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23화 (2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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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청한 날씨가 이어준 인연

[방금 내 방 나간 여자 말인데.]

[네. 상무님.]

[전화번호를 알려줄 거야. 그때 핑곗거리 만들어서 핸드폰 뺏어.]

[네? 핸드폰을 뺏으라고요?]

[그래. 뭐 이유야 아무거라도 갖다 붙이면 되지. 회사 기밀 유지 차원에서 모든 방문객한테 의무적으로 한다고 둘러대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핸드폰에 보면 녹음 어플이 하나 있을 거야. 녹음 데이터 싹 다 지워. 복구 불가능한 방법을 찾아봐.]

[알겠습니다.]

비서실 직원이 임누리 상무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영 일행이 비서실에 도착했다.

“메모지 하나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실례지만 핸드폰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제 핸드폰을요? 왜죠?”

“저희 회사에 들어오시실 때 방문증을 발급받으셨죠?”

“그런데요.”

“방문증에 적힌 연락처와 핸드폰 번호가 제대로 일치하는지 체크하기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 방문하시는 내빈들 모두 공통적으로 확인하는 절차이니 양해해주십시오.”

“그래요? 그냥 번호 불러 드리면 되잖아요.”

“죄송하지만 그건 무리가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가끔 연락처를 정확히 말씀 안 해주시고 아무 번호나 기입하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지영아. 해 주고 빨리 가자. 이 빌어먹을 놈의 회사는 꼴도 보고 싫어. 내 핸드폰은 여기 있으니 조사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요.”

“알았어. 엄마 잠깐만 기다려. 번호가 일치하는지만 체크하는 거 맞죠?”

“네. 그렇습니다.”

이지영 모녀와 변호사가 핸드폰을 비서실 직원에게 내밀었다.

비서실 직원이 하숙향과 변호사의 핸드폰을 이리저리 터치해 설정에서 휴대폰 정보에 들어간다. 번호를 방문증 작성 서류와 비교한다.

다음으로 이지영의 핸드폰을 터치한다.

“지영아. 상무님이 뭐라고 하시디?”

“내가 알아서 처리했어. 걱정하지 마. 고소 취소할 거야.”

“정말이냐? 이게 다 서지오 그 개자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아이고. 상무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결국 말이 통하는 분이셨네.”

“임누리 상무를 어떻게 설득하신 겁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앞으로 저희 엄마 재판은 어떻게 될까요?”

“크게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흉악 범죄도 아니고 사모님께서 고령이시고 미주그룹 측에서 합의만 해준다면 벌금형 선고유예 정도로 마무리될 겁니다.”

비서실 직원이 꾸물거리자 이지영이 기다리다 슬슬 짜증을 부린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죠? 단순히 핸드폰 번호 확인하는 것뿐이잖아요.”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조작에 서툴러서요.”

“온 국민이 쓰는 똑같은 핸드폰에 조작이 서투를 게 뭐가 있어요. 번호 확인하는 거야 몇 초도 안 걸릴 텐데.”

“거의 다 된 모양입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비서실 직원이 핸드폰 3대를 한꺼번에 들고 온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럼 다 된 거죠?”

“네. 그만 가보셔도 되겠습니다.”

“엄마. 어서 가.”

“그래 가자.”

이지영이 핸드폰을 받아쥐고 화면을 터치해본다.

겉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우려했던 일은 없는 듯 보였다.

다시 화면을 끄고 핸드백에 집어넣으려다가 문득 기분이 이상했다.

단순히 핸드폰 번호 확인하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나?

게다가 이지영 자신은 이미 메모지에 따로 핸드폰 번호까지 적어줬다.

무언가 어색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자 곧바로 녹음 어플을 확인해봤다.

녹음 어플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저장 파일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그럼 그렇지 역시.

곧바로 발길을 되돌렸다.

“저기요. 이거 어떻게 된 거죠? 제 핸드폰에 있던 파일 하나가 아예 없어졌던데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잡아떼지 말아요. 녹음 어플에 있던 파일 댁들이 지웠지?”

“무슨 오해가 있으셨나 봅니다. 저희는 단순히 선생님의 핸드폰 번호가 방문증 서류에 적힌 것과 맞는지 확인만 하고 곧장 되돌려드렸습니다.”

“웃기지 마.”

“지영아. 왜 그래? 무슨 일이냐?”

“훗. 엄마. 얘들이 내 핸드폰 함부로 건드렸어. 변호사님. 이거 무슨 죄로 처벌할 수 있죠?”

“사실이라면 통신비밀보호법에 저촉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저희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죠.”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오 알았어. 당신들 각오해.”

“지영아. 내가 무슨 일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괜히 여기 직원들이랑 싸워봤자 우리한테 득 될 게 뭐 있겠냐.”

“엄마 가만있어 봐.”

