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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기다리는 백마
똑똑.
“이사님. 이지영 씨가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화장은 과하지 않았다.
복장도 수수했다.
그러나 전략적인 포인트는 확실히 살리고 있었다.
“아이고. 지영아. 여기 이놈이.”
“이지영이라고 합니다.”
“아줌마랑 변호사는 나가.”
“글쎄 이 미친놈이 뭐라는 줄 아니? 별것도 아닌 사건을 대법원까지 일부러 질질 끌겠단다. 오직 이 늙은 몸 하나 괴롭히겠다고. 흑흐흐흑.”
“엄마. 사람들 앞에서 울지 마. 내가 알아서 알게.”
“니가 뭘 어떻게.”
“걱정하지 말고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변호사님. 엄마 모시고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변호사가 하숙향을 데리고 나간다.
“먼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저를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저지른 죄를 대신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임누리가 생수병의 물을 컵에 절반쯤 따랐다.
“고소를 취소해주십시오. 합의금은 원하시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컵을 천천히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신다.
“변호사님이 그러시는데 이런 사건에서 통상적인 합의금은 벌금의 3배 정도까지 된다고 하시더군요. 1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합의해주십시오.”
“나보다 어린 것 같으니 말 놓을게.”
“그렇게 하시죠.”
“싫어.”
이지영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떻게 하면 어머니에 대한 고소를 취소해주시겠습니까?”
“서지오 과장 말로는 자기가 안 때렸다던데. 어떻게 된 거지?”
“그 사람이 늘 하던 대로 거짓말입니다.”
“맞았다는 부위는 어디야? 얼굴은 멀쩡한데.”
“시간이 지나서 상처가 가라앉은 것뿐입니다.”
“한 명은 맞았다. 한 명은 안 맞았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 만약에 말이야. 서지오 과장 말이 맞다면 너한테 속아서 유능한 직원 하나를 자를 뻔한 셈이 되거든. 생각해봐. 내가 얼마나 화가 날까?”
“제 말이 맞다면요?”
“그러면 서 과장한테 아주 큰 일 생기는 거지.”
“수사가 진행 중이니 차분히 기다리시면 되겠네요.”
이지영이 쇼파 쪽으로 다가온다.
“앉아도 될까요?”
“안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지영은 임누리 상무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진로를 잘못 골랐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화류계로 진출했으면 대성했을 거야.”
“훗. 그런 얘기 가끔 들어요.”
“오늘이 따뜻한 날씨도 아닌데 굳이 맨발에 발목이 드러나는 얇은 치마를 입고 온 것부터 시작해서.”
“제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지.”
임누리 상무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이리저리 검색한다.
“로테이션은 꽉 찼고 디저트는 자리가 있어.”
“···.”
“법무팀 애들이 그러던데. 고소 취소는 1심 판사가 판결 때리기 전까지만 하면 된다더군. 1심 판결 전까지 고소를 취소하겠어.”
“합의금은요?”
“그건 니가 몸으로 때워야지.”
“디저트가 그런 의미였냐?”
“너희 집구석에서 내가 받아낼 만한 건 그것뿐이야.”
이지영이 손에 쥔 핸드폰 화면을 임누리 상무에게 보여준다.
“이거 보여?”
“녹음 어플이네.”
“임누리 씨. 여기 들어오면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대화 전부 다 녹음돼 있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야. 변호사님이 그러시더라고. 모든 상황을 녹음하는 게 좋겠다고. 엄마랑 너랑 한 대화도 변호사님이 전부 녹음하셨을 거야.”
“잘 했네.”
“이걸 가지고 바로 우리나라 언론사 한 바퀴 전부 돌 수도 있어.”
“그러든지.”
“미주그룹 이미지가 얼마나 나빠질까.”
“아마 꽤 나빠지지 않을까? 후흐흐.”
이지영이 핸드폰 녹음을 잠시 정지시켰다.
“엄마에 대한 고소 취소해줘. 민사도 포함해서 전부. 그럼 없던 일로 할게.”
“야.”
“···.”
“녹음 다시 시작해라. 버튼 어서 눌러. 잘 들어. 넌 디저트도 안 되겠다. 화장실로 정했으니까 그리 알아. 콜하면 달려오고 용무 마치면 꺼져. 기간은 1심 판결 나기 전까지만이야.”
“뭐? 화장실?”
