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15화 (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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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뭘 걸었냐?

실은 최근에 사내 게시판을 로그인해본 적이 있다.

평소에는 거의 안 들어간다. 건질 만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말만 익명 게시판이지 누가 그런 곳에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겠나.

장모 하숙향이 난동을 부린 후에 내 얘기를 누가 하나 싶어서 궁금했다.

전혀 언급조차 없었다. 하긴 요즘 키보드 함부로 두들기다가 고소당하는 세상이니.

“나 빼고 무슨 얘기해?”

이기수 부장은 직원들이 둘만 모여서 잡담을 나눠도 꼭 끼어든다.

눈치가 없는 양반은 아닌데 일부러 어떻게든 부하 직원들 틈에 파고들어 뭔가 캐내려는 모습이 웃긴다.

담배에 찌든 입 냄새는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요즘 신입 사원들은 대놓고 냄새난다고 말한다던데 차지영은 이럴 때는 또 가만히 입을 다문다.

“부장님 담배 피우고 오셨어요?”

“냄새 많이 나요?”

“별로 안 납니다.”

“그렇지? 입 한 번 헹구고 왔어.”

한두 번 헹구는 것으로 없어질 냄새가 아니다.

이 부장이 복도까지만 와도 사무실 안에서 이 부장이 왔다고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래된 찌든 냄새와 금방 덧입힌 새 담배 냄새가 조화를 이루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내가 담배를 끊어보니까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호창 씨가 사내 게시판에서 흉흉한 분위기가 감돈다고 해서 그 얘기 중이었습니다.”

“난 또 뭐라고. 그것 때문에 걱정했었구나. 괜한 생각 말고 일만 열심히 해요. 우리 영업 3팀원 만한 최정예가 어디 있어. 그거 몰라요? 우리가 미주그룹 에이스들이야. 특급 에이스.”

부장은 절대 안 잘릴 거라고 확신하니까 저렇게 말하지.

특별한 빽도 없는 사람인데 이사진들이랑 두루두루 참 친하게 잘 지낸다. 나도 저런 건 좀 보고 배워야지.

아부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달까.

상대방이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재빨리 캐치해내서 간질간질하다가 한 번에 훅 긁어주는 스킬은 정말 놀랍다.

이런 음울한 회사 분위기라면 긴장 좀 해야 한다.

단순히 이혼소송 중일 뿐이라면 모르겠는데 이지영과 이런저런 소송들로 엮여 있고 결정적으로 장모가 난동을 부렸다.

영업 2팀의 김과장은 자기가 바람피워서 이혼당했는데도 회사에서는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오히려 아내가 바람피운 나는 장모 때문에 경위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이럴 때는 몸을 사려야지.

“자 들어갑시다. 참 서지오 씨. 잠깐 얘기 좀 할까?”

이 부장이 왜 그러지? 사람 무섭게.

“별 건 아닌데. 요즘 서지오 씨 주변에 일이 좀 많았잖아. 뭐 힘든 점 없어요?”

“괜찮습니다. 회삿일에는 앞으로 지장 없도록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요. 서지오 씨야 뭐 내가 알지. 늘 자기 맡은 일은 확실하게 챙겨서 잘 하니까. 진짜 오해하겠네. 무슨 다른 용건 있는 건 아니야. 격려하는 거지. 열심히 하자고.”

“알겠습니다.”

다행이네. 괜히 쫄았잖아.

“그런데 말이지. 참 이런 얘기 꺼내기는 좀 그렇긴 한데. 내가 직접 들은 건 아니야. 전해 들었어.”

“뭔가요?”

머뭇거리는 걸 봐서 좋은 얘기는 절대 아니다.

이 부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가 듣지 않나 꼼꼼히 살핀 뒤 말문을 열었다.

“탑3가 보고 받았나 봐. 서지오 씨 장모가 저번에 와서 난동부린 거. 도대체 감히 누구냐면서 꼭지가 돌았다고 하더라고.”

이건 안 좋은데.

“탑3가 화가 단단히 났나 봐. 우리끼리 얘기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 3번 말이야. 그분 성질 장난 아니잖아. 나도 전해 듣기만 했어. 서 과장도 그냥 알고만 있어요.”

강 상무 라인이니까 강 상무한테서 직접 들었나?

알 수 없지. 이 부장은 나름 회사 내에서 발이 넓으니까. 이 부장이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필 이 시기에 장모 사건이 탑3의 귀에 들어갔다는 점이 골치 아프다.

진짜 좃된 건데. 나한테까지 불똥이 안 튀려면 어찌해야 할까.

미주그룹 탑1 임태수 회장의 장남 탑3 임누리.

