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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고분한 놈은 아님
탑3 임누리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마누라를 안 팼다고? 그럼 그 여편네랑 장모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소린가? 자해공갈단 집안이랑 결혼했어?”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건 판사가 결정하는 거지. 만약 잘못이 없다면 사기꾼 모녀한테 속아서 우수한 사원 하나를 자를 뻔한 내가 멍청한 놈 되는 거고. 나만 꼴이 아주 우스워지겠네.”
분노의 화살이 나에게 향해서는 안 된다.
“전처와 장모가 벌인 짓입니다. 최소한 1심 판결이 날 때까지만 차분히 기다려 주십시오. 유죄라면 당연히 자진 퇴사하겠습니다. 대신 무죄라면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임누리가 고개를 쳐들고 왼손으로 턱을 쓰다듬는다.
“강 상무 말대로 역시 고분고분한 놈은 아니네.”
강 상무가 임누리에게 내 일을 알린 건가?
그럼 강 상무 직속 라인이나 마찬가지인 이 부장이 보고했단 소린데.
아까 나한테는 자기가 따로 보고 한 게 아니라면서 오해하지 말아달라더니.
역시 이 부장은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다.
“서 과장. 우리 회사에 차장이 몇 명이지?”
갑자기 차장은 왜?
“현재는 두 분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2명 밖에 없는지는 아나?”
미주그룹에는 차장이 별로 없다.
원래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입사하기 전에는 팀마다 당연히 있었는데 부서가 대폭 개편되면서 많이 없앴다고 들었다.
“우리 회사는 소규모 편제야. 서 과장이 있는 3팀만 해도 겨우 4명이잖아. 4명뿐인데 거기에 부장 차장 과장까지 있으면 꼴이 우습지.”
그렇긴 하다. 4명인데 차장까지 있으면 이상하긴 하지. 동네 미용실처럼 원장 부원장 실장 직함도 아니고.
“무죄 나오면 차장으로 승진해. 권한은 부장이랑 똑같이 갖고. 자리야 만들기 나름이지. 월급 몇 푼 더 나오는 것만 해도 어디야. 안 그래?”
날 좋게 봐주는 건가.
“감사합니다. 믿어주신 바에 보답하겠습니다.”
한 팀을 총괄하는 부장이 되기에는 아직 연차가 부족할 때 차장으로 올려준다.
일단 차장 자리에만 오르면 부장까지는 프리패스.
우리 회사에서 한 팀에 부장과 차장이 같이 있다는 건 그 부장보고 넌 이제 별로 필요 없으니 알아서 어서 꺼지란 의미다.
내가 차장이 되면 이 부장의 얼굴이 아주 볼만해지겠네.
“고마워할 것 없어. 일 잘하면 올리고 못 하면 죽인다. 이게 내 원칙이야. 거기다 마누라 안 팼다며? 그럼 자를 이유가 없지. 대신 유죄가 나오면 알지? 회사 그만두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큰일 나.”
싱긋 웃는 게 더욱 기분 나쁘다.
“알겠습니다.”
무죄면 차장 승진. 반대로 유죄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탑3 임누리의 성격상 사표를 수리하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보복이 뒤따른다.
“가서 일 봐.”
“안녕히 계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임누리의 방을 나섰다.
“잠깐.”
“네?”
“장모 그년 이름이랑 연락처, 주소 불러봐.”
좋았어. 임누리의 분노가 장모에게 쏠렸다.
“바로 적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인지 물어보려다가 관뒀다.
내가 간섭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난 이 문제에서 철저히 빠지는 게 좋아.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시계를 보니 10분도 안 지났는데 체감상 족히 한 시간은 흐른 것 같다.
나온 김에 옥상에서 바람을 쐤다.
담배 한 대 피웠으면 딱 좋을 텐데.
이 부장이 헛소리는 많이 해도 금연은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거란 말은 참 정확하단 말이야.
이기수 부장이 이번에는 어떤 말로 날 위하는 척할지 몹시 궁금하다.
“다녀왔습니다.”
“과장님 오셨어요.”
“상무님이 뭐라고 그러세요?”
“서 과장. 상무님께서 화 많이 나셨어?”
이 부장은 임누리가 화가 폭발했길 바라는 눈친데.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둘러대면 족해.
“저번 일 때문에 부르셨더라고요. 앞으로 잘 하라고. 장모의 연락처를 물으셨습니다.”
“그랬구나. 다행이야. 서 과장한테 별일 안 생겨서. 우리 모두 걱정하고 있었어.”
