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28화 (2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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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 저 너머

이번 달 월차를 안 쓰고 아껴두길 정말 잘 했네.

원래 대로라면 흰색 스포츠카를 거래할 때 썼어야 했지만 하필 구매자가 임태수 회장이라 소중한 월차를 세이브했다.

회장 개인 업무 수행 중이었다니까 이 부장이 오히려 쩔쩔맸었지.

한국카드 담당자와는 아주 힘들게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달 일시불로 4억 5천만 원을 긁지 않았더라면 절대 만나주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재직증명서나 기타 필요한 서류도 미리 발급받아서 한국카드로 향했다.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미주그룹 영업 3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지오입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카드 회원 심사 운영 파트에서 일하고 있는 이유한입니다.”

명함을 교환하면서 서로 어색하게 웃었다.

가끔 밖에서 업무상 외부인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항상 이 분위기였다.

하얀색 명함 한 장.

어떤 노예선을 타고 있는지, 그 노예선 어느 층에서 근무하는지, 실제로 노를 젓는지 아니면 노잡이들을 감시하는지 등등.

이 조그만 명함 하나로 대강 파악이 끝난다.

명함을 처음 팠을 때가 기억나네.

나도 드디어 이 세상의 일원이구나.

명함을 처음 교환할 때도 괜스레 뿌듯했었다.

과장이 되고 나서 ‘과장’이란 두 글자를 추가하니 더더욱 그랬다.

“이런 경우가 참 드물어서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고민했었습니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카드사를 직접 방문해서 상담하겠다는 사람은 없겠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신용카드 일시 상향을 원하신다면서요.”

“네. 어쩌다 보니 두 달 연속으로 차를 구매하게 됐습니다.”

“다음 달에 또 신차를 구매하실 계획이신가요?”

“그건 아닙니다. 다른 용도로 카드를 결제하려고 합니다.”

“무슨 용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일시 상향은 사실 어떤 용도인지가 제일 중요해서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뭘 구매할지 아직 못 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 달 9억 9천만 원을 결제할 생각입니다.”

“네?”

상대가 놀란다.

명함을 교환하고 간단히 인사만 나눠봐도 이놈이 미친놈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다.

날 만나주고 계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대화를 이어나갈 여지는 충분하다.

놀라는 건 예상했던 바다.

“신용카드라는 게 결국 수수료 장사 아니겠습니까. 9억 9천만 원을 긁으면 수수료만 2천만 원입니다. 저 혼자만 개인 신용카드 회원 1천 명분이죠.”

“그러니까 고객님 말씀은 어디에 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달 9억 9천만 원을 결제하신다는 말씀이신 거죠? 저희가 개인카드 한도를 그렇게 높게 설정해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카드사는 카도 한도 설정 시에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 고려하기 때문에. ···.”

상대의 설명이 구구절절 길어질 것 같다.

적당히 얘기해서 돌려보내야지 하는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 밀어붙여야 한다.

“예치금을 가상계좌로 미리 입금하겠습니다. 다음 달에 한국카드 가상계좌로 9억 9천만 원을 입금하겠습니다. 제가 다음 달 카드를 긁게 되면 카드대금으로 곧장 인출되도록 해주십시오.”

신용카드란 건 결국 한 달 미리 땡겨쓰는 거다.

그 대가로 신용카드사는 수수료를 받고.

“이보다 안전할 수가 있을까요? 카드 결제 대금 못 받을 염려도 없고. 한국카드사는 2천만 원 수수료도 챙기시고요.”

“···.”

“사람이 하는 일이잖습니까. 찾아보면 방법은 늘 있기 마련입니다.”

날 더 꼼꼼히 훑어보는 게 느껴진다.

옷은 뭘 입고 있는지, 시계는 무얼 차고 있는지, 구두는 뭘 신고 있는지까지 점검하는 기분이다.

돈이 어디서 나냐?

그렇게 대놓고 묻고 싶은 표정이네.

미주그룹 과장이라고 해봤자 월급은 뻔한 텐데 집안이 부자인가?

아니면 최근에 주식 투자로 크게 한탕 벌었나?

그것도 아니면 따로 사설 도박장이라도 운영하는 녀석인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요. 고객님께서 직접 저희 카드사를 방문해주신 것부터 해서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해주시는 것도 그렇고. 흐으음.”

