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5화 (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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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너나 해라

상쾌한 마음으로 변호사 선임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저희 회사를 선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쪽 무릎이라도 꿇을듯한 분위기였기에 오히려 내가 황송했다.

“쉽지 않으시겠지만 느긋하게 기다리셔야 합니다. 단순한 이혼 사건이 아니라 친생 부인과 이전 등기 말소까지 얽힌 복잡한 소송이 될 겁니다. 최소 1년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1년이요?”

역시 쉬운 일은 없구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그 여자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절대 호락호락하게 양보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지.

법대로 합시다.

갈 때까지 가보는 거야.

녹음된 SD카드를 김지영 변호사에게 맡겼다.

나는 따로 인터넷에 보관하고 있으니 됐고.

앞으로도 이지영 몰래 녹음은 계속할 것이다.

휴대폰 기본 녹음 어플 말고 가장 손쉽고 조작이 간편한 어플을 다운받아서 여러 차례 미리 실험을 해봤다.

버튼 한두 번만 누르면 곧바로 녹음이 시작되는지. 시작할 때 알림 소리가 뜨지는 않나. 용량은 얼마나 차지하며. 자동 저장은 되는지 등등 꼼꼼하게 따졌다.

“우선은 소장 부본. 그러니까 쉽게 설명드리자면 선전포고문을 상대에게 전달할 겁니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보내고요. 그거 왔다 갔다 하는 데만 몇 주 걸립니다.”

더럽게 오래 걸리네.

변호사는 그걸로 먹고 사는 거긴 하지만.

이러니 사람들이 재판하다가 화병 걸리지.

소송 3년만 하면 사람 돌아버린다던데.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악수를 나누고 로펌을 나왔다.

뭔가.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기분이다.

지금까지의 나와는 전혀 다른.

티비에서만 보던 이혼이 드디어 내 일이 됐다.

의외로 담담하다.

그렇게 극적이지도 처량하지도 않고.

차 막히기 전에 빨리 귀가해야겠네.

반드시 내 아파트를 되찾고야 말겠어.

**

“좋은 아침.”

“어제 일은 잘 되셨어요?”

김호창 대리는 여전히 내 일에 관심이 많다.

실시간으로 사랑과 전쟁을 옆에서 라이브 감상하고 있는 걸까.

굳이 대꾸할 필요도 못 느낀다.

“김 대리. 근데 전파인증 신청한 거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야?”

“그거 차지영 씨가 신청해서 잘 알텐 데요.”

그럼 너는 전혀 모른단 소리냐?

고속 충전기 수요가 갈수록 늘어날 거라고 예측해서 내가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아이템이다.

어차피 그게 대박 터진다고 내 월급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책임감은 느껴야지.

중국 판매 사이트를 뒤지다가 괜찮은 충전기를 발견해서 안건을 올렸더니 수입 판매하기로 결정됐다.

인증을 받아야 다음 달 통관이 되는데 아직까지도 안 되면 어쩌자는 거야?

“차지영 씨 출근하면. 아니다. 관두지.”

9시가 다 되어 가는데 차지영은 아직 출근 전이다.

“방금 지영 씨한테 문자 왔는데요. 차가 막혀서 조금 늦겠답니다.”

흐흐흐흐.

늦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문자를 보내려면 부장이나 나한테 보내야지 왜 김 대리한테 보내?

둘이 사귀냐? 그럴 분위기도 전혀 아니던데.

“차지영 씨 늦는데?”

“네. 부장님.”

“일찍 일찍 다닐 것이지. 난 한 대 피우고 올게.”

“네. 다녀오세요.”

회사 꼬라지 참 잘 돌아간다.

100대 기업이면 뭐하냐.

현실은 조금 큰 규모의 보따리상일 뿐인데.

부장이 대놓고 차지영을 오냐오냐하니까 기강이 개판이 됐다.

뚜우우 뚜우우.

9시 갓 넘긴 시간이라 혹시 안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직원이 바로 받는다.

[안녕하십니까. 미주그룹 영업 3팀 서지오 과장입니다. 저희가 저번에 신청한 전파인증 진행 상황 좀 알아보려고요.]

[아 네. 신청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번호를 불러주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음악이 흘러나온다.

담당자가 지금 자리에 없네 어쩌네 하면서 시간 안 끌어서 좋네.

[방금 확인해 봤습니다. 이건 저희가 보완이 필요해서요. 따로 이미 보완 제출해달라고 연락을 드렸는데요.]

이게 무슨 소리야?

[네? 언제 보내셨습니까?]

[저번 주 초입니다.]

열흘 전이잖아.

[죄송한데요. 그럴 리가 없거든요. 한 번만 더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신청 번호를 다시 불러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직원이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분명히 기재된 연락처와 이메일로 보완 요청을 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싸하다.

