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제 내가 수금할 차례
우리 회사는 조용히 전화 통화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
옥상은 담배 피우러 올라가는 사람이 많다.
복도는 가끔 누가 지나갈 때도 있고 소리가 울려서 길게 전화할 만한 곳이 못 된다.
“부장님 저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응 그래요.”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천천히 일 보고 와요.”
웬일로 어디 가냐면서 안 물어본다.
들락거리는 시간을 따지면 이기수 부장이 압도적이지. 하루에도 수십 번 담배 피우러 나갔다 들어오고.
본인이 워낙 자리를 자주 비우니 나한테도 꼬치꼬치 캐묻지는 못하네.
통화가 길어질 수도 있다.
그동안 어디 갔냐고 찾으면 괜히 대답하기 애매하다.
차라리 먼저 나갔다 오겠다고 말해두는 게 좋지.
회사를 나오자마자 김지영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경찰서랑 통화했습니다. 그 여자가 저를 고소했다네요.]
[그렇군요.]
목소리가 아주 차분하다. 변호사는 고소가 일상이니 보통 사람과는 대하는 태도가 다르구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담담하다.
[무슨 죄목인가요? 폭행, 협박, 명예훼손, 주거침입 뭐 그런 종류 아니었습니까?]
신기하네. 구체적으로 설명도 안 했는데 귀신처럼 알아맞힌다.
[어떻게 아셨어요? 협박하고 주거침입. 또 하나는 상해라고 하더군요. 상해 진단서까지 첨부했다면서 경찰관이 그랬습니다.]
[그렇군요.]
[우선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지영에게 손을 댄 적이 전혀 없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를 저도 잘 압니다. 여자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매장당하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을 최대한 보호하는 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우선 당황하지 마시고요.]
[당황하지는 않습니다. 경찰관이 그러더군요. 사건 발생일이 3월 28일이라면서요.]
[그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집에 간 건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3월 28일이라고 하셨죠? 제가 녹음 파일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으신지요?]
있지.
수건으로 아랫도리만 가리고 나를 맞이했던 변호사.
그 녀석이 현장에 있었다.
[녹음 파일에 보시면 어떤 인물이 나옵니다.]
[그때 제3의 인물이 선생님과 이지영 사이에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지영 측 사람이었나요?]
[그게 좀 애매한데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변호사였습니다.]
[변호사가 집에 있었다고요? 특이하네요.]
옷을 안 입고 있었으니 더욱 특이하지.
[이지영의 불륜 상대였습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이지영은 자기 변호사랑 불륜을 맺었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김지영이 잠시 말이 없다.
[골때리는 여자군요. 그 변호사도 제정신이 아닌 건 마찬가지네요. 어느 지방변호사회 소속인지 모르겠지만 최소 과태료일 텐데.]
[확실합니다. 제가 집에 들어갔을 때 수건으로 중요한 분위만 가리고 나오면서 저랑 마주쳤습니다.]
[녹음은 어디부터 하셨습니까?]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담았다.
[집에 문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전부 있습니다. 변호사랑 나눈 대화도 녹음되어 있을 겁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생명줄을 아주 튼튼하게 마련해두신 셈이네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선생님은 전혀 동요하지 마시고 일상생활 그대로 지내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비싼 돈 주고 고용한 덕을 톡톡히 보네.
아주 든든하다.
[모든 상황이 저희들한테 유리합니다.]
[경찰이 나와서 조사받으라고 하던데요.]
[네. 그건 제가 일정을 조율해보겠습니다. 평일은 힘드실 테니 가급적이면 주말로 잡아보겠습니다.]
[가능할까요?]
[네. 형사도 사람이라 주말에는 쉬고 싶겠지만 선생님의 사정이 더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를 잘 고른 것 같다. 믿음직하네.
[제가 충고하나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어서 말씀하십시오.]
[상대를 절대 봐주지 마세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과연 이래도 되나 싶을 때까지 몰아붙여야 합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더 미친 쪽이 살아남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그리고 감옥 보내는 걸 목표로 하지 마십시오.]
[그건 왠가요?]
