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26화 (26/65)

────────────────────────────────────

────────────────────────────────────

14일의 방문객

“임하나.”

“알았어요.”

“뭘 알았다는 거냐?”

“성까지 같이 부르실 때는 그런 의미잖아요. 지금부터 아빠가 하는 얘기 잘 들어라. 이게 다 널 위해서야. 그러니 제발 좀 시키는 대로 해. 아닌가요?”

“직장 생활하고 싶다며? 엄마가 그러더라.”

“대학원으로 백수 아닌 척하는 것도 이젠 무리예요.”

“원서 냈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창피해서 난 그 꼴 못 본다.”

“아빤 참.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요. 남들도 다 그렇게 원서 여러 군데 내서 면접 보고 다니는데.”

“우린 재벌은 아니지만 난 재벌가들이 이해가 돼. 재벌가 3세들이 왜 자기 집안 회사에 취직하는 줄 아냐?”

“다른 회사 다니기에 걔들은 너무 유명해서 그런 거죠. 전 아무도 몰라요.”

“다 알아. 요즘 세상에서는 숨길 수가 없어. 괜히 남의 자리 하나 뺏지 마라. 결국에는 모두 너한테 되돌아와.”

“···.”

“왜 말이 없어?”

“아빠.”

“왜?”

“제가 남이 하는 쓴소리 잘 듣는 거 아시죠?”

“내가 남이냐?”

“제가 미주그룹 들어가면 오히려 모두 불편해하실 텐데. 차라리 우주처럼 그냥 빈둥거릴까.”

“그건 안 돼. 집안일 도와야지.”

임태수 회장은 큰딸 임하나와 대화할 때마다 매번 같은 감정을 느낀다.

참 닮았다.

어쩜 저리도 자신과 똑같을까.

생각에 잠길 때 다리를 꼬고 발목을 돌리는 버릇도 똑같다.

“다음 주부터 출근해.”

“싫은데요.”

“만나는 남자 없지?”

“왜 없다고 생각하세요?”

“척 보면 알지.”

“우리 집은 다른 집에 비해서 부녀간에 대화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영업팀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 우리 회사가 어떻게 돈 버는지 직접 느낄 기회야.”

“글쎄요.”

“안 되겠네. 신용카드 압수할까?”

“아빠.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아니. 전혀. 다음 주부터 출근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 신입 사원 연수는 굳이 따로 필요 없을 거다. 어차피 공채도 아니고. 직접 부딪히면서 배우는 게 최고지. 회사에도 그렇게 말해 놓는다.”

말만 저렇게 하지 결국 아빠 말을 잘 듣는다는 걸 알고 있다.

임태수 회장은 자식 중에서 임하나가 회사를 이어받았으면 싶었다.

남들은 상속세 내는 게 버거워 회사를 외국계 헤지펀드에 팔아치우거나 물적분할을 선택하지만 임태수 회장은 자신이 수십 년 동안 키워온 회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자신의 핏줄을 이은 임하나가 미주그룹을 승계하는 것.

그것이 현재로서는 임태수 회장의 가장 큰 희망 사항이었다.

**

어느덧 세 번째다.

첫 14일은 에이 설마? 진짜로 캐시백이 오겠어? 보이스피싱 문자였겠지. 전혀 기대를 안 했다면 솔직히 거짓말일 테고. 모닥불 위로 흩날리는 한 점 ‘불티’만큼의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긴 했다.

그런 심정이었다.

두 번째 14일은 빨리 와라. 어서. 그래 이거지. 아싸 드디어 왔네.

세 번째 14일을 불과 몇 분 앞둔 지금.

너무나 담담하다.

익숙해지는 건 어찌 보면 정말 무서운 일이네.

이러다 만약 안 들어오면?

그건 상상하기도 싫다.

12:00

띠링.

[캐시백 전송을 시작했습니다.]

하아아. 안도감에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띠링.

문자는 12시 29분에 다시 도착했다.

