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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서비스
“슬슬 점심 먹으러 갑시다.”
“예.”
“네. 부장님.”
직장인들의 최대 고민. 점심을 뭐 먹을까.
우리 회사는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다.
주변에 식당이 많고 유명한 맛집도 몇 군데 있었다.
그래도 직장인들의 가벼운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우리 영업 3팀이 가는 곳은 몇 군데로 정해져 있긴 하다.
이기수 부장은 한식 파라서 거의 된장찌개, 김치찌개류를 먹고 기름기 있는 메뉴를 싫어한다.
김호창 대리는 이것저것 다 잘 먹는데 특히 좋아하는 건 제육볶음류.
남자 직장인의 필수 3종세트 제육볶음, 돈까스, 순대국밥은 다 좋아한다.
차지영은 면류를 즐겨 먹는다. 냉면부터 시작해서 칼국수에서 파스타까지 면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이 무난한 편. 굳이 따지자면 매콤한 걸 좋아하나?
새로 입사한 임하나는 아직 식성 파악이 안 됐다.
전에 보니까 부대찌개를 잘 먹긴 하던데.
원래는 점심을 다 따로 먹었는데 이 부장이 어느 날부터는 그래도 같은 팀인데 1주일에 최소 한두 번은 같이 먹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그러더니,
한두 번이 두세 번 되고 서너 번 되더니 결국 매일 같이 먹게 됐다.
그런데 미주그룹 영업 3팀의 오늘 점심은 좀 사정이 다르다.
“부장님. 저는 점심을 따로 먹겠습니다.”
“응? 서 과장 왜? 식사 약속 생겼어?”
“그런 건 아니고요. 아시잖습니까. 이번 주 골목백반집이 식혜를 후식 제공하는 주간이라는걸. 저는 오늘만 따로 골목백반에서 먹겠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서 과장은 보면 참 식혜를 좋아해. 가만 보면 입맛이 아저씨야.”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골목백반 식혜는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단 말이야. 벌써 침이 고인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오랜만에 중국집 어때?”
“어? 부장님이 웬일이세요? 중국 음식 느끼하다고 싫어하시잖아요.”
“호창 씨. 사람이 어떻게 매번 똑같은 것만 먹어. 가끔 안 먹던 게 땡기는 날이 있는 법이지. 이상하게 오늘따라 얼큰한 짬뽕이 먹고 싶어지더라고. 회사 근처에 서울 7대 짬뽕인가 하는 곳 있잖아.”
“거기 해물 짬뽕 끝내주죠. 전 좋습니다. 지영 씨랑 하나 씨는 어때요? 중국집 괜찮아요.”
차지영은 면 요리를 좋아하니 오케이할 테고.
“좋아요. 저는 오랜만에 간짜장 먹을게요.”
임하나도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임하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으음~. 혹시 괜찮으시면 저도 골목백반에서 먹어도 될까요?”
“응?” “왜요?” “하나 씨는 중국 음식 싫어해요?”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입 사원치고는 자기주장이 당당하네.
하긴 원래 매일 다 같이 먹는 게 좀 특이하긴 했다.
그런다고 단합심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사실은 며칠 전에 먹은 식혜 말인데요. 그게 너무 맛있어서요. 자꾸 생각이 나서 이번 주에는 계속 후식으로 식혜가 나온다니까 또 가고 싶습니다.”
“그랬구나. 그럼 당연히 가야지. 우리도 골목백반 갈까?”
“아닙니다.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이 중국집 다녀오세요. 저는 과장님이랑 같이 둘이서 먹고 오겠습니다.”
“부장님. 중국집 가시죠. 저도 갑자기 짬뽕이 먹고 싶은데요.”
“그럴까? 호창 씨가 오늘 나랑 의기투합했네. 지영 씨도 간짜장 먹고 싶어?”
“네. 부장님이 중국집 말 꺼내시니까 괜히 그렇네요.”
“오케이. 그럽시다. 오늘은 삼대이로 나눠서 출동. 고고.”
점심시간은 이 부장도 신나게 만든다.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이란 뭐랄까.
뜨거운 사막을 가로지르다 만나는 한줄기 오아시스?
이 부장에게는 담배까지 여유 있게 피우고 들어올 수 있는 중간기착지겠네.
졸지에 여직원이랑 둘이서 밥을 먹게 됐다.
차지영이 들어오고 나서는 한 번도 없었는데.
식성이 겹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저번 고속충전기 허가 사건 이후로는 껄끄러워져서 더욱 그럴 일이 없었다.
“하나 씨. 가요.”
“네. 과장님.”
오늘따라 더욱 화창한 봄날이다.
슬슬 더워지려나. 반 팔 입은 사람도 하나둘씩 보인다.
“식혜를 엄청 좋아하나봐요?”
“네. 원래도 좋아했는데 그 골목백반집이 특히 더 맛있더라고요.”
“맞아. 그 집은 직접 담그니까. 요즘 식혜는 너무 달기만 하고 깊은 맛이 없는데 거긴 어떻게 만드는지.”