공무원이야 곧이곧대로 일을 처리했을 테니 잘못될 리는 없고 분명히 차지영 이것이 뭔가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뚜우우 뚜우우. 뚜우우 뚜우우.

안 받아?

띠링.

[곧 도착해요.]

[전파인증 신청 보완 요청 저번 주 초에 왔다던데.]

왜 곧바로 답이 없지?

더 불안하잖아.

20분 뒤에 차지영이 도착했다.

“어떻게 된 거야?”

차지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죄송해요.”

“전파인증 내가 방금 전화해봤어.”

“어쩌다 보니 제 개인 이메일로 신청서를 보냈어요. 하필 잘 안 쓰는 메일인데. 지금 확인해보니 와 있더라고요. 저는 당연히 허가 날 줄 알고. 번호도 제 개인 핸드폰 번호를 적어 버렸고. 모르는 번호라 안 받았던 것 같아요.”

씨발.

“문자는 왔을 거 아니야.”

“스팸함에 들어왔을 텐데. 저는 스팸은 확인 안 하고 전부 삭제하거든요.”

얘 결국 큰 사고 치네.

들어올 때부터 묘하게 거슬리더니.

회사 노트북에 이것저것 요란한 스티커 잔뜩 붙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직장인 브이로그랍시고 일하는 거 촬영하는 것까지 전부 다 맘에 안 들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기수 부장이 사태의 심각성을 냄새 맡고 다가온다.

차지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부장님. 죄송해요. 제가 잘 모르고 그만.”

“왜 무슨 일인데?”

내가 대신 설명해줄게.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다음 달 고속충전기 통관이 안 되게 생겼습니다.”

“뭐야? 설마 전파인증 거부된 거야? 이상하다. 그럴 리는 없는데.”

자초지종을 부장에게 얘기했다.

“이런. 서 과장이 좀 잘 챙기지 그랬어.”

좃나 어이없네.

미국 출장 갔다 와서 입사 후 처음으로 휴가 보내고 어제 출근했는데 자리에도 없는 내가 어떻게 챙기냐?

“지영 씨 걱정하지 마. 어떻게 되겠지. 과장님이 이런 문제 해결하시는 데는 전문가잖아.”

그래 이제 알겠네. 겨우 4명뿐인 영업 3팀이다.

4명이라.

탁상공론과 파벌 싸움하기 딱 좋은 숫자지.

지금 부장 자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연봉의 등기이사 자리. 강 상무가 퇴직하면 그 뒤를 넘겨받아 먹으려는 부장들이 줄을 서 있다.

이 부장은 그 무리 중에서 가장 앞에 서 있고.

차지영은 강 상무가 대놓고 꽂은 초소형 낙하산.

이 부장이 싸고도니 김호창 대리도 당연히 편을 들 것이다.

결국 남은 건 나 하나.

“이게 제 책임이란 말씀이십니까?”

“지금 누구 잘못인지가 중요해? 당장 일부터 바로잡읍시다. 차지영 씨가 가봤자 어차피 도움도 안 되니까 서 과장이 수고 좀 해줘요.”

차지영이 도움이 안 되는 건 사실일 거야.

차지영이 예뻤으면 전파연구소 데리고 갔을 때 분명 꽤 쓸모가 있었을걸. 뭐든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

예쁜 여자가 부탁하는 거랑 담배 냄새 찌든 이 부장 같은 아저씨가 부탁하는 거랑 진행 속도는 천지 차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짚고 출발하겠습니다. 제 책임이라면 저를 징계위원회에 회부 해주십시오.”

“서 과장. 그렇게까지는.”

그렇게는 못 하겠지.

사실관계 따지고 들면 차지영이 곤란해질 테니까.

“제 책임이 아니라면 부장님께서 합당한 처분을 내리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다.

아직 사고가 터진 건 아니다.

중국 선전에서 배가 출발하기 전에 인증을 끝내면 된다.

당장 전파연구소로 달려갔다.

“방금 전화 드린 사람입니다.”

“아 네. 어서 오십시오.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시간이 정말 촉박합니다. 검사를 서둘러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만약 인증이 안 나오면 저희가 정말 곤란해집니다.”

“그러시겠네요.”

공무원도 사람인지라 보통 이렇게 다급히 부탁하면 같이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기 마련인데. 이 양반은 굉장히 느긋하네.

“저희는 신청한 순서대로 심사를 진행합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다른 분들 신청은 아무래도 저희만큼 급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 걸 먼저 해주셔도 크게 지장은 없지 않을까요? 무역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 아닙니까.”

“글쎄요. 같이 방법을 한 번 고민해 봅시다.”

어? 이 새끼 보게.

고민하긴 뭘 같이 고민해.

21세기에 접어든 지가 20년이 훨씬 넘는데.

여기도 아직 20세기적인 놈이 남아 있었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상한 오해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고민해 보면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개인 핸드폰으로요?”