미주그룹이 거대 재벌가는 아니라서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아주 큰 인터뷰 사고를 쳐서 유명해졌다. 별명까지 생길 정도였다.

‘가성비’

이 양반은 마약이나 도박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쪽으로는 한 번도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다.

오직 여자 문제가 말썽인데.

진짜 우리나라 좀 예쁘다 싶은 여자는 다 건드려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자기 나름의 여자 철학이 확고하다.

얼마 전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꽤 유명한 여자 연예인이 죽었는데, 경찰 수사 과정에서 사망 당시 같이 있던 남자 A의 후보로 임누리의 이름이 등장했다.

언론들이 따라붙자 임누리는 딱 잘라서 부정했다.

‘저 아닙니다. 그 여자는 비쩍 마르기만 하고 볼 것도 없는 주제에 너무 비싸서 거절했어요. 가성비 떨어지는 여자는 상대 안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역시 간신히 재계 서열 100위 미주그룹의 2세. 짠돌이 사풍만큼이나 알뜰하네.-

-사람한테, 더구나 돌아가신 고인한테 가성비라니. 그게 인간으로서 할 소리냐?-

-여자가 물건이냐? 미주그룹 불매함.-

-도대체 스폰 얼마나 많이 불렀길래? 재벌도 감당 못 할 정도?-

-미주그룹 재벌 아님. 그저 그런 좃소.-

-임누리 나랑 취향 비슷하네. 나도 그 연예인 왜 이쁘다는지 모르겠음.-

또라이로 순식간에 찍혀버렸다.

원래 할 말 안 할 말 막 해대는 사람이긴 했지만,

회사 밖 언론 인터뷰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얘기해버렸으니 후폭풍이 장난 아니었다.

회사 홍보팀이 죽어나도록 여기저기 전화해대서 기사 내리라고 부탁했다던데. 그게 막아 지겠냐.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계속 오르내리더니 오너리스크라면서 주가가 2퍼센트나 떨어질 정도였다.

자리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껍데기는 과장이나 됐지만 속알맹이는 여전히 말단 회사원일 뿐이다. 위에서 맘먹고 자르려고 들면 자리 빼는 건 순식간이지.

이래서 다들 공무원이 되려고 그렇게 난리들이구나.

아직 잘린 것도 아닌데 괜히 걱정할 필요 없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나가라면 그때 그만두면 되지.

어딘들 먹고 살 곳이야 없을까.

투잡 쓰리잡으로 알바하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벌지도 모른다.

띠링.

깜짝이야. 심각한 고민 중인데 갑자기 문자가 와서 놀랐다.

시발. 내용을 확인해보니 욕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사람들이 이래서 나쁜 일은 줄줄이 이어진다고 그러는구나.

[서지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비서실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임누리 상무 이사님께서 따로 한 번 서지오 과장님을 정중히 뵈었으면 한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 괜찮으시면 지금 당장 임누리 상무이사님 방으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무슨 말장난이냐.

‘정중히’ 뵙고 싶다면서 ‘지금 당장’ 튀어오라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초대법인가.

비서실 직원도 곤란했을 것이다.

분명 임누리는 ‘그 새끼 지금 당장 여기 데려와.’라고 말한 것을 최대한 순화해서 번역해준 게 분명하다.

같은 처지로서 충분히 이해한다. 암 이해하고 말고.

“부장님. 저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겼습니다.”

“어딜?”

“탑3가 저를 보자고 하는데요.”

탑 3이라는 소리에 이 부장뿐만 아니라 김호창과 차지영도 깜짝 놀란다.

이기수 부장 표정이 난처해졌다.

“서지오 씨. 혹시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절대 내가 따로 보고 한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줘요.”

사실이든 아니든 이제와서는 상관없지.

이기수 부장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임누리가 알게 됐을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사지로 끌려가는 군인을 쳐다보듯 말없이 배웅해준다.

임누리의 방은 탑1 회장실 바로 아래층 똑같은 구조와 넓이라고 들었다.

같은 방 위아래 회장과 큰아들이 근무한다.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놈의 회사는 쓸데없이 이런 디테일한 의전에 목숨을 건단 말이야.

똑똑.

아마도 나에게 문자를 보냈을 비서실 직원이 대신 문을 두드려준다.

꽤 예쁘네. 임누리가 건드렸을지 안 건드렸을지 괜히 궁금해지는 외모였다.

“들어오세요.”

같은 회사를 다니지만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공간이었다.

냄새부터 달랐다. 과일 향 같은데 무슨 과일인지도 모를 은은한 상큼함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습도도 다른 듯싶었다. 밖은 황사로 건조한데 여긴 시원한 계곡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공조 시스템에 돈을 얼마나 쓴 건지 모르겠네.