참 뻔뻔하네.
장모 일을 강 상무에게 알린 건 그렇다 치자.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강 상무에게 알리니까 그건 상관 안 해.
하지만 굳이 강 상무에게 내 흉을 봐서 임누리에게까지 흘러 들어가게 만든 건 좀 짜증 난다.
임누리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결국 시건방진 놈이란 뜻이잖아.
지금은 강하게 나갈 필요 없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누리가 이기수 부장의 실상을 알게 되면 제일 먼저 자르고 싶어질 텐데.
도대체 회사에서 하는 일이 없다.
결재 서류나 파일에 사인하는 게 끝. 전화 응대 업무는 부장이라고 당연히 열외.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담배 피우러 나갔다 들어오는 게 전부다.
부장이라기보다는 강 상무의 정보원이라고 보는 게 더 어울리지.
영업 3팀의 모든 일은 사실상 내가 도맡아서 하는 셈이다. 사람 구실 제대로 하는 건 그나마 김호창 대리 한 명뿐이고. 사고뭉치 짐덩어리 폐급 차지영이랑 방관자 월급 도둑 이기수 부장, 이 둘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이 부장이 언제까지 저렇게 날로 먹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어.
며칠 동안은 잠잠한 일상이 이어졌다.
경찰이나 법원에서 연락이 오는 일도 없고, 임누리도 더 이상은 나를 찾지 않았다.
드디어 내일이면 14일이다.
벌써 두근거린다.
저번 달은 반신반의하면서 기다렸는데 이번 달은 예감이 좋다. 퇴근하고 고시원에 돌아와서도 온통 캐시백으로 들어올 비트코인 생각뿐이다. 계속 핸드폰만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네.
오늘 비트코인 시세는 대략 4천만 원.
내가 저번 달에 일시불로 결제한 상품권은 922,000원어치.
만약 비트코인으로 캐시백이 입금된다면 220 퍼센트로 계산해서 정확히 2,028,400원어치.
판매 수수료 0.05 퍼센트와 출금 수수료 1천 원을 제하면 대략 2백만 원.
후흐흐흐.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찔린다. 과연 받아도 되는 건지. 꽁돈 2백만 원이 생긴다면 이런 기분이겠네.
이걸로 이번 달 대출 이자는 충분히 막을 수 있겠어. 계속 이런 식으로 캐시백이 들어와 준다면 빚도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12시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정말로 들어올까? 당연히 들어오겠지? 만약 안 들어오면 난 어떻게 하나? 온갖 잡생각이 끝없이 이어진다.
11:59.
12:00.
14일 0시가 됐다. 어서 와라. 빨리.
띠링.
정확하다. 12시가 되자마자 문자가 도착했다.
[캐시백 전송을 시작했습니다.]
됐어.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된 거다.
저번 달에는 곧바로 확인했다가 안 들어와서 실망했었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비트코인이 어떻게 전송되는지 김 대리에게도 들었고 나도 나름 공부를 해 봤다.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에서 2시간까지 걸릴 수도 있다.
차분히 기다리자.
휴우우. 긴장되네.
띠링.
[캐시백 전송을 완료했습니다.]
1시가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곧바로 비트업 거래소에 로그인했다.
0.0507 (BTC.)
현재 비트코인 시세로 2,236,300원어치였다.
고작 1시간 만에 비트코인 시세가 올라서 20만 원이나 이득을 봤다.
짭짤하네. 비트코인 차트를 보니까 더 오를 것 같기도 하지만 미련없이 팔기로 했다. 괜히 놔두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어젯밤에는 회수해 가버리는 악몽까지 꿨다.
곧바로 팔아치우고 출금까지 완료했다.
2,213,000원.
최종 계좌로 입금된 돈이었다.
상품권 거의 100만 원어치를 일시불로 긁고 다음 달 14일에 들어온 221만 원.
믿어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이 돈을 안심하고 써도 되는 건가.
아니지.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이자부터 갚자.
이번 달 대출 이자 빠져나가는 날은 아직 아니지만 미리 갚아버렸다. 아우. 속이 다 시원하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캐시백.
11만 원 한 번이면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지만 200만 원이면 얘기가 다르다.
이거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지는데.
한국카드 앱에 접속해서 내 신용카드 한도를 찾아봤다. 만들 때 얼마로 설정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한도는 1천만 원이었다.
100 결제해서 220 벌었다.