“네. 그게 좋겠습니다.”

공무원이 메모지에 자기 개인 연락처를 적고 웃으며 건네준다.

나도 환하게 화답했다.

전파연구소는 앞으로도 계속 들락거려야 한다.

우리 영업 3팀은 전자기기가 주력 수입 품목이다.

물론 돈 되는 거라면 이것저것 다 팔아먹지만.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이와 비슷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고민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참 우습다.

이혼이라는 인생의 거대한 이벤트를 앞둔 마당에.

남의 돈 벌어다 주려고 이런 스트레스까지 받아야 하나. 아무리 회사 생활이 험한 꼴 참고 굽신거려야 한다지만.

생각해봤다.

돈 봉투를 찔러준다면 그 돈은 회사에 뭐라고 얘기해서 마련할 것인지.

분명히 가장 싸게 막는 방법일 것이다.

이 부장에게 결정을 떠넘기는 수도 있다.

하지만 또 그건 영 별로 안 내키네.

인생 이미 꼬인 놈이 좀 더 꼬인다고 뭐가 달라질까?

전파연구소 소장 방을 곧장 찾아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소장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요.”

“따로 약속을 정하신 건 아니시죠?”

“네. 안에 계시죠?”

“안 계시는데요.”

안 계시면 그냥 처음부터 안 계신다고 했겠지.

그냥 문을 밀고 들어갔다.

“누구세요?”

“소장님. 이분이 갑자기.”

“아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단둘이서요. 전파연구소 전체 조직에 관한 일입니다.”

소장이란 사람은 그저 평범한 공무원 인상이었다.

“그래요? 좋습니다. 우린 괜찮으니 나가서 일 보세요.”

“알겠습니다.”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핸드폰을 꺼내서 녹음을 들려줬다.

이지영 때문에 난 녹음 어플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시도 때도 없이 녹음 버튼을 누르고 있으니.

그리고 직원이 내게 건넨 핸드폰 번호 메모지도 보여줬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흐으음. 그러셨군요.”

“도와주십시오. 저희 직원 실수 때문에 큰 손해를 보게 생겼습니다. 물론 저희 직원의 전적인 잘못입니다. 공무원분들이 이럴 때 저희 같은 민원인을 좀 도와주십시오.”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찾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갈 곳은 많지. 언론부터 해서 국민 신문고도 있고.

소장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계속 두드리는 걸 봐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듯하다.

“이 일은 저한테 맡겨주시겠습니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나쁜 쪽이라면 혼자 뒤지지는 않을 생각이다.

어차피 난 마포대교까지 가본 놈이니까.

“알겠습니다. 전적으로 소장님 뜻에 맡기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악수를 주고받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고개만 숙이고 소장 방을 나섰다.

그길로 곧장 회사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요?”

“서류 보완해서 다시 신청했습니다.”

“선적 전까지 인증받을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겁니다.”

“서 과장이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선전에 연락해서 캔슬하고 지금이라도 새로 배를 알아봐야죠.”

“위약금은?”

“당연히 우리가 부담하고요.”

이번 고속충전기는 시작하자마자 적자로 출발하겠네.

소장과 나눈 얘기는 안 꺼내기로 했다.

“하아아. 이런. 상무님께 뭐라고 보고드리지.”

그건 댁이 알아서 할 일이고.

벌써 점심시간이네.

“점심 식사하러 가시죠. 밥은 먹고 해야지 않겠습니까.”

“지금 밥이 넘어가요?”

“아침을 안 먹었더니 배가 고프네요.”

“서 과장 혼자 다녀와요. 난 별로 생각 없으니까.”

“그럼 다른 분들은?”

“저도 일이 있어서 나중에 따로 먹겠습니다.”

“저는 반성하고 있겠습니다.”

“반성은 반성이고 밥은 먹어야지.”

벌써 왕따가 시작됐나?

차라리 잘됐네.

이 부장이랑 김 대리의 쩝쩝대는 소리 안 들어서 오히려 좋지.

띠리리리.

“네. 미주그룹 영업 3팀 김호창 대리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요. 네. 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김 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파 허가 내일 처리된답니다.”

“내일? 도대체 어떻게.”

“그럼 저 이제 괜찮은 거죠?”

차지영 저건 끝까지 자기 책임 회피만 생각하고 있었네.

“서 과장. 어떻게 된 거야? 아깐 안 된다면서.”

“안 되는 경우도 대비해놔야죠.”

“휴우우. 살았네.”

“부장님. 오늘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한 번 쏘시죠.”

“뭐?”

“오마카세. 법인카드로 저 혼자 먹고 오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점심 먹어야지.”

“아깐 다들 별로 생각이 없으시다면서요.”

“상황이 다르잖아.”

“그럼 같이 가시든가요.”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히 먹어치웠다.

때아닌 오전 외근 수당으로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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