고민하지 마라.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너한테 나쁠 건 전혀 없다.

한국카드사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더 벌게 해주는 직원이 고마울 뿐이지. 오히려 유능한 직원이라고 평가가 좋아질걸.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자금 출처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작정 믿으라고만 하면 나 같아도 안 믿겠다.

누가 그러던데.

완벽한 진실보다는 거짓이 첨가된 진실이 더 믿음직한 법이라고.

“사실 제가 비트코인 투자로 돈을 좀 많이 벌었습니다.”

“아 네. 그러셨군요.”

돈 벌었으면 현금다발로 펑펑 쓰든지 계좌이체 하면 되지 굳이 왜 카드 한도를 따로 높여가면서까지 신용카드를 쓰려는 거냐? 라는 질문은 안 던지네.

“카드로만 거래하겠다는 곳이 아주 드물지만 가끔 있어서요.”

“네. 그래서 굳이 카드 한도를 높이시려는 거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따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다시 전화 드려도 되겠습니까?”

“다음 달은 9억 9천만 원이지만 다다음 달에는 더 늘어날 겁니다. 예치금도 물론 그만큼 미리 입금하겠습니다. 수수료 많이 받아가시면 한국카드사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확률은 반반이다.

정 안 되면 1천만 원 한도에서 적당히 현금화 쉬운 거 사고 가끔 신차 구매하면 되지.

던질 수 있는 카드는 다 던져 놓고 카드사를 빠져나왔다.

위이잉. 위이잉.

나온 김에 이것저것 소소한 볼일을 보고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울린다.

[안녕하십니까. 아까 말씀 나눴던 이유한입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지금 제가 불러드리는 서류 몇 가지를 팩스나 이메일로 보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목록은 문자로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죠.]

바로 다음 날 또 전화가 걸려왔다.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저번에 말씀해주셨던 신용카드 한도 일시 상향 건이 승인되셨습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지만 내부 심사를 거쳐서 고객님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드렸습니다. 앞으로도 가상계좌에 입금된 예치금 범위 내에서 계속 상향된 한도가 적용되십니다. 즉 매달 예치금만큼 한도 일시 상향이 승인되시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도움이 됐다면 기쁘겠습니다. 실은 저희 한국카드 내부적으로 타사의 블랙 카드에 대응하는 자체 브랜드를 준비 중이었거든요. 약간 변형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고객님께서 저희 한국카드 새 브랜드 ‘렉스’의 사실상 첫 번째 고객님이 되시는 셈입니다. 축하드립니다.]

**

“다녀보니까 회사 생활은 어떠니?”

“사람들이 왜 월요일 병에 걸리는지 알겠던데요.”

“훗.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누군 출근하고 싶어서 하겠니.”

임태수 회장은 장녀 임하나가 엄살 피우는 게 사랑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했다.

나갈 필요도 없는 회사를 굳이 자기 입으로 가겠다고 우겨서 꾸역꾸역 매일 출근한다.

“영업 3팀 사람들은 어때?”

“다 좋은 분이시던데요.”

“첫인상이 중요하지.”

“첫인상 때문에 첫날 점심 먹다가 죽을뻔했어요.”

“왜?”

“아버지가 항상 그러셨잖아요. 음식을 복스럽게 먹어야 한다고. 그래서 첫날 점심으로 부대찌개를 먹는데 복스럽게 먹으려고 얼마나 과식했다고요. 평소보다 2배 넘게 먹었어요. 오후 내내 배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첫날이라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고. 와아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

“흐흐흐흐. 그랬구나. 이 부장은 어떠냐?”

“아주 엄한 분이시던데요.”

“그래?”

“제가 간 첫날 누가 지각했거든요. 아주 무섭게 화를 내시지 뭐예요.”

“서 과장은? 서지오 과장 말이야.”

임태수 회장은 장녀가 서지오 과장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 지가 제일 궁금했다.

“얘기해본 적은 별로 없어서 모르겠지만 좋은 분 같으시고요. 김호창 대리랑 차지영이라는 직원도 다 괜찮은 분들 같고.”

“그래. 어딜 가나 사람을 잘 만나는 게 제일 중요해. 영업 3팀이 우리 회사 영업팀 중에서 실적이 가장 좋아. 서지오 과장이 영업 3팀의 핵심 인재니까 니가 옆에서 보고 배우면 도움이 많이 될 거다. 이것저것 알려달라고 먼저 많이 물어봐.”