[현실적으로 힘듭니다.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죄만 놓고 보면 구속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지영은 갓난아이가 2명 있습니다. 이게 아주 큽니다. 우리나라 정서상 판사가 초범에다 갓난아이 둘 있는 여성을 구속시키려면 살인죄 정도까지는 나와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겠네. 김지영 변호사 말대로 감방에 집어넣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대신 전략을 다르게 세우고 싶습니다.]
[어떻게요?]
[돈이죠. 합의금을 있는 대로 뽑아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암 그렇지. 진정한 사과는 돈이다.
눈물로 잘못을 뉘우치는 것보다 통장에 바로 입금되는 현찰이 훨씬 고맙다.
질질 짜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울부짖으면 뭘 하나. 돌아서면 헤헤 웃을 텐데.
이미 망가진 내 인생을 보상받는 길은 오로지 돈뿐이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렇게 진행하시죠.]
[알겠습니다. 담당 형사와 경찰서를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전화해보겠습니다.]
문자에 적힌 대로 일러줬다.
됐어.
기분이 아주 편안하다.
늦은 오후. 따로 월차를 쓴 것도 아닌데 이 시간에 회사 밖을 나온 것도 오랜만이네. 기왕에 나온 거 바람이나 좀 쐬자. 부장에게 들어간다고 말한 30분은 거의 다 됐지만 마음은 오히려 느긋해진다.
회사 건물 근처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4월의 봄바람이 부는 계절이다.
차가운 겨울에 일이 터지고 나서 계절이 바뀌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심적으로도 전혀 여유가 없긴 매한가지였다.
아니지.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눈치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그러고 보니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엄청난 미인과 결혼에 골인한 그 순간?
그땐 그랬겠지.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때 누가 알 수 있었을까.
난 아직 30대다. 앞으로 무슨 삶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내 인생의 봄날은 아직 오지 않은 게 아닐까?
회사 빌딩은 언제봐도 참 우중충하다.
삑. 현관에서 사원증을 읽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사원증이 없어도 영업 3팀 사무실까지는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다. 오래된 건물에 경비도 별로 없고 우리 미주그룹만 입주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다.
가만 보면 우리 회사가 참 보안 개념이 희박해.
그래도 사원증을 찍고 올라가면 뭔가 여기는 내가 머무는 거처라는 안도감이 든다.
저 삐 소리에 길들어진 건지.
들을 때마다 ‘맞다 여긴 회사라는 전쟁터지’라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게 요즘 유행어로 ‘사축’인가.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역시나 가관이다.
이기수 부장은 또 자리에 없다.
김호창 대리는 꾸벅꾸벅 졸고 있고.
차지영은 내 눈치를 화들짝 보는 걸 봐서 분명히 인터넷 쇼핑 중이었을 것이다.
“오셨어요?”
“응”
차지영의 말에 김호창이 잠을 깬다.
“어? 과장님 오셨네요.”
받지도 않을 전화만 빨간 불빛을 깜빡거리면서 계속 걸려오고 있다.
고객센터를 회사에 따로 두지도 않고 외부 콜센터에 맡기지도 않는다.
우리 팀이 파는 물건의 CS 업무는 전부 영업 3팀 팀원 4명이 떠맡는다. 부장은 부장이라고 전활 안 받아 버리니 결국 3명이지. 사실상 업무의 태반이 전화 받는 것. 전화가 너무 많이 걸려와서 현실적으로 일일이 대응할 수가 없다.
안 받고 놔두면 답답해진 고객이 게시판에 글을 남긴다. 그러면 그걸 우리가 처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얼마나 주먹구구인지.
인건비 아낀다고 기존 직원만 갈아대는 것 아니겠나.
고객센터 연결이 되는지 안 되는지가 중소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기준이라던데. 그렇게 따지면 미주그룹은 영락없는 중소.
“부장님은 담배 피우러 가셨나 봐?”
“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자리를 저리 많이 비우는데 주의 한 번 받은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야. 아니면 우리 회사가 흡연에 너무 관대한 건지.
“오늘 오후는 이상하게 조용하네요. 전화도 평소보다 훨씬 적고. 하아아암.”