[캐시백 전송을 완료했습니다.]

저번 달보다 두 번째 문자가 오는 시간이 더 단축됐다. 매번 캐시백 전송이 완료되는 시간이 약간씩 다르다. 비트코인이라는 시스템 때문에 그렇다고 들었다.

비트업 거래소에 곧바로 로그인했다.

1.4269 (BTC.)

한국 돈으로 5260만 원어치의 비트코인이었다.

저번 달 2400만 원을 긁었었다.

원래라면 2400만 원의 220퍼센트인 5280만 원어치여야 하지만 고작 30분 만에 비트코인 가격이 약간 하락했다. 이 정도 손해는 어쩔 수 없지.

비트코인이란 놈은 가격 변동성이 장난 아니네. 더 떨어지기 전에 곧바로 팔고 현금으로 인출 신청까지 마쳤다.

52,574,000원.

캬아아아.

짜릿하네. 바로 이 맛이지.

난 그저 신차를 한 대 샀다가 곧바로 팔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2.2배의 돈이 다음 달 14일 통장에 꽂힌다.

음성 안내에서 들었던 것처럼 캐시백이 앞으로 무한정 무기한 들어온다면 난 죽을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건가?

떼부자 수준 정도가 아니다.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연구해봤다.

금이나 명품 시계 등등.

하지만 모두 카드 한도 1천만 원에 가로막힌다.

한도를 뛰어넘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자동차 구매뿐이었다.

이번 달에는 4억 5천을 일시불로 긁었다.

다음 달 14일이면 9억 9천이다.

이대로라면 난 매달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꼴이다.

그것도 앞으로 평생 죽을 때까지 계속.

돌았구나. 돌았어.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고 이대로 쭈우욱 가자.

옵션이고 나발이고 이제는 다 끝났다.

거지 같던 내 인생도 안녕.

다음 달 9억 9천만 원이 들어오면 뭘 할지 행복한 고민을 거듭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

.

.

“좋은 아침. 호창 씨 일찍 오네.”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 그거 들으셨어요?”

김호창 대리가 도착하자마자 가방도 안 내려놓고 호들갑부터 시작한다.

“뭘?”

“오늘 오는 신입 사원 있잖아요.”

“응. 저번 주에 신입 받는다고 공문 내려왔잖아.”

“흐흐흐흐. 놀라지 마세요.”

쓸데없이 뜸 들이기는. 걸그룹 멤버라도 온다는 거냐?

“누가 오는지 맞혀 보세요.”

“아침부터 웬 퀴즈?”

“어젯밤 제가 사내 게시판에서 들은 겁니다. 아주 특급 정보라고요. 회장 첫째 딸 탑4 임하나가 온답니다.”

그래?

의외로 별 느낌이 없다. 그런가보다 싶네.

재벌도 아니면서 재벌가 흉내라도 내고 싶은 건가.

귀찮게 막내 평사원으로 밀어 넣지 말고 곧장 이사 자리 하나 만들어 주지. 그게 뭐 어렵다고.

괜히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휴먼스토리라도 꾸며주고 싶은 건가.

“정말이긴 한 거야? 하긴 오늘 도착하면 알겠지.”

“틀림없어요. 비서실 직원 중 하나로 추정되는 녀석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떠벌이더라고요.”

“그럼 맞겠네. 나야 별 상관없지만 호창 씨가 부담되겠어. 잘 가르쳐봐. 고생문이 훤하다.”

“듣기로는 엄청 미인이라던데요.”

“회장 사모가 전직 탤런트잖아. 딸이니까 당연히 예쁘겠지.”

“훗후흐흐흐.”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리 음침하게 자주 웃어.

“과장님. 이건 진짜 과장님이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뭐 또 있어?”

김호창 대리가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차피 우리 둘뿐인데 뭘 그리 티를 내냐.

“과장님 이건 절대 모르실걸요. 솔직히 확실한 건 아닌데 저도 사내 게시판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었어요.”