몇 마디 안 나눴는데 대화 재료가 벌써 떨어져 버렸다.
“회사 생활은 어때요?”
아~. 이래서 상사들이 자꾸 물어보는구나.
자기들도 할 말 없으니까 말 걸려고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부하직원들 회사 생활을 캐묻네.
“과장님 덕분에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어요.”
나도 저 비슷한 말을 어디서 한 것 같은데.
그래. 맞다. 너희 아빠 앞에서 똑같은 말을 했었지.
미안하네. 마음에도 없는 답변 공식을 외우게 만들어서.
어색한 침묵이 몇 초 흘렀지만 고맙게도 곧 골목백반집이 나타났다.
오늘도 손님은 많네.
“저번에 보니까 부대찌개 좋아하던데. 오늘은 뭐 먹을래요?”
“과장님이 먼저 고르세요.”
입사 한 달도 안 된 부하직원이랑 단둘이 먹는데 더치페이는 너무하지. 그렇다고 지금 내가 살 테니 먹고 싶은 거 마음껏 고르라고 압박 주는 것도 웃기고.
나중에 계산할 때 말없이 카드만 내밀면 된다.
오늘은 좀 비싼 걸 먹어볼까.
“그럼 난 오늘은 수육정식. 하나씨는?”
“그럼 저도 수육정식 먹겠습니다.”
졸지에 평소보다 거의 3배가량 점심값이 나가겠구나. 다음 달 9억 9천만 원이 들어오는데 이 정도쯤이야.
“여기 수육정식 맛있을 거야. 한 번 먹어봐요.”
“네.”
수육정식은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화려하게 나왔다.
일단 여긴 고기가 큼직하고 질이 좋다.
암퇘지 앞다리살을 잡내가 전혀 없이 잘 삶았다.
어떤 곳은 비계가 너무 많아서 별로인데 이 집은 비계가 적당히 붙어서 오히려 부드러운 맛을 더한다.
상추며 깻잎 같은 쌈 채소도 넉넉히 주고.
오늘따라 밑반찬으로 최고 존엄 급이 나와버렸다.
간장게장.
와~ 이건. 도저히 못 참지.
회장 큰딸 앞이고 뭐고 두 손으로 쪽쪽 빨아먹었다.
“맛있게 드시네요. 음식을 복스럽게 먹으면 복이 온다고 그러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야. 하나 씨도 잘 먹는데.”
“정말 맛있네요.”
특별한 대화가 필요 없었다.
정신없이 배를 채우고 거의 다 먹어갈 때쯤 사장님이 다가오셨다.
쟁반에 식혜가 두 잔 담겨 있었다.
그런데 컵이 평범한 사이즈가 아니었다.
가끔 자료 화면으로 보던 옛날 우리 조상들의 밥그릇 크기가 저만했던 것 같은데. 반찬이 몇 가지 없던 상황에서 오로지 밥으로만 배를 채우던 그때 그 시절.
먹고 죽으라는 소린가? 아무리 그래도 너무 크잖아요.
“아니. 사장님 이게 뭡니까?”
“이렇게 예쁜 손님이 오셨는데 특별 서비스를 해드려야지. 저번에 보니까 식혜를 아주 좋아하시던데. 히히힛.”
사장님도 사나이네.
그리고 또 한 번 느낀다.
미모는 고시 3관왕이나 마찬가지. 임하나는 임태수 회장 큰딸이 아니었어도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정말 감사합니다. 식혜가 너무 맛있어요.”
“미인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자주 들러요. 이까짓 식혜쯤이야 매일이라도 드리지. 필요하면 내가 따로 병에 담아드릴게.”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사장님. 한 병 담아주세요. 이 친구 식혜 좋아하니까 오후에 음료수로 마시게.”
“그럴까? 흐흐힛. 기다려봐요. 나갈 때 내가 담아줄게. 천천히 마저 드시고.”
사장님이 신나게 주방으로 사라지신다.
“과장님. 괜히 죄송하잖아요. 저 때문에.”
“식혜 주시면 나도 반 나눠 마십시다.”
“예? 흐흐흐. 알겠어요.”
고시 3관왕급 예쁜 얼굴로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 절에서도 삼겹살 얻어먹겠다.
“꼭 다음에 또 와요. 아유~ 볼수록 너무 이쁘다. 미스코리아 출신이에요?”
“하하핫. 아닙니다.”
“한 번 나가봐요. 유명해질지 누가 알아.”
싸늘하다.
“민우 아빠~.”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가게 안이 이렇게 바쁜데 뭐해~?”
가끔 뵙던 골목백반 사모님이셨다.
“어? 으. 응. 손님 계산 도와드리고 있지.”
“내가 할 테니까 주방에 가봐. 홀이 이렇게 바쁜 거 안 보여?”
“알았어. 이분만 도와드리고”
“민우 아빠.”
사모님께서 굉장히 차분하고 교양있는 음성이시네.
“주방이 오늘따라 굉장히 바쁘네. 어서 가봐.”
