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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궁
분명 그 여자였다.
십 년도 더 지난 옛일.
서재 책상에 앉아 있지만 기억은 십여 년 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도 일 년 중 이맘때였었나? 아니지. 더 이른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겨울인 것만 같았던 어느 봄날이 분명했다.
가끔 접대 술자리를 갖곤 했지만 그 날은 유난히 더 불쾌했다.
접대해야 하는 상대방이 임태수 회장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어느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어색한 술자리에서 정 마담의 여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여자는 제일 마지막에 들어왔다.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서 그리 특출나게 뛰어나지는 않았다. 함께 들어온 여자들이 얼굴만 보면 더 예뻤다고 기억된다.
그 여자의 장점은 분위기였다.
단순히 색기 한 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끈적한 분위기.
그땐 지금의 관상과는 약간 달랐다.
지금처럼 이렇게까지 심한 화기(火氣)는 없었다.
아직 어려서 그랬나?
스물을 갓 넘겼을 법한 앳된 인상.
그 자리에서 민증 검사를 할 것도 아니었고. 정 마담은 굳이 미성년자를 내보낼 정도로 멍청한 위인도 아니었다.
그 여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국회의원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다른 건 기억 안 나지만 아주 당돌했던 건 분명했다.
‘남자친구 있어?’
국회의원이 던진 질문에 그렇게 답했었다.
‘아주 많죠. 제 남자친구 하실래요?’
술자리의 모두가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꼴 보기는 싫지만 피할 수가 없는 그 국회의원과의 불쾌한 술자리.
일부러 술을 잔뜩 들이붓고는 너무 취했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머지 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게 뭔가.
그 국회의원이 서지오의 전처를 선택했는지 아닌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분명 술자리의 그 여자가 확실했다.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몰라도 관상은 훨씬 안 좋은 쪽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럴 리는 없지만 임태수 회장은 혹시 자신의 기억이 틀린 건 아닌지 확인을 해두고 싶었다.
[사진 하나를 보낼 테니 누군지 봐 주십시오. 전화를 끊고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네? ···. 그러시죠.]
[잠시 후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 문자로 전송했다.
띠링.
위이잉. 위이잉.
전화를 다시 걸기도 전에 정 마담 쪽에서 먼저 결려온다.
[여보세요.]
[이년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정 마담의 말투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
[저도 어디 사는지는 모릅니다.]
[회장님께서 어떻게 이 사진을?]
[이 여자 어머니가 우리 회사에 와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어서 어쩌다 얽히게 됐지요. 누군지 전혀 생각이 안 나다가 방금 떠올랐습니다.]
[그러셨군요. 회장님도 그년 때문에 피해를 입으셨군요.]
[정 마담은 무슨 일이십니까?]
[제 돈을 떼먹고 튀었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필요하다고 하도 사정하길래 빌려줬더니 그 후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한두 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임 회장은 물어보려다가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 관뒀다. 분노에 찬 정 마담의 목소리로도 어느 정도 액수일지는 짐작이 갔다.
[엄마 수술비로 급히 필요하다면서.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라길래 급하게 마련해줬었죠. 발견했으니 꼭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야겠네요. 회장님. 오늘 말씀하신 술자리 약속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엄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매번 고맙습니다.]
[그년에 대해서 더 아시는 게 있으면 좀 알려주십시오. 주소나 연락처 같은 거라든지요.]
[알아보고 다시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실은 사진 속 인물이 제 부하직원 어느 과장의 전처입니다.]
[그것이 결혼도 했었군요. 하긴 얼굴이 반반하니 남자들이야 줄을 섰겠지요. 좀 의외네요. 회장님께서 들으시면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그게 평범한 회사원이랑 결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분명 어느 돈 많은 남자 첩질이나 하고 있겠거니 싶었는데.]
서지오 과장 집안이 부자라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다.
[과거를 숨기려고 그랬나 보죠.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연락처를 알아보고 문자 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괜히 서지오 과장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됐다.
[혹시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 부하직원과는 관련이 없겠지요? 이혼소송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같이 살고 있는 사이라면 남편에게 대신 책임지라고 한번 말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혼 중인 사이면 남보다 못한데 남편에게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년이나 그년 부모를 족쳐봐야지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임태수 회장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곤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서지오의 전처가 단순히 회사로 찾아온 것 자체만 보면 별일 아니다.