“어디서?”

“외부 커뮤니티예요. 취업준비 할 때는 그런 얘기가 재미있더라고요. ‘공부하기 싫다’ 싶을 때 읽으면 시간도 참 잘 가고요. 재벌 야사. 비사. 그런 거 말입니다. 연예인 누가 유명 재벌 누구 첩이더라더라.”

얘도 보면 참 특이한 놈이야.

“거기 게시판에서 그러던데 예전 주간지에 실린 기사 중에서 우리 회장이랑 회장 사모에 관한 게 있었대요. 둘 다 초혼이 아니래요. 회장 사모는 다른 남자랑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었고 회장은 쌍둥이 딸 둘이 있었던 거죠. 사모 노미숙은 혼인신고는 안 했지만 다른 남자랑 살다가 지금 회장이랑 결혼한 겁니다. 회장 전처는 쌍둥이를 낳다가 그만 죽었대요.”

남의 가정사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의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뭐냐.

“그랬구나.”

“별로 안 놀라시네요.”

“그런 경우도 가끔 있으니까. 쌍둥이만 불쌍하네.”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난다.

설마 이기수 부장이 이 시간에?

“좋은 아침.”

“부장님 오셨어요.”

“오셨습니까.”

“오늘 신입 사원 한 분 오시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신입 사원한테 한 ‘분’이라니?

이 부장은 벌써 알고 있던 건가.

사내 정보가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양반이다.

“다들 친절하게 대해 드리고. 가만있어보자. 오늘 점심을 그러면 어디서 먹을까. 김 대리. 오늘 골목백반 가는 요일이었지?”

“네. 다른 식당 예약할까요?”

“그게 좋겠어. 그분이 뭘 좋아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네 백반집은 좀 그렇잖아. 김 대리. 요즘 20대 여성들은 뭘 좋아해?”

여자친구도 없는 녀석이 그걸 알 리가 있나.

“아무래도 크림 파스타 같은 게 아닐까요? 떡볶이는 점심으로 먹기 좀 그렇고.”

“맞아. 역시 김 대리의 젊은 감각은 알아줘야겠어.”

아이고. 이런 답답한 인간들이랑 같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내가 불쌍하다.

“그냥 우리가 늘 먹던 대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야. 좀 있다 차지영 씨 오면 물어봐야겠어. 그나저나 나 어때? 담배 냄새 많이 나나? 들어오기 전에 손 씻고 입도 구강청결제로 여러 번 헹궜는데.”

어쩐지 평소보다 담배 냄새가 줄었다 했다.

“오늘은 훨씬 덜 하십니다.”

“그래? 몇 번 더 헹궈야겠네. 담배도 미리 피워놔야지.”

똑똑.

이 시간에 누가 문을 두드린다. 손님이 방문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데. 차지영이 문을 두드릴 리는 없고.

“네. 들어오세요.”

끼익.

단번에 누군지 알겠네.

난 임태수 회장 장녀 임하나의 얼굴을 모른다.

하지만 외부인 방문이 1년에 몇 명 되지도 않을 영업 3팀에,

9시가 되기에는 아직 한참 많이 남은 이른 시간,

거기에 이런 누추한 곳을 방문하기에는 지나치게 과할 만큼의 미모.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임하나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여기 영업 3팀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외워왔냐?

신입 사원의 FM스러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사말이었다.

“어? 아~. 그. 그래요. 임하나 씨. 어서 와요.”

이기수 부장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거린다. 자기가 예상했던 임하나의 등장과는 전혀 달랐나 보네.

“가만있어보자. 일단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부장 이기수라고 합니다. 여긴 서지오 과장. 그리고 이쪽은 김호창 대리. 아직 출근 안 한 직원이 있는데. 차지영 씨랑은 이따가 인사 나누시고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려요. 임하나입니다.”

김호창 대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기수 부장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임하나를 쳐다본다.

