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21화 (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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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상 부부들의 근황

“지오야. 여기다.”

“응. 일찍 왔네.”

대학 동창 중 한 명인 나민수와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강남역에서 싸움판이 벌어지고 나서는 처음이네.

특별히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늘 그렇듯 이 녀석이 먼저 보자고 꼬셨다. 차암~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놈이라니까.

병맥주 몇 병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것으로 봐서 이미 한창 마시는 중이었다.

톡. 톡. 톡.

“무슨 톡이 그렇게 자주 오니?”

“이것저것 동호회다 뭐다 많이 가입해서 잠시만 한눈팔아도 메시지가 +999로 변해있어.”

참 대단한 놈이야.

전에 심심풀이로 요즘 유행한다는 MBTI 검사를 해 본 적이 있는데 나는 ‘ISTJ’였다. 긴가민가해서 몇 번 더 해봤는데 ‘INTJ’가 나올 때도 있었다.

재미 삼아 하는 검사여서 그런가. 오락가락하던데.

저놈은 분명 ‘E’로 시작하는 유형이겠지.

“휴우우~. 겨우 다 읽었네.”

녀석이 핸드폰을 재부팅한다.

“왜 꺼? 그냥 놔두지. 난 신경 쓰지 마.”

“아 이거. 듀얼유심폰이야. 폰 하나로 업무용이랑 개인용 번호 두 개 써. 톡 너무 많이 와서 그냥 아예 한쪽은 꺼놓을 때도 있어.”

“무슨 영업 사원도 아니면서 듀얼유심까지 쓰냐.”

“요즘 어지간한 직장인들은 다 이렇게 해. 사람 상대하는 직업은 더 하지. 써보면 얼마나 편한데.”

“그나저나 넌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더니 요새는 뭐하냐?”

얘는 원래 전형적인 공돌이였다.

공대 졸업하고 취직해서 한동안 잘 다니더니 갑자기 그만두고는 그 담부터 뭘 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를 안 해준다.

몇 년 전인가 갑자기 이혼했다면서 그러더니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도 입을 다물었다.

“그냥. 뭐 이것저것. 돈 되는 일 하지. 먹고 살아야 하잖아.”

오늘도 흐지부지 대답을 회피한다.

잘 나가는 동창들에 비해서 초라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이혼을 앞두고 옵션으로 거지가 되고 보니 저절로 공감이 가네.

“그래. 그런 얘긴 관두자.”

나민수가 병맥주 하나를 새로 딴다.

“너. 걔들 소식 들었냐?”

누굴 말하는지 알겠지만,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얘는 참 오지랖이 넓어. 당사자인 나도 관심이 없는데 그런 건 엄청 찾아다닌단 말이야. 호사가는 어쩔 수가 없구나.

“몰라. 관심 없어.”

“조아람 그 새끼. 집에서 쫓겨났대. 걔 되게 일찍 결혼했잖아. 큰 애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었나. 4학년이었나.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걔 부인 좀 못생겼잖아. 의대생이 왜 그렇게 일찍 결혼했는지 그땐 몰랐지. 속도위반으로 사고 쳐서 덜컥 발목 잡힌 건지도 모르고 우리끼리는 얼마나 뜯어말렸냐.”

“그랬었던가. 예전 일이라.”

“잠실 병원은 아예 문 닫았다더라. 요새 초등학교 5학년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인데. 자기 아빠가 텔레비전에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나왔으니 얼마나 쪽팔리겠냐. 애들은 한번 돌아서면 끝이야. 엄마 편들겠지. 걔 돈도 많이 못 모은 것 같던데 그거 와이프한테 전부 위자료로 주고 나면 순식간에 거지 신세지.”

“참 넌 귀도 밝다. 어디서 그런 뉴스를 다 주워듣냐?”

“재필이 알지?”

“누구?”

“그 왜 있잖아. 우리 동아리는 아니었는데. 우리 동아리 애들이랑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던.”

“아. 키 큰 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랬었잖아.”

“맞아. 걔가 조아람이랑 친하잖아. 재필이한테 들었어. 당장 돈이 없어서 재필이한테 원룸 월세 보증금도 빌렸다더라. 안 빌려주려고 하다가 불쌍해서 적선하는 셈 치고 줬대.”

그랬구나. 고소하다는 생각도 안 든다.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게 이런 감정이구나. 죽든 말든 알 게 뭐냐 라는 생각뿐이네.

