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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하고 산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부장님 오셨어요.”
“서지오 씨. 잠깐 나랑 얘기 좀 할까요?”
“네. 그러시죠.”
이기수 부장이 아침부터 나를 찾는다. 무슨 용건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기수 부장이 옥상으로 부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우우우. 오늘 아침은 바람이 많이 부네. 좀 쌀쌀하지 않아요?”
“그렇네요.”
“우리 솔직해집시다. 내가 서지오 씨 결혼식에도 물론 갔었고. 그 종편 프로 말입니다. 집사람이 자주 보는 프로라 나도 어제 얼떨결에 봤어.”
“맞습니다. 제 얘기입니다.”
“후우우우.”
가슴이 답답하신가. 평소보다 담배 연기를 자주 내뿜는다.
“물론 이해는 해. 서지오 씨가 방송에 나가라고 부추긴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이 부장이 맞는 말 했네. 물론 앞부분만.
당연히 내가 부추길 까닭이 없지. 이지영은 이제 나랑 상관없는 인물이다.
심하다고 따지고 싶으면 이지영에게 가서 따져야지.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날 닦달한다고 이지영과 그 장모가 잠잠해지겠냐는 말이다.
“회사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 개인 사생활이고요. 전처와 장모였던 사람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대응 중입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라는 게 어디 그리 곧이곧대로 됩니까?”
“제가 부장님 밑에서 모시고 일한 지 꽤 오래됐는데요. 위로나 격려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이 부장이 오히려 당황한다.
“그. 그거야. 당연히 안타깝지. 이혼이 어디 보통 일인가. 하지만 너무 시끄러우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이혼은 원래 시끄러운 거 아니겠습니까. 제 잘못이라면 그런 여자인 줄 모르고 결혼한 죄겠네요. 그 부분은 분명히 제 탓입니다.”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구만. 야단치려고 부른 거 아니에요. 우리 사이 아무 문제 없는 거지요?”
“물론입니다.”
이 부장과는 처음부터 살가운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그저 흔한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였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따로 만난 적도 없고, 회식 때 아니면 같이 술 마실 일은 전혀 없었다.
과장이 되고 나서 영업 3팀 업무를 완전히 떠맡다시피 하게 되자 나도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팀 부장은 최소한 그래도 일하는 척이라도 하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회사에서 하는 일이 전혀 없다.
막말로 바로 앞에 지독한 똥차 하나가 가로막혀 있는 셈이다.
아직은 이 부장과 완전히 적대적으로 갈라설 때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나만 더 피곤해질 뿐이지.
“부장님. 죄송합니다. 결국 저 때문에 회사가 시끄럽게 된 건 사실이니까요.”
“우리 쿨하게 삽시다. 뭐 나도 뒤끝 있고 그런 사람 아닌 거 알죠?”
이 부장은 쿨한 게 아니라 회사 일에서 아예 손을 뗀 거지.
“앞으로 이런 비슷한 일 안 생기도록 서지오 씨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선에서 잘 관리하겠지. 깔끔한 성격이니까 믿고 있겠어요.”
은근히 압박을 준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서로 곤란해진다는 의미가 분명하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게 전부다.
“먼저 들어가요. 난 마저 피우고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9시 10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차지영도 오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가 아니었다.
5분 10분은 자기 마음대로 쿨하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넘어가 버린다. 반복돼도 이 부장은 전혀 주의를 안 주고.
나도 처음에는 몇 번 얘기해봤지만, 전혀 나아지질 않는다.
앞에는 이 부장이라는 똥차. 뒤에는 차지영이라는 무법 차량 사이에 낀 형국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 혹시 그거 보셨어요? 못 보셨으면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미 먼저 출근한 분들이 다 얘기해줬어. 종편 프로그램 말하는 거잖아. 내 결혼식에도 안 와본 사람이 모자이크까지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여자는 촉이란 게 있잖아요. 사모님이 엄청난 미인이라는 소문은 저도 들었거든요. 모자이크해도 딱 알겠던데요. 동탄이 넓은 동네도 아니고.”
“사모님은 빼. 곧 이혼하시잖아.”
차지영에 비하면 그나마 눈치가 있는 김호창이 날 대신해서 주의를 준다.
이 타이밍에서 내가 10분 늦었다고 야단치면 전처가 방송에 나온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짜증 부리는 돌아이 상사가 되는 건가.
이럴 때가 제일 곤란하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지.
“차지영 씨.”
“네?”
“저번 주에도 9시 넘어서 오더니 이번 주에 또 그러네.”
“죄송합니다.”