“자리는 어디가 좋을까요? 책상이랑 의자는 저번 주 일단 여기 뒀는데. 여긴 너무 출입문 근처고. 호창 씨 나랑 같이 듭시다. 이걸 저쪽으로 옮기자고.”

“네.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여기도 좋은데요.”

“아니에요. 여긴 너무 번잡해서 불편하실 거야. 저기가 창가 쪽이고 경치도 좋으니까 저리로 옮기자고. 호창 씨 어서 들어.”

신입 사원 자리를 안쪽 창가로 옮기는 것도 웃기지만, 평소라면 당연히 나랑 김호창에게 시켰을 것을 굳이 자기가 솔선수범하는 게 더 어이없네.

하여튼 쇼에는 진심인 양반이라니까.

아 진짜. 저러면 임하나가 오히려 얼마나 불편하겠냐. 그냥 가만 냅두는 게 도와주는 거지.

임하나 너도 참 부장복은 없구나.

이 부장이 기어이 팔까지 걷어붙이고 책상을 옮긴다.

임하나가 창가 쪽 책상에서 멀뚱멀뚱 시간을 보내는 사이 9시가 넘었다.

차지영은 오늘도 지각이네. 구제 불능이다.

끼익.

9시 20분이 되어서야 차지영이 도착한다.

“죄송합니다. 버스 배차 간격이 너무 길어져서요. 한 대 놓쳤더니 한 참 뒤에 오지 뭐예요.”

이기수 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차지영 씨. 시계 봐봐. 지금 몇 시야? 엉? 몇 시냐고? 정신이 있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몇 번 째야. 회사가 장난이야?”

갑자기 왜 저래?

차지영이 제일 많이 놀란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화내실 줄은 몰랐네요. 신입 직원 앞에서 절 이렇게 야단치시면 제가 너무 창피하잖아요.”

“창피? 차지영 씨는 경위서 작성해요. 최근 한 달 동안 사원증 찍고 출근한 시간 기준으로 분 단위까지 체크해서 모두 기록하고.”

“···.”

“왜 대답이 없죠?”

“알겠습니다.”

낙하산이다.

아주 크고 거대한. 우리 영업 3팀을 전부 감싸고도 남을 큰 낙하산이 내려왔다.

그에 비해 차지영은 강 상무가 꽂은 아주 조그만 낙하산. 임하나가 훅하고 불면 당연히 날아가 버릴 하찮은 사이즈다.

어느 낙하산에 붙어야 살아남을지 이 부장은 귀신같이 벌써 계산을 끝마쳤다.

지각이 일상인 직원을 감싸다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이 부장 스스로 더 잘 알겠지.

오전 내내 임하나가 차지영과 김호창에게 이것저것 배웠다.

“자 점심 먹으러 갑시다. 오늘은 임하나 씨도 처음 왔으니 점심은 제대로 먹어야겠죠? 하나 씨가 메뉴 골라봐요. 뭐 먹고 싶어요?”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아이. 그러지 말고 편안하게 같은 식구끼리 먹는다고 생각하고 말해봐요.”

괜히 임하나만 난처해지지.

어차피 금방 먹고 들어올 건데 점심시간이 아깝다.

“오늘 원래 골목 백반 가는 요일이니 거길 가는 게 어떨까요? 저번 주 갔을 때 거기 사장님이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다음 주는 후식으로 식혜 나온다고요.”

난 식혜를 아주 사랑한다.

특히나 매콤한 찌개를 먹고 나서 후식으로 살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식혜를 먹으면 그건 진짜 아후우.

골목 백반집은 단맛이 너무 강하지 않으면서도 뒷맛이 깔끔한 진짜배기 식혜를 직접 만들어서 후식으로 제공한다. 이건 무조건 가야지.

“식혜요? 저 식혜 굉장히 좋아해요. 그 골목 백반이라는 식당에 가고 싶습니다.”

“그래요? 뭐 그럼 그러지. 하나 씨가 좋다니까. 그럼 점심 먹으러 갑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