“너네 애미 판검사들한테 불쌍하게 보이려고 휠체어 타고 왔다 갔다 할 거잖아. 니가 3년 동안 계속 휠체어 뒤에서 밀고 법원 들락날락하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이지영은 당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신 나간 놈이 분명했다.
“회사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소리야?”
“이 병신아. 그런 걸로 망할 회사였으면 진작 망했겠지.”
“잠깐만. 일단 고소부터 취소해줘. 그럼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
“이게 감히 어디서 날 등신으로 알고.”
“약속은 분명히 지켜. 날 믿고 고소부터 취소해줘.”
“남편 몰래 다른 놈이랑 붙어먹고 애를 둘씩이나 만들었다면서. 그런 년 말을 믿을 만큼 멍청한 놈으로 보이냐?”
“그건 서지오가 자초한 짓이야.”
“됐고. 내가 전화하면 30분 내로 강남 쪽으로 와. 할 말은 다 했으니 꺼져.”
“억지 부리지 말고 우리 차분히 얘기해. 동탄에서 어떻게 30분 만에 강남으로 와?”
“그거야 니 사정이고. 강남 근처에 오피스텔이라도 하나 구하든지.”
“그럼 당신이 오피스텔 하나 마련해 주면 되잖아. 기왕이면 내 이름 앞으로 해서.”
임누리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내가 블랙 화이트 옐로우 레드까지 전부 골고루 많이 만나봤는데 말이야. 참 희한해. 유독 우리나라 여자들만 그렇더라고. 어떻게 해서든 남자 등쳐 먹으려고 들거든. 아주 사소한 거 하나부터 해서 전부 말이야.”
“···.”
“전에 연예인 어떤 게 나한테 그러더라고. 주 1회 월 4회 기준으로 매달 3천만 원으로 정하자고. 첫 달은 선불로 먼저 다 주고 일산에 아파트 하나는 자기 이름으로 전세 얻어주는 조건으로. 당연히 거절했지. 만질 곳도 없는 조그만 년 주제에 더럽게 비싸잖아. 내가 왜 너를 만나려는지 아냐?”
“왜?”
“싸니까. 저렴한데 쓸만하잖아. 가성비가 아주 좋단 뜻이야. 넌 주제 파악부터 좀 해라.”
“···.”
“그런 표정으로 노려봤자 니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재판이 너무 길어져서 애미가 도중에 죽어버리면 어떻게 할래? 효도는 살아 있을 때 해야지. 노인들은 재판받다가 화병으로 몸져눕고 다시는 못 일어나는 경우도 흔하다던데.”
“그만해.”
“1심부터 대법원까지 아주 질질 끌 거야. 판사한테 말해야겠어. 난 아주 바쁜 몸이니 재판 좀 연기해달라고. 미루는 방법이야 수십 가지겠지. 내용증명은 매주 집으로 보내줄게. 나중에는 초인종 소리만 들려도 경기 일으키게.”
“이 개자식아.”
“처음에는 휠체어 타는 게 연기였겠지만 나중에는 진짜로 휠체어 없이는 거동도 못 하게 만들어 줄게.”
“···.”
“주제를 알았으면 이제 꺼져. 전화번호는 비서실에 남겨두고.”
이지영이 쇼파에서 일어섰다.
“30분 만에 여길 오는 건 힘들어. 그리고 2주에 한 번만으로 정해.”
“30분이야. 늦으면 고소 취소는 없어. 2주가 아니라 내가 부를 때마다. 그게 내가 정한 가격이야.”
“하지만 이건 너무.”
“너한테 쩔쩔매던 사내새끼들한테 하던 버릇으로 나한테 까불면 곤란해. 그만 나가봐.”
이지영이 말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왜?”
“앞으로는 임누리 이사님이라고 불러.”
“흥. 그럴게.”
“그럴게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따라 해봐.”
“유치하게 이러지 마.”
“엄마를 생각해야지. 알겠습니다.”
“진짜.”
“어서.”
“임누리 이사님.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말투가 불손해. 다시.”
“흐으음.”
“한숨부터 건방져. 다시.”
이지영이 핸드백을 양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임누리 이사님.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잠깐.”
“왜 그러시는지요?”
“고개를 숙여야지.”
“안녕히 계십시오.”
“더. 더 숙여. 그래. 더. 지금 각도를 기억해. 이제 정말로 꺼져.”
이지영은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퇴장했다.
**
[서지오 씨. 접니다. 독고재.]