언제나 똑같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에 습관적으로 죄송합니다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이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덧붙이겠지.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래요. 주의합시다.’라고 처음 한두 번은 좋게 말했고.
그다음 몇 번은 ‘매번 이런 식이면 어떡해요.’라고 언성도 높여 봤다.
하지만 늘 똑같았다.
강 상무가 낙하산으로 꽂았고 이 부장이 대놓고 감싼다. 차지영 본인은 10분 정도는 그냥 별 상관없는 게 아니냐 라는 마인드고.
사람과 사람 간의 가장 기본적인 시간 약속을 항상 어긴다.
그런 인간과 계속 같이 일할 수 있을까?
능력이 없다면 최소한 성실하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너 대신 공채로 정정당당히 뽑혀서 들어왔어야 할 어떤 취업준비생 누군가가 덜 억울할 것이다.
새벽부터 영어 학원 자리를 맡으려고 줄을 서서 토익 900점을 만들어 온 그 누군가 말이다.
학자금 대출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배도 차지 않는 컵밥으로 점심을 때우는 그 누군가겠지.
“9시 넘어서 출근해도 주의할 필요 없는 다른 부서로 옮기세요.”
“네?”
“차지영 씨는 우리 부서에서 전혀 필요가 없어요. 가장 기본적인 업무조차 제대로 하는 게 없잖아요.”
“아니. 과장님. 그게 무슨.”
“차지영 씨. 과장님께 잘못 했다고 빨리 용서를 빌어. 지각했잖아.”
당사자인 차지영보다 옆에 있던 김호창 대리가 더 얼어붙었다.
“네. 정말 죄송하네요. 하필 과장님 사모님께서 종편 프로그램에 나온 다음 날에 늦어서요. 그것 때문에 지금 저한테 화풀이하시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해요.”
“9시부터 당장 업무 시작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부장님은 아예 10시 다 되어서야 자리에 앉으시고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정말 딱 맞다니까.
이 부장이 저 모양이니 이지영이 뭘 보고 배우겠냐.
차지영과는 얼마 전 고속충전기 허가 사건 때 이미 사이가 틀어졌다.
언제 한번 밥을 사겠다는 말로 적당히 넘어가려던 차지영과 분명히 선을 긋자 차지영도 깨달았을 것이다.
아 이 남자는 내가 애교나 여성스러움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놈이 아니구나 라고.
멀리서부터 담배 냄새가 슬슬 밀려온다.
곧 이기수 부장이 도착하겠네.
몇 초 후에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이 부장이 들어왔다.
사무실 분위기를 눈치챈다. 눈치 하나는 참 빠른 양반이란 말이야.
“왜 그래요? 무슨 일들이야?”
“과장님이 절 보고 다른 부서로 옮기시라는 데요.”
“아니 지영 씨를 왜?”
“10분 늦었다고 그러세요. 물론 제가 잘 한 건 아니지만. 겨우 10분 때문에 다른 부서로 가라는 건 좀 너무 심한 말씀 아니세요?”
“아이고. 그러게 좀. 지영 씨가 일찍 일찍 다니지 그랬어. 잘 한 것도 없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9시까지는 가급적 들어와요. 지영 씨는 우리 3팀 소중한 인재야. 가긴 어딜 가. 다들 알다시피 서 과장이 오늘 좀 예민하니까 모두 이해하고.”
명백한 차지영의 잘못을,
전처가 종편에 나온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옹졸하게 부하 직원을 야단친 내 탓으로 만들어버리는 건가.
참 잘 돌아간다.
과장은 힘이 없다.
사기업이야 오너 빼고는 다 똑같다지만 우리 회사 과장은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차장은 다르다.
미주그룹은 차장과 부장의 권한이 정확히 똑같다.
만약 차장을 달게 되면 내가 다른 부서로 옮기든 차지영을 쫓아내든 무조건 둘 중 하나다.
물론 차장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차장쯤 되면 과장의 발언권과는 비교도 안 된다.
비트코인 캐시백이 언제까지 계속 들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걸 믿고 회사를 때려치운다는 건 너무 위험해.
난 여기서 잔뼈가 굵은 몸이다.
일한 만큼 월급 받아먹을 수 있을 때까지 다 해 먹고 퇴사할 것이다.
“오늘 당장은 아니겠지만 몇 달 내로 제가 팀을 옮기든 차지영 씨가 다른 팀으로 가든 교통정리가 됩니다.”
“아니 서 과장. 그게 무슨 소리야? 교통정리라니.”
“이혼이 마무리되는 대로 근무부서 변경 신청서를 내겠습니다.”
내가 차장이 되어서 차지영을 내쫓겠다고 지금 말하는 건 너무 오버다.
