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4화 (4/65)

────────────────────────────────────

────────────────────────────────────

참 잘했어요

“서 과장도 알다시피 회사라는 게 그렇잖아. 비밀이 없다는 거. 소문 듣고 깜짝 놀랐어. 물론 나야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

관심이 없기는.

직원들끼리 얘기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끼어들어서 사소한 정보라도 안 놓치려고 안달이면서.

“오해는 하지 마. 알고 있으라고 해주는 말이야. 온 회사가 다 아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으면 그것만큼 바보 되는 것도 없잖아.”

“알겠습니다.”

“이혼. 아니다. 내가 무슨 남의 가정사에. 요즘 그런 남자들도 있더라고. 남의 자식이지만 자기 새끼처럼 키우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거 완전 등신이야. 우리끼리 얘기지만 서지오 씨도 솔직히 그런 스타일은 아니잖아.”

“이혼하게 되면 제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마워. 직원들 가정사까지 간섭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래도 인사 관리 차원에서 알고 있는 게 좋지. 이혼했다고 무슨 불이익 있고 그런 건 전혀 없으니까 안심해. 영업 2팀에 김 과장도 얼마 전에 이혼했다더라.”

그 녀석이야 지가 바람 피우고 다녔으니 그럴 만했지. 이혼하면서 싹 다 털리고 몸만 빠져나왔다던데. 양육권도 당연히 와이프가 갖고. 걔는 그래도 친자식이긴 하겠지.

사무실로 돌아오니 모두 출근해 있었다.

이 부장이랑 담배 피우고 같이 들어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오늘은 일제히 시선이 쏠린다.

“자자. 일들 합시다. 9시 지났네. 차지영 씨. 전파인증 신청한 거 어떻게 됐어요?”

“되는대로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계속 수고해요.”

신청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냐.

차지영 저거는 하여튼 진짜.

10을 시키면 0.1만 해 놓고 나머지는 알아서 어떻게 되겠지 라면서 손을 놔버린다.

최소한 어디까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진행 상황은 체크해 봐야 할 것 아니야. ‘되는 대로’라니 편의점 알바가 ‘거기 없으면 없어요’랑 뭐가 달라?

한마디 하려다가 관뒀다.

처음 한두 번이지 그때만 ‘예예’거리고 끝이다.

강 상무 부인 고교 동창 딸인 데다 이 부장이 강 상무 라인이라 어지간한 대형 사고 치지 않는 이상 짤리지도 않을 것이다.

우우우웅.

[변호사 번호~~.. 얘기해 놨으니까 전화해 봐~~..]

[형 고마워. 물결은 하지 마. 나이 들어 보여. 마침표도 2개씩 찍지 말고.]

[시른데~~.. 아침부터 킹받게 하지 마라~~..]

끔찍하다. 어디서 급식체랍시고 어린 애들 말투는 배워가지고.

변호사 상담이 오래 걸릴까?

문자에 적힌 로펌 번호를 검색해보니 마침 회사에서 많이 멀지는 않다.

점심시간에만 잠깐 다녀오면 좋겠는데.

오후 반차를 쓰면 되긴 하지만 눈치가 보인다.

이혼한다고 회삿일을 소홀히 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싫고.

이혼도 이혼이지만 사실 빚쟁이들이 회사로 전화 올까 봐 그게 더 걱정이다.

사채 땡겨 쓴 건 아니니 당장 터질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자를 못 갚기 시작하면 결국 언젠가는 벌어질 일.

하아아. 내가 왜 쓸데없는 욕심에 눈이 멀어서.

“부장님. 오늘 오후 반차 쓰겠습니다.”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만날 분이 계셔서요.”

“변호사?”

꼭 굳이 그렇게 티를 내야겠냐?

그냥 ‘알았다’하고 넘어가지. 반차 쓰는 게 이렇게 눈치 보여서 원.

원래 대로라면 점심도 먹고 들어와서 2시까지 꽉 채우고 나갔어야 했다.

하도 불평불만이 많으니까 지금처럼 12시 되면 나갈 수 있게 바뀐 게 작년이다.

유도리 없는 회사라고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졌으니 전형적인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지.

도대체 이놈의 회사는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망하지 않고 여태 돌아가는 게 신기하다.

이 부장이 변호사라고 물으니 또 온 직원이 나를 쳐다본다.

“과장님. 제 동기 중에도 변호사 많은데요. 제가 소개시켜 드릴까요?”

“호창씨 말은 고맙지만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언제든지 말만 하세요. 아시다시피 제가 발이 좀 넓잖아요. 변호사도 아무나 고르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전관이 제일 좋고. 그 담에는.”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김 대리.”

“네?”

“1절만 해.”

김호창의 표정이 굳는다.

과장 직함까지 달았는데 부하 직원들 눈치나 보고 살아서야 되겠냐.

좋게좋게 대하면 호구 취급,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하면 사이코패스 취급.

호구보다는 사이코패스가 되는 게 낫지.

내가 출장 가 있는 동안 얼마나 신나게 날 씹어댔을지 짐작이 간다.

“어서 가봐. 무슨 약속인지 모르겠지만.”

“내일 뵙겠습니다.”

오랜만에 혼자서 점심을 먹었다.

