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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받을지는 내가 결정해
“과장님. 출근하셨어요?”
“좋은 아침. 일찍 출근했네.”
차지영의 목소리 톤이 아주 경쾌하다.
전파 인증 문제도 해결됐겠다 어젯밤은 푹 주무셨겠구만.
“과장님. 바쁘지 않으시면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입사하고 처음이다. 차지영이 나를 따로 보자고 한 건.
용건은 짐작이 간다. 이번 전파인증 사고 친 거 해결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할 생각이겠지.
최근에는 오전에 출근해서 허기가 지면 아예 탕비실에서 컵라면을 하나 끓여 먹곤 했었다.
“지영 씨도 컵라면 먹을래?”
“아뇨. 저는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믹스 커피는 원래 안 마시잖아.”
따로 자기 텀블러를 꺼낸다.
“모닝커피 한 잔은 다이어트에도 좋대요. 신진대사를 촉진시켜서 혈액순환도 도와주고. 근데 과장님. 우리 회사 탕비실이 원래 이랬어요?”
사원 복지는 전혀 안중에 없는 곳이다.
어느 회사 탕비실은 품격있는 청담동 브런치 카페 같다던데 여기는 청소노동자 간이 휴게실보다도 못하다.
메뉴는 수년째 똑같다.
낱개로 뜯어먹는 쌀과자와 초코파이류 한 가지. 컵라면은 가장 저렴한 것. 음료는 노란색 국민 커피 믹스. 낡은 정수기와 종이컵 그리고 일회용 젓가락이 전부였다.
조그만 탁자 하나에 간이 의자도 2개뿐이라 사람이 몰리면 서서 먹어야 한다.
“내가 처음에 입사할 때는 컵라면도 없었어. 이나마 좋아진 거야.”
나때는 어쨌다고 말하니 꼰대 같기는 하네.
“컵라면 아주 복스럽게 드시네요.”
끼니를 걸러서 그런 것뿐이야. 곧 이혼하기 때문에 아침 차려줄 부인이 없거든. 이지영은 아침은 고사하고 원래 저녁도 안 차려주는 여자였었고.
“김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죠?”
어째 평소보다 목소리가 더 간드러지는데.
괜히 감사하다는 소리 듣기는 그랬다.
사전에 생색낼 거리를 차단했다.
“고맙다는 말은 됐어.”
“아니요. 정말이지 과장님 덕분에 살았어요. 앞으로 정말 조심할게요.”
“그래.”
“언제 식사 같이 한 번 해요. 제가 살게요.”
괜히 눈 깜빡거리면서 부끄러운 척하지 마라.
‘언제 한 번’이라니.
정말 고마우면 더 적극적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겠지. 아예 어디 식당을 예약해 두던가. 아니면 사소한 선물이라도 미리 준비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냥 말로 때우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현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건 다시는 주변에 피해 끼치지 않겠다는 강력한 각오.
사과는 받는 사람인 내가 결정하는 거지 사고 친 니가 ‘이 정도 미안하다고 말했으니 됐죠?’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래 그래요’라고 적당히 넘어갈까도 싶었는데.
이 남자는 요정도 하니까 컨트롤할 수 있겠구나라는 인식만 심어줄 뿐이다.
대형 사고 칠 뻔한 걸 내가 똥줄이 타도록 뛰어다녀서 막을 때 넌 대체 뭘 했냐?
손 놓고 ‘어떡해. 어떡해.’만 연발하다가 겨우 살려 놓으니까 고작 한다는 소리가 미안 언제 밥 한번 먹자?
참 뻔뻔하면서도 무책임한 인간이네.
차지영에게 질질 끌려다닐 생각은 전혀 없다.
“앞으로 조심하겠다니 기대할게. 그리고 식사는 됐어. 언제 담에 한 번이라니. 난 그런 애매한 약속은 원래 딱 질색이라서.”
차지영의 표정이 대놓고 일그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눈빛에서 느껴진다.
“그럼 오늘 점심 저랑 같이 드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아니야. 회사 생활하면서 여직원이랑 단둘이 밥 먹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나 이혼한다고 소문 떠돌잖아. 괜히 차지영 씨가 오해라도 받으면 어떻게 해.”
“네. 알겠습니다.”
차지영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라면 맛있게 드세요.”
이로써 확실해졌다.