“안돼요. 서 과장이나 차 지영 씨 둘 다 우리 팀원이야.”
내가 예뻐서 붙잡는 게 아니다.
자기를 대신해 일을 도맡아서 해줄 일꾼이 필요한 것뿐이다. 부서 변경 신청이 들어왔다는 건 영업 3팀 인사 조직 관리에 실패했다는 뜻이니 결사반대하겠지.
댁 사정 알게 뭐냐.
나는 내 갈 길 간다.
어수선한 분위기로 하루 업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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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님. 어제 제보 하나가 들어왔는데요. 요게 아주 대박의 스멜이 풍기네요.”
“뭔데? 요즘 시청자들은 어지간한 걸로는 자극을 못 받아. 좀 화끈한 거 없어?”
“새로운 소스는 아니고요.”
“그럼 관둬. 뻔한 거 재탕해봤자 국장한테 욕만 들어. 요즘 시청률 점점 떨어지는 추세라고 얼마나 갈구는지. 진짜 내가 때려치우든지 해야겠다. 전에 말했지. 원래 내 꿈이 교양 다큐멘터리 만드는 거였다고.”
“이번 주 방송 나간 그 여자요.”
“응. 색기가 장난 아니던데. 우리 팀 코디가 깜짝 놀라더라니까. 출연자가 자기 입을 옷 준비해 온 것도 웃기지만. 이런 걸 방송에 입혀도 되냐면서. 왜 관심 있어? 출연자들한테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그러면 안 돼. 시말서각이야.”
“그 여자에 관해서 익명으로 제보가 들어왔어요. 남편 몰래 부동산을 자기 앞으로 돌려놨대요. 공익적인 차원에서 꼭 내보내 달라는 데요.”
“공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교육방송에 전화하시라고 그러지 그랬냐.”
“그게 끝이면 제가 말씀드렸겠어요.”
“또 뭐 있어?”
종편 대표 예능 프로그램 ‘이것이 이혼이다’의 메인 피디가 이제야 관심을 보인다.
“바람피운 상대가 남편 대학 동창이래요. 그것도 둘씩이나.”
“그래?”
“거기다 그 둘이 강남역 술집에서 치고받고 싸웠대요. 서로 자기 아이라고 소리 질러가면서. 흐흐흐.”
“스톱. 잠깐만. 야~ 이거. 그림 나온다. 강남역 실제 그 싸움 장소 섭외하고 재연 배우로 좀 더 양념 뿌리면 볼 만 하겠는데.”
“게다가 한 명은 치과의사래요. 근처에 개업한. 다른 하나는 잠실 쪽에서 개인 병원 운영하는 의사고.”
“그래 이거지. 평범한 회사원끼리 싸우면 스토리가 안 돼. 근엄한 척하는 판검사끼리 붙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여자는 기왕이면 의사 말고 판검사를 꼬실 것이지.”
“아예 대놓고 재연 배우한테 의사 가운 입힐까요?”
“그건 너무 쌈마이 하지 않나?”
“피디님 우리 프로 장점이 뭐예요? 쌈마이도 그쪽으로 한 우물만 계속 파면 엄연히 예술입니다. 저 이래 봬도 막장에 인생을 걸었어요. 전 꼭 막장드라마 작가로 성공할 테니 두고 보세요.”
“김 작가는 참 특이해. 여자도 아니고 남자면서 막장물에 그렇게 집착하다니 말이야.”
“동네 병원은 입소문 한 번 퍼지면 끝인데 나중에 항의 들어오지 않을까요?”
“그건 일단 시청률부터 붙잡은 뒤에 법무팀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개인 유투버랑 다른 게 뭐냐? 책임은 회사가 지고 우리는 조회수만 끌어올리면 돼.”
“그건 그래요.”
“우리가 뭐 언제 방송 심의 걱정하면서 찍었어?”
메인 피디와 작가의 의견이 오랜만에 일치했다.
“카메라 들고 병원부터 들이닥쳐.”
“인터뷰 거부할 텐데요.”
“장사 원데이 투데이 해? 바로 그걸 찍는 거지. 조연출한테 모자이크 꼼꼼히 입히라고 전해라.”
“병원 주변 시민 반응도 찍어야겠죠?”
“아줌마들 위주로 찍어. 애를 옆에 데리고 있는 여자면 더 좋고. 욕은 삐 처리 잊지 마. 저번에는 왜 ‘발’을 지우냐. ‘씨’를 지워야지. 조연출 그 새끼 가끔 보면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그러는 것 같아.”
“알겠습니다.”
“김 작가. 우리 영상 예술 하는 사람이야. 작품 하나 만들어 보자. 쫄깃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