코가 뻥 뚫린다.

“서 과장님?”

저 사람이 임누리구나.

멀리 지나가는 걸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단둘이 얘기하는 건 처음이다. 앞으로도 없겠지.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서지오입니다.”

“비슷한 또래 같은데 편하게 내가 말 놓을게.”

마음대로 해라.

나도 그럼 놔도 되냐? 어차피 곧 잘릴 거면 나도 반말 한번 트고 싶기는 한데.

“소문은 들었어. 애가 둘이라며? 전부 다른 남자 자식으로만.”

“네.”

“와아아. 시발. 진짜 좃같았겠다. 나였어도 가만 안 냅두지. 이해해. 서 과장 상남자네. 요즘 사내새끼들은 말이야 기집애들한테 굽신거리기나 하지. 여자라는 건 까불면 가끔 패야 돼.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지. 맞을 짓을 했는데도 안 처맞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 아니야?”

확실히 재미있는 친구네.

맞장구쳐 줘야 하나?

“그렇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장모라고 했나? 우리 회사에서 꼬장 부린 년.”

“네. 맞습니다.”

“화분을 집어 던졌다며? 나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반 죽여 놨을 텐데.”

“회사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훗. 후흐흐흐. 이 친구 마음에 드네. 서 과장. 그런 말이 있어. 갈등은 최종적으로 결국 폭력을 통해서만 해소된다. 누가 한 말인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내 입에서 나왔으니 내가 한 말이지. 난 거지새끼들을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 공짜로 얻어먹으려고 기웃대는 것들. 지금 회사에 그런 거지들이 너무 득실거려.”

김호창이 말한 사내 게시판의 그 인물.

내 눈앞의 이 녀석이 맞는 것 같다.

“조만간 쓸어버릴 거야. 월급 도둑질하는 거지새끼들 전부 다 싸그리. 서 과장. 남자는 허리가 생명이야. 허리가 튼튼해야 남자 구실도 제대로 하는 거라고. 안 그래?”

“맞습니다.”

“과장이 뭐야? 회사의 허리야. 제일 중요한 역할이라고.”

테이블에 놓인 서류철 하나를 열어서 살펴본다.

“영업 3팀 실적이 우리 회사 부서 중에서 1위야. 작년에는 2위였고. 재작년에는 또 1위였네. 이게 뭘 의미하겠어? 서지오 씨 같은 사람이 바로 우리 회사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란 뜻이야.”

욕하려고 부른 거 아니었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서지오 씨 같은 사람이 쭉쭉 승진해야 돼. 그게 올바른 조직이야. 내 생각에는 그래.”

“절 좋게 평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말이야.”

서류철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회사라는 게 말입니다. 이게 꼭 유능한 사람으로만 채운다고 잘 굴러가는 건 아니더라고. 가끔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쓸만한 장기 말 대가리 하나를 베어버려야 할 때도 있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고.

“마누라가 바람나서 딴 놈 새끼 둘을 낳고 그 장모는 회사에 쳐들어와서 깽판을 부렸는데 남편이란 놈을 가만 놔두면 우리 회사 이미지가 뭐가 되겠어?”

“죄송합니다.”

“외부에서 볼 때 좃같은 놈은 나 하나로 충분한 거 아닐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마누라 두드려 팬 거 아주아주 잘했어. 나이스샷이야. 하지만 1심에서 유죄 판결 뜨면 알아서 나갑시다. 그 전에 자르지는 않을게. 그러면 오히려 우리가 욕먹잖아. 무죄 추정이니 뭐니 해서 말이야. 말이 돼? 유죄면 유죄고 무죄면 무죄지. 일단 무죄로 보자는 건 또 뭐야?”

안 나간다고 버티면 그때부터 굉장히 피곤해질 것이다.

당장 회사 조그만 창고 구석에 책상 하나 마련해주고 거기서 재고 정리하라고 내려보낼지도 모른다.

부당노동행위니 뭐니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 눈앞에 닥치면 안 나가고는 못 버틸 거야.

한데 말이야.

난 이지영을 팬 적이 없거든.

“상무님. 만약 제가 와이프를 안 때렸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무슨 소리야? 때렸다면서? 그러니까 장모까지 감히 내 회사에 기어들어 와서 그 지랄이었던 거잖아.”

“저는 와이프에게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아까 유죄 판결이 뜨면 나가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입으로만 남자가 어쩌고 외칠 게 아니라 너도 뭘 걸어라.

만약 내가 이지영을 때린 게 아니라서 무죄면 넌 어쩔 건데?

“반대로 무죄 판결이 나면 저는 계속 회사를 다녀도 되는 겁니까?”

어쭈? 이 십새끼 보소.

탑3 임누리 상무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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