“고준호도 타격이 장난 아닌가 봐. 걔 병원 처음에 오픈할 때 대출 많이 받았잖아. 우리한테 맨날 죽는소리하고 그랬던 거 기억나지?”

“그랬었지.”

“최근에 대박 터져서 이제 빚 다 갚고 딱 돈 쓸어 담으려는 타이밍에 일이 터진 거지. 내가 하도 궁금해서 강남역 갈 일 있을 때 걔 병원 근처로 지나가 봤거든. 오픈 라운지라 밖에서 보인단 말이야. 손님이 하나도 없어. 과장이 아니라 단 한 명도 없더라.”

“그래?”

“근처 부동산에 물어봤는데. 병원 내놨대. 나 같아도 그러겠다. 그 동네는 주변에 전부 아파트랑 빌라촌이라서 소문나면 끝이야. 치과가 거기 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넌 참 할 일도 없다. 훗. 어이가 없네.”

“재밌잖아. 기껏 터 다 닦아놓고 이제 돈만 벌면 되는데 홀라당 날렸으니까. 새로 병원 차리려고 해봐라. 돈 얼마나 많이 깨지겠냐. 모르긴 몰라도 최소 수억은 날아가는 거지. 준호도 곧 이혼할 거야. 걘 안 그래도 이혼하려고 전부터 벼르고 있었거든.”

이지영 하나 때문에 도대체 몇 팀이 이혼하는 거냐.

참 대단한 여자다.

진정한 팜므파탈이네.

“넌 앞으로 어쩔 거야?”

“회사 열심히 다녀야지. 옵션으로 망한 거 복구하려면 투잡이라도 뛸까 싶어. 대리운전하면 어떨까?”

“야 말도 마라. 대리운전이라고 쉽겠냐. 잠 못 자서 몸만 망가지고. 회사나 열심히 다녀. 하다 보면 언젠가 다 갚겠지. 사실대로 말해봐. 빚이 얼만데?”

솔직히 말해주려다 괜히 이 호사가 녀석의 뉴스거리 하나만 늘려주는 것 같아 관뒀다.

“몰라. 알려고 하지 마라. 언젠가 갚겠지.”

“오늘 술은 내가 살게.”

“좃나 고맙네. 그래도 술 사주겠다는 놈은 너뿐이구나.”

“친구 아이가.”

“도대체 언제적 영화 대사냐.”

그래도 불러서 위로해주는 놈은 나민수 너뿐이구나.

시시콜콜한 근황이나 주고받다가 적당히 헤어졌다.

민수랑 얘기할 때는 시큰둥했는데 고시원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생각할수록 깨소금 맛이네.

그래. 망해도 싼 애들은 쫄딱 망해야지.

이지영이랑 이혼한 건 어찌 보면 엄청난 전화위복이다.

마포대교에까지 올라갔었으니 나도 갈 때까지 다 가본 셈이지. 안 죽길 정말 잘했어.

그 후부터는 이상하게 모든 일이 잘 풀린다.

나도 이제는 꽃길만 걸어보자.

**

[상무님. 말씀하셨던 그 하숙향 씨 오셨습니다. 상무님 방으로 모실까요?]

[응. 아주 정중히 모셔.]

잠시 후 임누리 상무이사의 방문이 열린다.

어느 중년 여성이 남성 한 명과 함께 들어온다.

분위기로 봐서 저 남성은 아마도 변호사가 틀림없을 것이다.

여성 약간 뒤에 서서 보좌하는듯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하숙향 씨?”

“아이고. 상무님. 만나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나보다 나이는 많겠지만 편의상 말은 놓을게. 괜찮지?”

“네. 그럼요.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저긴 변호사야?”

“네. 저는 하숙향 씨 의뢰를 맡은 로펌 장앤.”

“내가 너한테 물었냐?”

“···.”

“아줌마.”

“네. 상무님.”

“남편 뭐해? 직업이 뭐야?”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만. 그럼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겠네.”

“아닙니다. 요즘 경기가 워낙 안 좋아서 말이죠. 저희 아빠도 많이 힘들어하세요.”

임누리 상무가 앉으라는 말이 없자 변호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의뢰인께서 고령이시고 이번 일로 심신이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의자에 앉아서 차분히 말씀을 나눠도 될까요?”