“이러다가 임누리 그게 나한테 고소 취소 못 해주겠다고 마음 바꾸면 어쩌니.”

“엄마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른 문제야.”

변호사가 옆에서 상황 돌아가는 걸 지켜본다.

“저희 핸드폰을 수거해가신 장면이 찍힌 CCTV가 있을 텐데요. 마침 저기 CCTV가 보이네요. 열람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죄송하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저희가 임의로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나오시겠단 말인가요. 이러면 아주 곤란한데요.”

“저희는 단순히 방문객들의 휴대폰 번호와 방문증 서류 인적사항이 일치하는지 확인만 하고 휴대폰을 돌려드렸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문의 사항은 없으신가요?”

“변호사님. 어떻게 하죠?”

“일단 이 사람들이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따로 경찰에서 영장을 들고 오지 않는 이상 확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할까요?”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비서실 직원들이 듣지 못하는 곳으로 이지영 모녀를 데리고 갔다.

“역시 변호사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과찬이십니다.”

“내가 비싼 돈 주고 큰 곳에 맡기길 잘 했지. 안 그러냐 지영아?”

“어쩌면 그렇게 저쪽 애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정확히 예측하셨어요?”

“이쪽 계통의 일을 하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됐습니다. 그럼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쯤에서 더 소란 피우지 말고 물러나도록 할까요?”

“맞아. 지영아. 그렇게 하자. 여기서 혹시 더 시끄럽게 굴면 임누리 그 개새끼가 혹시 마음 바꿔서 진짜로 대법원까지 끌고 가면 어쩌니. 진짜 미친놈 같더라. 그런 새끼는 최대한 상대 안 하는 게 좋아. 일단 고소 취소부터 시켜놓고 보자.”

“엄마 알았어. 걱정하지 마. 엄마 고소만 취소되면 임누리 그것도 보내버려야지. 내가 절대 가만 안 놔둘 거야.”

주위에서 행여나 누가 들을까 변호사가 더 음성을 낮춘다.

“제가 따로 준비해드린 녹음기는 문제없이 작동하던가요?”

“네. 제가 일부러 최대한 그놈 가까이 다가갔어요. 핸드백은 항상 열어서 손에 쥐고 있었고요.”

이지영은 자신의 핸드백을 가리켰다.

“초소형 고성능 녹음기라서 녹음은 확실하게 됐을 겁니다.”

“심장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 미친놈이 혹시라도 내 가방 뒤질까 봐.”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미끼를 던져 놓자고요. 이렇게 대놓고 핸드폰으로 녹음한다고 보여주면 절대 따로 녹음한다고 짐작 못 합니다. 사람 심리가 그렇습니다. 눈앞에 확실한 대상이 있으면 그것에만 온 정신이 팔리거든요.”

“흐흐흐흐. 그것들 지금쯤 증거를 깨끗이 지웠다고 안심하고 있겠네요.”

“네. 여기서 더 지체하지 마시고 서둘러 미주그룹을 벗어나시죠.”

“네. 변호사님. 엄마 어서 가자.”

**

미주그룹 임태수 회장은 외부 일정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바람은 꽤 불었지만 오랜만에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공기는 깨끗하고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좀 걷고 싶어졌다.

“김 기사. 주차장 말고 다른 곳에서 내려줘.”

“네? 회사로 들어가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야.”

“비서실에는 뭐라고 말씀드릴까요?”

“날씨가 좋아서 한 바퀴 돌고 바람 쐬다가 들어간다고 전해.”

“어디 세워드릴까요?”

“요 앞에 내려줘.”

“알겠습니다.”

회사 근처 자그만 공원 앞에 차는 정지했다.

임태수 회장은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켰다.

바람이 거셌지만, 오히려 상쾌했다.

한가로이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이렇게 낯선 사람들 틈에 파묻히는 것도 기분 전환이 되었다.

이게 어린 친구들이 말하는 ‘힐링’인 건가 싶었다.

임태수 회장은 관상 보는 게 오랜 취미였다.

전문적으로 공부한 건 아니지만 사람 얼굴을 지켜보는 건 참 재미있었다.

남자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데. 링컨이었나.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못생긴 것으로 유명한 사람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오히려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 건 뭘까.

사람을 뽑을 때도 관상을 본다.

관상이라기보다는 인상이 더 정확하겠지만.

지나치게 혐오감을 주는 얼굴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채용하기 힘들었다.

반면에 좀 부족해도 얼굴에서 저절로 친근감이 들고 믿음직해 보이는 인상이라면 무조건 뽑았다.

지금까지 항상 첫인상과 결과가 일치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거의 들어맞았다.

인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임태수는 그걸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인상은 잘생기고 예쁜 것과는 또 별개였다.

잘생겨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못나더라도 정감 있는 얼굴이 있다.

지금까지 늘 임태수 회장은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동료든 친구든 사랑이든.

