄하고 있네.”
“교양 없는 건 집안 내력인가 봐.”
이게 아까부터 계속 우리 집을 들먹거리네.
“너네 엄마한테 물어봐라. 친아빠 맞는지. 너네 집안 내력은 그거 같던데.”
“뭐야? 지금 말 다 했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사이가 좋으신데. 너희 집구석 같은 줄 아냐?”
“그러니까 지금 전화해서 확인해봐. 유전자 검사하든가.”
“좋게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두고 봐라. 넌 내가 이혼소송에서 통장에 한 푼 남은 거까지 싹 다 토해내도록 만들 테니까. 교양 없고 무식한 집구석에서 자란 인간이랑 결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현실 인식이 전혀 안 되는 물건이다.
세상의 상식은 알 바 아니고 머릿속에 든 자기 기분이 모든 일의 판단 기준.
저런 것과 결혼까지 해서 엮인 내 업보구나.
“그러고 싶으면 판사도 꼬셔야 할걸. 여자 판사 걸리면 이참에 여자도 꼬셔보든가.”
“자 두 분 그만하시죠. 선생님은 가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 선생님으로 바뀌었냐. 아랫도리를 수건으로 가리다가 바지를 입으니 호칭까지 달라진다.
“너희들은 계속 그렇게 좃대로 사세요.”
지금부터 난 뇌가 시키는 대로 살련다.
필요한 건 다 챙겼다.
전용면적 84제곱미터 아파트야. 기다려. 아빠가 곧 널 되찾아올게.
띠링.
[(광고) 축하합니다. 한국카드 특수 광고대행업체에서 제공하는 스페셜 캐시백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오직 고객님께만 드리는 특별한 혜택. 서두르세요. 한국 시간으로 오늘 밤 자정 마감 시한이 얼마 남지 않···. (더 보기)]
스팸 신고에 ‘캐시백’ 단어 차단까지 해 놨는데.
도대체 무슨 놈의 스팸이 이걸 뚫고 들어와.
돌아버리겠네. 더 털어먹을 것도 없는 이 몸을 얼마나 집요하게 해 처먹으려는 건지. 어떤 인간들인지 내가 잡기만 하면 아주.
아니지. 지금 내가 이런 스팸 하나 때문에 화낼 여유는 없다.
당장 오늘 밤 잘 곳부터 정하자.
벌써 저녁때다. 아버지나 어머니한테는 도저히 못 가겠고. 어차피 알게 되실 거지만 최대한 늦게 알려드리자.
할 수 없네.
미안하지만 또 남궁형 신세를 져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