만약 1천만 원 한도를 꽉 채워서 결제할 품목이 있다면 무려 2천 2백만 원이 들어온다. 몇 달 치 이자를 한 번에 갚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원금을 일부 갚을 수도 있는 액수다.
욕심이 생기네.
2번 연속 들어왔으면 당연히 3번째도 들어온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상품권을 한 번에 1천만 원어치 사고 싶었지만, 상품권은 한 번 결제에 100만 원이 한계다.
일시불로 살 수 있는 수량이 정해져 있었다.
내가 들은 음성 안내 주의사항에서는 분명 최고액 결제 1건에 대해서만 캐시백이 주어진다고 했다.
아쉽다.
상품권만큼 안전하고 확실한 게 없는데.
다른 방법을 한 번 찾아봐야겠어.
한도를 꽉 채우면서 일시불로 결제 가능하고 현금화도 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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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를 미리 내고 한숨을 돌린 14일 점심시간 때 오랜만에 남궁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남궁형께서 어인 일입니까?]
[이혼 어찌 돼가고 있나 궁금해서 전화했다.]
[이혼 이미 한 번 해보신 분이 뭘 그런 걸 궁금하실까.]
[너 동탄에서 아주 유명해졌더라.]
[예?]
[동탄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 너랑 이지영 사건. 종편 그거 무슨 프로그램이냐? 맞다. ‘이것이 이혼이다’. 거기 작가랑 피디가 냄새 맡고 수소문할 정도야. 대박이지?]
시발.
남들은 오픈한 식당 대박 나서 TV 나온다는데 나는 이혼이 대박 나서 얼굴 팔리게 생겼네. 모자이크랑 음성 변조 처리는 해주겠지만.
[안 합니다. 안 해요. 형 내가 미쳤어?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치게?]
[넌 당연히 안 하겠지. 하지만 이지영은 다르던데.]
그건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냐.
낯짝이 도대체 얼마나 두꺼운 건지. 누가 보면 내가 밖에서 애 낳아서 데리고 들어온 줄 알겠네.
[우리 가게 온 손님 중 하나가 그러던데 이지영이 촬영하는 걸 봤대.]
[아 진짜 환장하겠네.]
[저녁에 서울 가니까 한잔하자.]
[그럽시다.]
퇴근하고 남궁형과 고시원 근방에서 만났다.
“이지영 그 인간 얘기는 하지 맙시다. 술맛 떨어지니까.”
“싫은데. 히히힛. 술안주로는 최고잖아.”
“이혼해보신 분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 이혼은 비극이지만 남의 이혼은 코미디야. 우리나라도 이제 결혼 제도를 싹 뜯어고쳐야 돼.”
“뭘 어떻게 말이오?”
“씨발. 이게 말이 되냐? 여자 한 명하고만 평생 산다는 게. 성질 더럽게 급한 한국인 DNA랑은 안 맞는다 이거지. 결혼도 전세처럼 2년 단위로 하는 거야. 딱 2년만 사는 거지. 마음에 들면 계약 연장해서 2년 더 살고. 싫으면 갈라서고.”
“남궁형 벌써 취한 거야?”
“결혼 전에 각자 보증금 들고 와서 시작하는 거지. 갈라설 때 그 보증금 그대로 쥐고 헤어지면 깔끔하잖아. 어떠냐? 단기 결혼 전세 제도.”
어이없지만 그럴듯하게도 들린다.
“됐고. 하여튼. 형 상테크라고 들어봤어?”
“몰라. 차테크는 들어봤어도.”
“그거랑 비슷해.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한국카드 한도가 1천만 원인데. 1천만 원짜리 뭐 살만한 거 없을까? 현금화 쉬운 걸로.”
“이거 정신 못 차렸네. 옵션으로 쫄딱 망하고도 아직 카드 긁어서 헛짓할 궁리나 하고.”
“그게 아니야. 돈 쓰려는 게 아니라 벌려고 하는 거야. 자세히 말하긴 그렇고. 쉽게 얘기해서 내가 지금 카드 실적을 최대한 채워야 하거든. 뭔 방법 없을까?”
“낸들 어찌 알겠어. 워어어어. 어찌 알겠소~.”
“아무 데서나 노래 좀 부르지 마. 좀만 기다려. 곡소리는 내가 형 관 앞에서 실컷 해줄게.”
“씨발아. 오는 건 순서대로지만 가는 건 순서가 없어. 우드하우스 입주는 후배가 먼저 할지 누가 알겄냐.”
가만.
이 형 방금 ‘차테크’라고 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