[아 네. 회장님. 어쩐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라요. 아주 괜찮은 녀석을 하나 발견했어요. 지금 여유만 있으면 내가 한번 키우고 싶을 정도로 아주 예뻐요.]
독고재 회장이 저리 탐을 내다니 무슨 차길래.
[이태리 스포츠칸데. 원래 사려던 차주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먹거리면서 인수를 거부했나 봐요.]
[그럼 전에 말씀하셨던 인수거부차 아닙니까?]
[그렇죠. 그때 인수거부차는 별로 추천을 안 드렸었죠. 이번에는 달라요. 제가 직접 차 상태를 전체적으로 꼼꼼히 체크했습니다. 완~벽해요. 퍼펙트. 대리점에 전시해놓은 것도 아니었어요. 임시번호판 달고 그냥 창고에 처박혀 있기만 했더라고요.]
[그렇습니까? 회장님께서 추천하실 정도면 믿을만하지요.]
[하하하하. 고마워요.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이 바닥이 특히 그런데. 신용 없이는 절대 안 됩니다. 양아치 짓 했었더라면 지금 킹카 동호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가 없었지요.]
[저도 주변에 차 사시려는 분들에게 항상 킹카 동호회를 알아보라고 말씀드립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차가 좀 너무 튀어.]
[네? 어떻길래요?]
[도장이 올 화이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 보기 드문데. 외국에서는 흰색이 의외로 인기가 있어요.]
흰색 스포츠카라.
확실히 어지간한 관종이 아니고서는 타고 다니기 힘들겠구나.
[그러면 구매자를 찾기가 아주 힘들지 않을까요?]
[맞아요. 그래서 좀 애매합니다. 대신에 가격이 너무너무 좋아요. 전에 서지오 씨가 그랬잖아요. 중고차로 바로 팔 생각이니 손해를 최소화하고 싶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땐 제가 세금 제외하고도 30만 원쯤 손해 보고 중고차로 팔았었죠.]
저번 달에는 국산차를 2400만 원 일시불로 결제했다. 이번 달 14일에 비트코인 캐시백이 들어온다면 5280만 원.
지금 기분 같아서는 당연히 입금될 것 같지만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멈출 수도 있다.
문득 처음 캐시백 문자를 받았던 때가 떠오른다.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갈등하다가 마감 시간 12시를 1초도 안 남기고 선택지 중에서 3번 비트코인 캐시백을 골랐다.
그때 후회하고 머뭇거려서 12시를 넘겼더라면 지금 이런 행운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저하지 말자.
앞으로 달려가다 보면 길은 저절로 열린다.
그 길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보자.
[대리점이 아주 처치 곤란이라면서 최대한 싸게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거든요. 제발 누구든지 좋으니 살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면서 파격적인 가격을 제시했습니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임자를 잘 만나는 게 최대 관건인데. 그건 하늘이 정해주는 거지요. 우리가 어떻게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사겠다는 사람이 빨리 나타나면 좋겠네요.]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누가 알겠습니까? 내일이라도 갑자기 귀인이 짜잔 하고 등장할지.]
[계약금은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그것도 제가 대리점이랑 딜을 했습니다. 최대한 깎아봤죠. 가계약금으로 50만 원 대리점 계좌로 입금해주면 맡아 주겠답니다.]
이건 투자다.
좋은 매물을 발견했는데도 고작 50만 원이 아깝다고 주저한다면 다른 임자가 채갈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차가 계속 안 팔리더라도 가계약금 50만 원 날리는 것뿐이지. 수억 원 빚에서 50만 원 늘어나는 게 대수겠나.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자주 올까?
무조건 잡아야 한다.
[차 가격은 얼마인가요?]
[서지오 씨 카드 실적을 채우는 게 목표라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좀 쎄요. 일단 카드사에 전화해서 한도 일시 상향이 그만큼 되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차 가격은 4억 5천만 원입니다.]
4억 5천.
예전에 한창 아파트 대출받아서 살려고 알아볼 때가 생각나네. 주택 가격이 폭등하기 직전이었다. 그 당시 변두리 어느 아파트 매매가에 맞먹는다.
만약 다음 달 14일 220% 비트코인 캐시백이 정상적으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무려 9억 9천만 원.
빚을 한 번에 싹 다 갚을 수 있는 돈이다.
[하겠습니다. 카드사에 전화해보고 곧바로 50만 원 계좌로 이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