문제는 면담을 가진 상대가 하필 큰아들 임누리 상무였다는 것.
[여보세요. 나다.]
[네. 곧 집에 들어가려는 참인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들어오면 서재로 올래?]
[···.]
[할 말이 있어서 그렇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임누리 상무가 집에 일찍 들어온다. 평소에는 항상 자정을 훌쩍 넘겨 들어오거나 아니면 아예 안 들어오더니.
똑똑.
“들어와라.”
“부르셨습니까?”
“응 거기 앉아.”
“···.”
“요즘 회사 분위기를 보니 뒤숭숭하더구나. 다들 자기 책상이 갑자기 없어지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야.”
“그것 때문이셨군요. 언젠가는 거쳐 가야 할 과정일 뿐입니다. 미주그룹은 인건비 비중이 너무 높습니다. 회사에 도둑놈이 썩어 넘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사람 한 명 자르는 것도 정말 힘들다. 법이 그래. 너도 알잖니.”
“그렇다고 짐덩어리들에게 계속 밥을 먹여주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벌써 살생부라도 작성한 모양이구나.”
“누굴 살릴지 누군 죽일지는 분명하니까요.”
임태수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었다.
탑1 임태수 회장이 여전히 대표이사기는 하지만 탑3 임누리가 등기이사 자리에 오르면서 자질구레한 사안은 모두 임누리가 처리한다.
인력 감축 문제는 오늘 얘기하고 싶은 사안이 아니다.
“결혼은 아직도 생각이 없니?”
“마흔 넘기기 전에는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세월 다 간다.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식부터 올리자. 솔직히 말해봐.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는 있니?”
“···.”
결혼이라도 하면 정신을 차릴까 싶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서지오 과장의 장모와 전처가 얼마 전 회사로 찾아왔다고 들었다.”
“그 문제라면 아버지가 신경 쓰실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장모라는 여자가 회사로 찾아와서 난동 좀 부린 별거 아닌 일입니다.”
“회사에서 서지오 과장의 전처를 만나보니 어떻더냐?”
임누리가 자세를 고쳐앉는다.
괜스레 서재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양손을 깍지끼고 우두득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긴장하거나 당황했을 때 임누리가 늘 하던 버릇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임태수 회장이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
“회사 밖에서 서지오 과장의 전처를 따로 만난 적이 있니?”
“···.”
“아직 안 만났다면 다행이고 만났다면 앞으로 절대 연락하지 마라.”
“왜 그러십니까?”
“아주 안 좋은 관상이야. 도화살이 흘러넘치다 못해 주변까지 물들이는 얼굴이다. 특히 너와는 상극 중의 상극이야.”
“흐으음. 아버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깟 관상으로 사람을 평가하시나요. 차라리 요즘 유행한다는 MBTI가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데요.”
“이번에는 내 말을 들어. 그 여자는 절대 만나지 마라.”
임누리 상무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제 장난감입니다.”
“···.”
“가지고 놀다 싫증 나면 알아서 버리겠습니다. 어차피 그럴 용도밖에 안 되는 여자니까요.”
“그만두라니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고작 그깟 여자 하나 가지고. 제가 밖에서 수많은 여자 만나고 다닐 때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
노미숙과 재혼했을 때 임누리는 이미 7살이었다.
임태수 회장이 친 아빠가 아니라는 것쯤을 알고도 남을 나이.
재혼 후에도 임누리가 여전히 친부와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알고 있었다.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천륜을 어찌 끊을 수가 있겠나.
차라리 말하지 말까.
임누리의 성격상 만나지 말라고 해서 그만둘 리가 없다. 몇 번 만나다 그만둘지도 모르고.
하지만 영 찝찝했다.
“너희 친아버님께서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
“네.”
“그분과 관련 있는 여자일 수도 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분은 너도 알다시피 꽤 유명한 정치인이셨다. 나랑 같이 술도 몇 번 마셨고. 술자리에 서지오 과장의 전처가 함께 있었어. 물론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난 일찍 귀가했기 때문에 너희 아버님과 서지오 과장의 전처가 그날 어떻게 됐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훗후흐흐.”
“왜 웃니?”
“어쩐지. 그 여자를 처음 봤을 때 제가 그랬거든요. 진로를 잘못 골랐다고요. 화류계로 나섰으면 대성했을 거라고 말했었죠.”