4명뿐인 영업 3팀. 내가 조금이라도 차지영과 인간적으로 엮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전은 다음 달 선전에서 들어오는 고속충전기 업무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었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밥 먹으러 갑시다. 근데 뭐 먹지? 메뉴 정하는 것도 매번 일이야. 김 대리. 오늘 점심 추천해 줄 만한 거 없어?”
“오늘은 골목 백반집 가는 요일인데요.”
“거기 맛은 있는데 오늘따라 좀 질리네. 차지영 씨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이 부장은 차지영의 실수에 대해서 어제부터 전혀 언급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낙낙.”
영업 3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열며 들어오면서 괜히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낸다.
저질 유머 감각의 강 상무였다.
“일어설 거 없어. 일어서지 마. 손님 오는 것도 아니고. 아직 점심 출발 안 했네. 갑시다. 오늘 내가 살게.”
“우와아아. 상무님 감사합니다.”
김 대리가 괜히 오버하면서 환호성을 지른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 3팀이랑 같이 밥 먹은 지도 오래됐고. 회사 근처에 백반집 잘하는 데 있는 거 알지? 골목 백반이라고. 거기 갑시다. 내가 돈 몇 푼 아끼려고 그러는 건 아니야.”
이 부장이 손가락을 딱 하며 튕긴다.
“거기 밑반찬이 끝내주는 곳 아닙니까. 매일 밑반찬 뭐가 나올지 기대하는 재미가 있죠. 상무님은 과연 식도락가시네요. 무슨 음식 프로그램에서도 나온 데라던데요.”
이 부장은 역시 순발력이 좋다.
오늘 점심 메뉴는 이렇게 간단히 정해졌다.
회사 중역이 부서 한 팀 전체랑 같이 점심을 먹는다?
어떻게 보면 참 보기 드문 그림인데.
우리 회사는 그렇지가 않다.
전통까지는 아니고 강 상무가 유독 자주 시도하긴 해. 젊은 부하 직원들과 격의 없이 소통한다는 쿨한 상사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 건지.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몇 번 먹다 보니 익숙해졌다.
식사 자리에 불편한 사람이 그저 하나 더 늘었을 뿐.
여긴 매번 먹지만 참 맛은 있다.
특히 김치가 예술이다. 직접 담근다고 하시던데. 김치만 따로 사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요즘같이 채소 가격이 비싼 시기에 쌈 채소도 넉넉히 나오고.
“다들 잘 먹으니 내 기분까지 좋네. 회사 생활 뭐 불편한 거 없어요?”
아니 상무님 그렇게 질문하시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니면 궁금한 거라도?”
차지영이 웃으면서 질문을 던진다.
“헤헤헤. 이건 별건 아닌데요.”
“어 그래. 지영이 얘기해봐 부담 갖지 말고.”
호칭부터 너무 노골적으로 편애하네.
저러니 이 부장이 차지영한테 꼼짝을 못하지.
“저희 회사는 왜 팀장님이 아니라 부장님이에요? 영업 3팀이면 부장님이 아니라 팀장님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해서요.”
“이 질문은 매년 나오네. 설명 듣고 나면 진짜 어이없을 거야.”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어이없었다. 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납득이 갔다.
“우리도 원래 직함이 팀장이었어. 지영이가 딱 듣기에 어떤 회사에 팀장이랑 부장이 있어. 누가 더 높을 것 같아?”
“부장님이 더 상사 같으신데요. 나이도 더 드셨을 것 같고. 물론 이 부장님이 나이 드셨다는 건 아니고요.”
“맞아. 거래처 사람들이 은근히 무시하는 거 있지. 왜 그렇잖아. 거긴 부장인데 우리는 팀장이면 괜히 좀. 그래서 바꿨어. 부서명은 그냥 놔두고 직함만 팀장에서 부장으로.”
“아. 그랬군요.”
공무원도 아니고 사기업에 직함은 의미가 없지. 연봉이 모든 걸 설명해준다.
“서지오 씨.”
“네. 상무님.”
“들었어요. 고생했어. 내가 저녁이면 술이라도 한잔 따라줄 텐데. 점심이라서 그냥 말로만 치하하니까 이해해요. 아 참.”
강 상무가 손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혹시 금일봉?
“이 부장. 한 대 피우고 올까?”
“그러시죠. 전자담배로 바꾸셨어요?”
“집사람이 워낙 싫어해서. 냄새난다고.”