변호사랑 초면에 점심을 같이 먹는 건 너무 부담됐다. 약속은 오후에 잡았다. 암만 생각해도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상담을 마치고 오는 건 도저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사람이 마음이 조급해지면 괜히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지. 느긋하게 상담을 받아야 해. 내 인생과 아파트가 걸린 중요한 일인데 고작 1시간 안에 상담이라니. 애초부터 너무 과욕이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주위가 신경 쓰이네.

개인 변호사를 알아봐달라고 할 걸 그랬나.

로펌 변호사면 더 비싸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할 수 없지.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다. 일단 만나나 보자.

“변호사님이 금방 오시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통화가 길어지셔서요. 5분 내로 오시겠답니다.”

안내를 받고 어느 조그만 회의실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로펌이라고 다를 줄 알았는데 우리 회사랑 별 차이도 없네.

안내데스크 직원은 오히려 우리가 더 예쁘던데.

똑똑.

“네. 들어오세요.”

금방 오네. 맞이하려고 일어섰다.

저절로 헉 소리가 날 뻔했다.

“안녕하세요. 김지영입니다.”

이름 때문에 한번 놀라고.

변호사가 과연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싶어서 두 번 놀랐다.

“선생님께서 여성 변호사를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저희 회사에는 여자가 저뿐이라 제가 담당하게 됐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제 약력을 우선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

이것저것 화려한 스펙을 상세히 읊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은 미모도 스펙이잖아.

댁은 이미 고시 3관왕급인데. 다른 스펙이 전혀 필요 없을 외모다.

“제 명함입니다.”

“서지오라고 합니다.”

명함을 주고받았다.

어쩌지?

‘이름 때문에 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오해를 사기 딱 좋은데.

소개받은 경우는 이런 게 난감하다.

남궁형만 아니었으면 당장 뒤돌아 나왔을 텐데. 어차피 저 변호사를 두 번 볼 것도 아니고.

내 표정을 살피는 게 확실하다.

“무슨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사실은 이혼하려는 상대 이름이 지영이라서요.”

“워낙 흔한 이름이죠. 저도 학교 다닐 때부터 많이 겪었습니다.”

그랬겠지. 우리나라 국민 핸드폰 주소록에 ‘지영’이 최소 2명씩은 있겠다.

너무 예쁘다고 거절하는 건 더 웃기지.

이 정도 규모의 로펌에서 근무하는 걸로 봐서는 능력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이는데.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세워놓은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좀 그렇지만 클라이언트 중에서 오해하시는 분들도 가끔 계세요.”

“뭘 말씀이십니까?”

“여자 변호사니까 아무래도 능력이 떨어진다 아니면 고객 끌어모으려는 간판으로 고용됐다는 오해들 말입니다.”

“아 네.”

“물론 전혀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제가 인터뷰한 회사들 중에서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는 곳으로 왔을 뿐입니다. 오히려 저희 업계 나이 드신 대표님 중에서는 여자 변호사를 기피하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같이 일하는 게 불편하다면서요.”

일단 왔으니 시간당 상담비는 벌써 카운팅되기 시작했을 테고. 1시간에 30만 원이나 되는 거액이다. 상담까지는 하고 보자.

“알겠습니다. 오늘 상담을 받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마당처럼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오기 전에 최대한 짧게 스토리를 준비했다. 최대한 상세하지만 간략하게.

“그러셨군요. 지영이란 이름에 트라우마가 걸리실만하네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취합한 바에 따르면 선생님 소유의 부동산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바로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재판이란 게 백퍼센트 장담을 하면 안 되는 거지만 그분 같은 케이스는 요즘 정말 드뭅니다. 감히 시도조차 안 하거든요. 수십 년 전에는 아내가 남편 몰래 부동산 팔아치우는 판례가 꽤 흔했습니다.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런데 그 여자는 왜 겁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간이 배 밖에 나왔거나 미친년이겠지요.”

역시.

괜히 변호사가 아니네.

간지러운 곳을 정확하게 긁어준다.

섹시한 외모의 여자 변호사가 미친년이라고 해주니 지릴 뻔했다.

사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이 김지영이라는 변호사에게도 사건을 확실하게 맡겨야겠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알릴 생각이었는데.

사람끼리는 느낌이란 게 있잖아.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아니면 이상하게 짜증 난다 등등.

그런데 이 여자는 기분이 좋다.

지금까지의 다른 지영들과는 전혀 다르다.

처음에는 외모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성격이 오히려 시원시원한 상남자다.

대화 중에 메모 중인 종이를 살짝 훔쳐봤다.

내용을 본 게 아니라 글씨체를 체크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정성 들여 쓰는 여자였다.

간단한 메모지만 급하게 휘갈기지 않는다.

믿고 일을 맡길 만하겠어.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좋은 사람에게 소개받으면 몇 다리를 거치든 이상하게 역시 좋은 사람으로 연결되더라고.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요?”

“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이지영 몰래 한 게 있습니다.”

“···.”

핸드폰을 꺼냈다.

사회 생활하면서 느낀 거지만 무조건 반드시 백 프로 항상 늘 언제나.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믿어야 할 건 확실한 물증뿐이다.

“녹음을 해왔었습니다.”

“아까 쭉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럼 혹시 분량이?”

“SD카드 512기가짜리를 준비했습니다. 3개를요. 인터넷 클라우드에 이중으로 백업도 해 뒀고요. 저와 이지영 둘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모든 상황을 녹음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이지영 몰래요.”

김지영 변호사가 의자를 뒤로 젖히고 팔짱을 낀다.

“선생님.”

“네?”

“그게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지 선생님은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