“이 쇼파 굉장히 비싼 거야. 최고급 천연 양가죽이지. 동물 중에서 사람 가죽이랑 제일 비슷한 소재라고 하더군. 너희가 여기 앉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냐?”

“상무님. 저는 하숙향 씨를 변호하는 변호사입니다. 여기서 근무하는 상무님 하인으로 취급하시면 곤란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놀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이봐요. 입조심 해. 상무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아니야 아줌마. 이 친구 말이 맞아.”

“그럼 앉아도 되겠습니까?”

“안돼.”

변호사는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 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의뢰인께서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계십니다. 따님이 남편에게 두드려 맞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벌인 점은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좋아. 계속해봐.”

“상무님께서 고소를 취소해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선처해주십시오.”

“아까 남편이 사업한다며?”

“네.”

“그럼 뭐 합의금이 부담도 안 되겠네? 듣자니까 어차피 기껏 몇십 아니면 몇백이라던데.”

“저희 같은 서민들한테는 그것도 아주 큰 돈입니다.”

“몇십 아끼자고 착수금 몇백을 들여서 변호사를 고용하는 게 더 웃기지 않나? 아줌마 전과 있어?”

“아니요. 전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없으면 감방은 안 가겠네. 판사가 벌금 때리면 그냥 그거 내고 남은 인생 전과자로 살면 되잖아. 뭘 그리 겁내.”

“하지만. 상무님.”

임누리 상무는 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장면을 보고 하숙향도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다.

“목 말라?”

“예. 사실은 긴장을 했더니 그렇습니다.”

“나중에 밖에 나가서 사 마셔. 이거 비싼 물이야.”

하숙향이 안절부절못하자 변호사가 대신 입을 연다.

“상무님. 인간적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나이 드신 분입니다.”

“칠순은 안 된 것 같고 환갑은 지났나?”

“네.”

“그 나이 처먹도록 배운 짓이 겨우 깽판은 신나게 부리고 나중에 찾아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거야? 하긴 그게 너 같은 인생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겠지.”

“상무님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저희 의뢰인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만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느끼는 발언은 삼가주십시오.”

“내가 왜 저 아줌마를 만나 주겠다고 한 줄 아냐?”

“이유가 뭡니까?”

“호기심이야.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궁금해서. 감히 어떤 년이 겁대가리 없이 내 회사에 기어 들어와서 꼬장을 부렸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 이제는 흥미가 사라졌으니 그만 나가.”

“너무 하십니다. 제 의뢰인께 이렇게까지 모욕적인 말만 일방적으로 늘어놓고서는.”

임누리 상무가 컵에 든 물을 천천히 마저 다 마신다.

“내가 물을 마시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우선 합의는 절대 없어. 고소 취소도 당연히 없고. 그리고 이 재판은 무조건 대법원까지 올라간다.”

“대체 왜 그런.”

“몇 달 지나면 난 저 아줌마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를 만큼 까맣게 잊겠지. 하지만 저 아줌마는 어떨까? 일개 동네 아줌마가 기업을 상대로 재판을 몇 년 동안 질질 끌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이 재판은 내가 무조건 이겨. 우선 너희 기준에서는 변호사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겠지. 나야 법무팀 애들 일거리만 늘어날 뿐이고.”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재판이란 게 그렇다더군. 사람 피 말리는 짓이라면서? 난 대법원까지 질질 끌 거야. 상소하고 또 하고 모든 수단 방법을 안 가릴 생각이고 재판은 계속 연기해서 몇 번이든 계속 물고 늘어지는 거지. 그렇게 한 3년? 그 정도 시간 끌면 화병이 생긴다던가. 알아서 몸져눕는다고 들었어.”

“이 시발놈의 개새끼야.”

“그래. 아줌마 바로 그거야. 서민이라도 패기 있는 서민으로 살자. 멋지다. 부라보.”

짝짝짝짝.

임누리 상무가 박수를 치자 하숙향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뒤에 서 있던 변호사가 서둘러 막지 않았다면 또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내 시간을 쓰레기들과 노느라 너무 낭비했네. 약간 짜릿하긴 했어. 이제 꺼져.”

우우웅. 우우웅.

“그래. 뭐야? 어. 어. 그래? 들어오시라고 해. 아주 정중히 모시는 거 잊지 말고.”

임누리 상무가 전화를 끊고 하숙향을 바라본다.

“애미가 오니까 딸년까지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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