김호창 대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해댄다.
이 시간이 엄청 졸릴 시간대긴 하다.
조금만 지나면 퇴근 시간을 기다리면서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바깥 복도가 웅성거린다.
처음에는 잠시 그러다가 말겠거니 했는데.
계속 이어진다.
“무슨 일 있나 봐요?”
“그러게.”
“과장님. 제가 한 번 알아볼까요?”
“굳이 그럴 필요 있겠어.”
“누구지?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대리님 우리 가봐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김호창과 차지영이 나가본다.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른다.
사무실 안까지 희미하게 들릴 정도면 밖에서는 꽤 크겠다.
“··· 미주그룹 맞지?”
“···. 누구십니까?” “그나저나 ··· 들어오셨습니까?”
“그건 알 거 ···. 여기 사장 ···.”
“외부인은 ··· 들어오시면 안 돼요.” “··· 주십시오.”
“사장 없으면 회장. 회장 ···. 직원 교육을 어디서 이따위로 ··· 말이야.”
“··· 소란 ··· 경찰 부르겠습니다. 나가 주세요.”
아주 가끔 저런 경우가 있다.
고객센터 연결이 계속 안 되자 아예 회사로 찾아오는 것.
최근에는 한 번도 못 봤는데 예전에는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들었다.
하여튼 이놈의 회사는 사내보안을 도대체 어떻게 꾸리는 건지.
외부인이 저렇게 쉽게 들어올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하면 직원들이 불안해서 어떻게 일을 하나.
“책임자 ···.”
“아주머니. ··· 안 돼요. ··· 나가 주세요.”
아주머니라는 걸 보니 여자네.
강제로 끌어내지도 못하고 남자 직원들이 쩔쩔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괜히 몸에 손이라도 대면 성추행이니 뭐니 더 골치 아파질 것이다.
김호창과 차지영이 돌아왔다.
“과장님. 진상인데요.”
“응.”
“아니 어떻게 회사에 저런 사람이 들어오도록 놔둬요?”
“지영 씨는 처음 보겠다.”
“경비가 알아서 내보내겠지.”
“저는 화장실에 잠시 다녀올게요.”
“그래.”
그냥 곧장 경찰에 신고할 것이지.
저렇게 계속 소란피우도록 놔두면 어떻게 하나.
“미주그룹 ··· 서지오.”
응?
“서지오 그 ···가 우리 ··· 딸을 두들겨 패서 ···시켰어. 서지오 이 시발놈을 ··· 여기 데리고 ···.”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서둘러 밖을 나가봤다.
멀리 보이는 저 인간은 ···.
이지영의 모친 하숙향이였다.
결혼 전에는 그런 인간인 줄 꿈에도 몰랐다.
하긴 몇 번 상대한 적이 없었으니 어떤 인간인지 알 기회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겠네.
이지영이 하는 짓은 그 엄마를 보고 배운 게 분명하다.
장모가 신혼집에 매주 올 때부터 뭔가 좀 이상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말이지.
올 때마다 빈손으로 오는 건 더 이상했다.
보통 먹으라고 밑반찬 같은 걸 싸 들고 오지 않나.
퇴근해보면 이지영과 나란히 앉아서 내 카드로 긁은 배달 음식을 사이좋게 먹고 있다.
장모는 단 한 번도 내게 저녁을 차려준 적이 없었다.
날 보면 항상 늘어놓는 소리가 있었다.
‘내 친구는 의사 사위한테 무슨 보석을 선물 받았다더라.’
‘어디 여행을 보내준다더라.’
‘용돈을 백만 원이나 줬다고 그러더라.’
‘친구들한테 자꾸 비교당해서 창피해 죽겠다.’
매주 올 때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늦게 퇴근하면 안 가고 기다리고 있다.
빌려준 돈 받으러 온 사채업자 같았다.
장모는 방문이 아니라 ‘수금’이었다.
장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본능적으로 녹음부터 시작했다.
“어~~. 그래. 너 잘 만났다. 거기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구나. 우리 딸을 짐승처럼 두드려 패서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이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잡놈아.”
두 모녀를 쌍으로 보내버려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