“괜히 불미스러운 인연을 만들지 마라.”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왜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못 하니? 기어이 만나겠다는 거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하아아. 참 정말이지 너는. 여자 문제로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를 때마다 모른 척 넘겼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게 뭔지는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만 쉬시죠.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노미숙에게 미안하다.
노미숙은 자신의 두 딸을 정성껏 키워줬다.
물론 친딸이랑 똑같다 라고는 못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임태수 회장은 임누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조금씩 벌어지는 틈이 어느덧 너무 커져 버렸다.
이제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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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한도를 초과하더라도 예치금만 가상계좌로 입금해두면 그 범위 내에서 결제 가능하다고 한국카드 측에서 이미 확답해줬다.
다음 달 14일이면 9억 9천만 원어치의 비트코인이 들어온다.
그걸 현금화해서 예치금 가상계좌로 입금하면 끝.
그런데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액수가 크지 않을 때는 상관이 없었다.
비트코인을 팔고 한꺼번에 현금인출 신청을 하면 그만. 곧장 은행 계좌로 들어왔다.
그런데 9억 9천만 원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비트업 거래소의 하루 현금인출 한도는 2억 원.
9억9천이면 5일에 걸쳐 나눠서 뽑아야 한다.
“저기 김 대리. 비트코인 전문가잖아.”
“에이 과장님. 제가 전문가는 무슨. 하나 씨 앞에서 창피하네요.”
김호창 저 녀석 또 얼굴이 시뻘게졌다. 안면홍조증 치료라도 받아봐. 임하나가 들어 오고부터는 부쩍 심해졌다.
“호창 씨가 만약 비트코인으로 부자가 됐어. 그럼 현금화를 어떤 식으로 할 거야?”
“과장님. 비트코인 투자 정말 해보실 생각이신가 봐요?”
“아니. 아는 사람이 물어봐달라고 해서.”
“보통 이런 경우는 아는 사람이 아니라 본인 얘기던데요.”
“내 소문 다 알잖아. 나도 비트코인으로 돈 많이 벌어봤으면 좋겠지만 난 아니야.”
괜히 뜨끔해진다.
“저도 그런 꿈 꾼 적 있었죠. 비트코인으로 100억 벌면 어떻게 할까. 원래대로라면 여러 번 나눠서 매일 인출 해야겠지만 그건 재미가 없잖아요.”
“그런가.”
“우리나라 모든 거래소에 다 계정을 만드는 겁니다. 비트코인도 거래소에 나눠서 보관해두고요. 그리고 각 거래소 현금인출 한도까지 꽉 채워서 한꺼번에 출금하는 거죠. 캬아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네요. 한꺼번에 통장으로 100억이 따악. 그런데 하나 씨는 비트코인 투자 안 해요?”
확실히 그 방법밖에 없긴 하겠다.
“비트코인은 위험하단 소리를 많이 들어서 다른 곳에 투자하고 있어요.”
“어디요? 궁금하네.”
가만히 듣고 있던 차지영이 괜히 핀잔을 준다.
“김 대리님.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임하나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나름 영업3팀의 유일한 홍일점으로 이 부장과 김 대리의 관심을 독차지했었는데 이젠 완전히 아니다.
“그래도 궁금하잖아.”
“그냥 전문가한테 맡기는 편이에요. 그게 제일 안전하잖아요.”
“맞아. 하긴 그래.”
한가한 오후 시간에 책상에 앉아 잡담을 주고받을 때만큼은 시간이 참 잘 간다.
별 얘기도 안 했는데 벌써 10분이 흘렀네.
임하나가 온 이후로 이 부장은 많이 달라졌다.
일도 열심히 하는 척하고 출근도 일찍 한다.
그래도 여전히 담배 하나만큼은 도저히 못 끊나 보네. 그나마 좀 줄긴 줄었다.
임하나가 보기에는 여전히 심하다 싶을 정도겠지만.
덜컥.
이 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담배 냄새도 함께 밀려 들어왔다.
임하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려 하지만 싫은 건 분명하다.
“나 빼고 무슨 얘기해? 밖에서 다 들리던데.”
“재테크 어떻게 하나 토론 중이었습니다.”
“재테크는 뭐니 뭐니해도 금이지. 카드로도 살 수 있고.”
금?
이 부장도 가끔 옳은 소리를 하네.
금이라. 수수료가 문제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고.
주말에 종로 금은방을 한 번 들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