“저는 도저히 못 바꾸겠더라고요.”
“맞아. 그렇긴 해. 나도 껌도 씹어보고 패치도 붙여 봤는데. 그냥 이걸로 타협했어.”
“잘하셨습니다.”
그럼 그렇지.
사고 칠 뻔한 차지영에게는 스리슬쩍 넘어가고 나한테는 말로 때운다.
김 대리가 차지영의 핸드폰을 넘겨다본다.
“지영 씨도 그거 해?”
“요즘 앱테크가 유행이잖아요. 출석체크랑 퀴즈만 열심히 해도 한 달에 몇만 원 벌 수 있는데 왜 안 하겠어요.”
“난 상테크도 시작했어. 상품권 실적으로 잡히는 카드도 2개나 발급받고.”
푼 돈이지만 돈이 된다니까 궁금하네.
“김 대리 그게 뭐야?”
“과장님은 모르셨구나. 광고 어플 깔아서 출석체크하고 퀴즈 풀면 포인트 주는 거예요. 현금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상테크란 건 처음 들으시면 좀 복잡한데요. 카드로 상품권 사고 카드 실적 채워서 혜택 받아먹는 겁니다. 상품권이랑 재테크 합쳐서 상테크라고 불러요.”
“구매한 상품권은 그럼 어떻게 해?”
“1장당 일이백 원 손해 보고 바로 파는 거죠. 대신 카드 실적 혜택이 몇만 원어치 되니까 결국 이득이에요.”
큰돈은 안 되겠구나.
“얼마나 버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저것 해서 한 달에 부수입으로 20만 원도 번다던데요.”
뭐야 꽤 짭짤하잖아.
이 자리에서 자세히 물어보긴 그렇고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봐야겠어.
“회원가입 이벤트도 찾아보면 좋은 거 많아요. 현금 주는 데는 잘 없지만, 포인트나 코인으로 받아서 현금으로 바꾸면 되니까요.”
“대리님 제가 최근에 찾은 건 무려 2만 원이나 준대요.”
“2만 원? 왜 난 몰랐지.”
“저도 어제 발견했어요.”
“어디야? 당장 가입해야겠다.”
“비트업이요.”
“아 거기? 난 벌써 저번에 가입했어. 그땐 1만 원이었는데. 아깝다. 이번엔 두 배로 늘었구나. 이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니까.”
안 듣는 척하면서 유심히 이름을 기억했다.
비트업.
2만원.
오케이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이제 한탕을 노리는 인생은 끝났다.
남자는 한 방이라더니. 훅 가는 것도 한 방일 줄이야.
근데.
비트업이면 혹시 비트코인 거래소 말하는 건가?
“거기 가입하면 비트코인 계정도 만들어 주는 거야?”
“과장님도 비트코인 관심 있으셨어요?”
“그런 건 아니고. 요즘 워낙 열풍이 부니까 궁금해서.”
“비트코인은 이제 한물갔죠. 저도 한때는 매일 시세 확인하고 그랬는데.”
“말씀하시는 게 대리님은 투자하셨었나 봐요?”
김호창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사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좀 물렸어. 지금 팔면 손실이 커서 그냥 묵혀두고만 있는 중이야.”
“얼마나 잃었어요?”
“안 팔면 손해 확정은 아니지.”
“나도 해 볼까?”
“지영 씨 하지 마. 아예 관심도 갖지 마.”
김 대리가 손사래를 친다. 꽤 세게 물렸구나.
그래 봤자 나만 하겠냐.
이것들이 불도저 앞에서 삽질하네.
난 비트코인에 투자할 생각이 전혀 없다.
잘 모르는 분야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지.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저 2만 원이나 챙겨야겠다.
캐시백을 준다던 그 지긋지긋한 스팸 광고.
마감인 자정을 불과 몇 초 앞둔 촉박한 때.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가장 가까이 있던 3번을 눌렀었다.
아니다. 솔직해지자.
어차피 보이스피싱일지라도 잠깐이나마 제일 큰 헛꿈을 꾸고 싶었다.
무려 220퍼센트의 비트코인을 캐시백으로 준다던.
어차피 당첨되지도 않을 로또 용지를 품에 안고 사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비트코인 계정 만들어두고 꽝이나 확인해야겠네.
회원가입만 하면 2만 원이라.
하루 밥값은 벌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