하지만 사람 마음이 늘 똑같기만 하다면 인생사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가끔은 인상이 별로지만 끌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주 드물어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사람들 얼굴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회사 건물에 거의 도착했다.

저길 들어가면 또 비슷비슷한 서류를 읽고 똑같은 표정의 직원들을 마주하려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얼굴은 늘 한결같았다.

친절 뒤에 숨겨진 경멸.

아니면 굴종 밑으로 스며 나오는 분노.

이 나이 먹도록 갈 곳이 겨우 회사뿐이라니 참 서글프단 생각이 문득 든다.

회사 건물 로비에 들어섰다.

얼굴을 아는 경비들이 머리를 숙인다.

경비직원이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눌러준다.

누가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만들자고 건의했을 때 단칼에 거절했다. 재벌 그룹도 아니고 엘리베이터가 수십 대 있는 건물도 아닌데 무슨 그따위 짓을 하냐면서 오히려 야단쳤다.

띠링.

위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더니 1층에서 멈춘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임태수 회장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옆으로 비켜 서 있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굳이 사주팔자를 따져보지 않더라도,

저절로 뿜어나오는 지독한 도화살(桃花煞).

얼굴이 하얗고 전체적으로 선이 굵지는 않다.

눈망울이 크면서 눈동자는 흰자위가 확 드러나는 삼백안. 거기에 속눈썹이 아주 길어서 눈만으로도 촉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코는 크지 않고 동글동글하다. 코마저 날카로웠다면 악녀처럼 보였을 텐데, 의외로 아이 같은 코가 성숙한 눈매와 중화돼 악독한 이미지는 풍기지 않았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고 입술은 붉은색이 선명하고 작은 편이었다.

모녀로 보이는 닮은 두 여성.

그런데 참 이상하다.

분명히 저 둘 중 하나를 어디서 봤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희미한 과거를 되새길 틈도 없이 사람들 무리에 휩쓸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계속 그 생각이 든다.

누구였을까? 누구였지? 언제였더라?

재채기를 하려다 만 것 같은 불쾌감.

나이를 먹은 게지.

언제인지도 모를 과거에 사로잡혀 쾌청한 남은 오후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오후에 다른 일정도 없었다.

오랜만에 차나 구경하러 갈까?

그러고 보니 새 차를 안 산 지도 1년이 넘었다.

취미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국내 내놓으라 하는 어느 거대 재벌 총수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임태수 회장도 자동차 마니아였다. 그렇지만 성격상 무작정 차를 사들이지는 않았다.

오늘 같은 기분일 때는 스포츠카가 제격이지.

가까운 이태리 브랜드의 대리점으로 향했다.

차를 구경하러 가는 날은 언제나 참 즐겁다.

생애 첫차로 낡아빠진 중고차를 샀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 옛날이지만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그 고물차로도 그땐 그렇게 행복했었는데.

수십 년 전의 그 두근거림을 안고 매장을 방문했다.

“아이고. 회장님. 이게 얼마 만이십니까. 좀 자주 들러주십시오. 저희 다 죽겠습니다.”

“하하하하. 오랜만이기는 하네요. 요새 사업이 어떠세요?”

“말도 마십시오. 불경기에다가 사람들이 지갑을 안 여네요.”

“구경 좀 하러 왔습니다.”

“천천히 느긋하게 둘러 보십시오. 음료수는 뭘 준비할까요?”

“됐습니다.”

“여기 회장님 보이차 준비해 드려. 귀빈께서 오시면 저희가 항상 한번 맛보시라고 드립니다.”

“귀빈은 무슨. 하하하. 괜히 부담되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특별히 마음에 드는 차는 없었다.

표정을 살피던 매니저가 다가온다.

“찾는 모델이 따로 있으세요?”

“그건 아니고. 그냥 오랜만에 놀러 왔지요.”

“전시된 차 중에서 회장님 눈에 들어오는 게 없으시면 저희 뒤쪽 창고로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거기도 몇 대 있습니다. 여기 공간이 비좁아서 거기에도 놔뒀거든요.”

“그럴까요? 가봅시다.”

임태수 회장은 매니저와 함께 안내받은 창고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오직 단 하나.

임태수 회장은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차를 보고 심장이 떨리기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저 흰색.”

“아~ 예. ···.”

그런데 매니저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좀 자세히 보고 싶은데요. 가능하겠습니까?”

“저 그게. 실은 저 차는 이미 어떤 손님께서 가계약금까지 지불하신 상태라. 하아아~ 이거 참.”

“그래요? 안타깝구만.”

임태수 회장은 못내 아쉬운지 흰색의 아름다운 자태 주변을 몇 번이고 맴돌았다.

볼수록 미려한 바디였다.

“이 색깔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주문하셔도 상당히 오래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무슨 다른 방법이 없을까.

“혹시 그 가계약 하셨다는 분과 제가 따로 한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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