“그럴게요.”

“서 과장은 최근에 이혼했다던데.”

“이혼하셨어요? 그랬구나.”

“요즘 이혼은 흠도 아니지. 더구나 서지오 과장 그 전처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다더라.”

“무슨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넌 요즘 만나는 남자 없지?”

“시집가라고 벌써부터 압박하시는 건 아니시죠?”

“어차피 결혼할 거면 한 살이라도 이른 나이에 하는 게 좋지. 안 그러니?”

“요즘 서른도 안 돼서 누가 결혼해요?”

“배우자는 주변에서 구해. 괜히 멀리서 찾지 말고. 인연은 늘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야.”

임하나가 한숨을 내쉰다.

“지금 제 주변에는 담배 냄새 지독한 아저씨랑 툭하면 얼굴 빨개져서 더듬거리는 대리, 그리고 막장드라마의 주인공뿐인데요.”

“하하하. 그중에 고르라면 그래도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이 제일 괜찮아 보이는데. 주인공은 주인공이잖아.”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인연은 가까운.”

“아빠. 알았다고요.”

더 말하면 반발심만 커질 것이다.

임태수 회장은 큰딸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서재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열어서 내용물을 유심히 살펴봤다.

사진들이었다.

얼마 전 비서실에 따로 한 가지 일을 시킨 적이 있다.

자신이 흰색 스포츠카를 발견한 날 회사 1층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두 모녀.

그 두 모녀가 자세하게 나온 엘리베이터 CCTV의 영상을 출력하라고 지시했었다.

사진은 해상도가 아주 높았다. 최대한 정면으로 잡힌 사진도 몇 장 있었다.

그런데 볼수록 기가 막혔다.

특히 딸로 추정되는 저 젊은 여성.

저렇게 화기(火氣)가 강한 관상을 임태수 회장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주변 모든 것을 활활 불태워서 집어삼키고도 모자랄 상이었다.

분명히 두 모녀 중 한 명을 어디서 봤었다.

두 모녀의 인상이 비슷해서 더 헷갈린다.

최근은 분명 아니고. 도대체 언제였지? 아주 오래전인가? 오래전이라면 최소 수년 전? 아니면 십여 년 전? 모르겠다.

위이잉. 위이잉.

[응. 나야.]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무슨 일이지?]

[김 국장님이랑 만나실 약속이 모레로 잡혔습니다.]

[알았어.]

술자리 접대는 항상 기분이 나쁘다.

어쩌겠나. 답답한 쪽이 우물을 파는 거지.

우리나라는 공짜술을 몰래 사주고 정기적으로 선물을 찔러줘야 한다.

그래야 될 일이 더 빨리 쉽게 된다.

그나마 세상이 많이 변해서 이 정도지.

예전에는 술을 안 사 먹이면 당연히 됐을 일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술자리에서는 여자도 빠질 수가 없다.

꼭 요구하는 놈들이 아직도 있었다.

이번 김 국장이라는 놈이 그랬다.

핸드폰 주소록에서 정 씨를 검색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개인 휴대폰과 업무용 휴대폰 말고 3개월마다 새로 개통했다가 곧바로 해지하곤 하는 낯선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번호라도 정 씨는 항상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오랜만입니다. 접니다. 제 목소리 잊어버리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군요.]

[아~. 회장님이셨군요. 정말 오랜만이시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굳이 안부를 물으러 전화 주시지는 않으셨을 테고. 이번에는 몇 명 필요하세요?]

[섭외되는 대로 두세 명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시간이랑 장소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저도 나이를 먹어서 들으면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호호호.]

[하하하. 저도 요즘 그렇습니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길게 통화하기는 부담스러웠다.

[오야께서 원하는 취향이 따로 있으세요?]

[그 사람 취향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남자라면 다 젊고 예쁜 여자 좋아하겠지요.]

[제가 알아서 잘 초이스 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소개해드린 친구 중에서 실망시켜드린 적이 어디 있었나요? 호호호.]

맞아 그랬었지.

정 마담은 실망이 아니라 항상 최고의 결과를 도출해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여자들을 발굴해내는 건지.

응?

임태수 회장은 옆으로 밀쳐놓았던 사진을 다시 집어 들었다.

몇 가지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뿔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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