“알았어.”
사모님이 내 카드를 받아쥔다.
그리고 임하나 손에 들린 커다란 패트병을 쳐다봤다.
임하나가 본능적으로 돌아서면서 패트병을 슬쩍 뒤로 숨긴다. 계산하는 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이야.
“수육 정식 둘이요.”
“아 네.”
수육정식 둘이란 말에 사모님의 표정이 온화하게 바뀐다.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손에 쥔 패트병 만으로 이미 수육정식 2개 값은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 기분이었다.
“흐흐흣. 과장님. 식혜가 아직도 차가워요.”
“냉장고에 있던 건가 봐. 좀 마시고 들어갑시다.”
“네. 그래요.”
사장님께서 센스있게도 종이컵까지 같이 주셨다.
가정의 평화까지 내걸고 주신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회사 근처 조그만 공원 벤치에 앉았다.
“크으으. 역시.”
“과장님. 정말 맛있는데요.”
“가지고 들어가면 팀원들 모두 좋아하겠네.”
“먹다 보면 우리가 다 먹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되고.”
머슴 둘이서 고된 밭일을 마치고 점심 새참으로 막걸리를 홀짝거리는 어느 사극처럼,
무려 미주그룹 장녀 임하나와 회사 근처 조그만 벤치에 앉아서 식혜를 한 잔씩 들이켰다.
기어이 패트병 하나를 마저 다 비워버렸다.
이 친구 정말 식혜 잘 먹네.
식혜왕인 내 명성에 금이 갈 정도다.
“들어갑시다. 오늘 점심은 정말 잘 먹었어.”
“저도 과장님 덕분에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점심 사주신 거 감사드립니다.”
“별것도 아닌데 고맙기는. 혹시 사람들이 뭐 먹었냐고 물으면 그냥 부대찌개 먹었다고 말해요. 수육정식 먹었다고 하면 질투하니까.”
“알겠습니다.”
고작 이런 걸로 뭘 질투까지 하겠냐 싶지만.
김호창 대리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위이잉. 위이잉.
김지영 변호사였다.
미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다른 미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거기에 또 다른 미인과는 이혼소송 중이고. 참으로 존나 멋진 인생이네.
“하나 씨 먼저 들어가요. 나는 전화 좀 받고 나중에 들어갈게.”
“네. 그러세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여보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접니다.]
[네. 변호사님.]
[다름이 아니라 진행 과정을 알려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네.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선생님 사건은 경찰에서 불송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선생님의 상해, 협박, 주거침입죄 혐의에 대해서 죄가 안 된다고 보아서 검찰로 송치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즉 선생님은 경찰이 판단하기에 무죄라는 거죠.]
[그래요? 잘됐네요.]
[그런데 이지영 측에서 곧바로 이의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을 고소한 이지영 측이 이의신청을 하면 사건은 검찰로 넘어가서 검사가 검토를 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다시 선생님이 무죄라고 판단되면 검사가 불기소처분을 내립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증거가 워낙 확실해서 선생님께서는 이번에도 무죄판단을 받으실 겁니다.]
다행이다.
그럼 그렇지. 죄가 없는데 억지로 내게 뒤집어씌운 이지영이 죽인 년일 뿐.
[우리가 맞고소한 이지영의 무고죄 및 기타 범죄에 대해서도 검찰 사건번호가 부여됐습니다. 담당 검사가 누군지도 제가 따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저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일 리는 없겠지만 어떤 성향인지 파악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요.]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알아봐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변호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역시 이 멘트는 언제 들어도 섹시하단 말이야.
[조만간 선생님을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건에서는 대질신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랑 같이 사전에 만나서 어떻게 조사를 받을지 검토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변호사님 편한 시간으로 정해주십시오. 저는 월차를 내면 되니까요.]
[시간은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평소 생활하시던 대로 느긋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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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철 검사는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를 볼 때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술 더 떠서 책상 옆에는 바퀴 달린 카트가 대기하고 있다. 카트 위로도 서류가 사람 허리 높이만큼이나 쌓여 있다.
도대체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이 지랄을 계속하려는 건가 싶었다.
녹색 환경론자는 아니었지만,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나무가 이 쓸데없는 서류 뭉치를 만들기 위해서 소모될 것인지 참 한심했다.
종이 서류를 대체할 방법은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는다.
PDF 파일로 떠서 원본은 따로 중앙 메인 서버에 보안을 강화해서 저장하고 원본과 똑같은 사본으로 읽으면 책상 위에는 고작 노트북이나 태블릿 한 대로 끝일 것이다.
수정하면 실시간으로 메인 서버에 저장되도록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렇게 끝날 일을 사람이 카트로 일일이 끌고 다닐 만큼의 방대한 서류 작업을 매일매일 해야 하다니.
이것만큼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한 장 한 장 손으로 넘겨 가면서 매번 지장을 찍고 간인을 하고. 참 구태의연하기도 하지.
안 그래도 많은 각종 조서를 읽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래도 가끔 검사인 자신이 봐도 참 어이없을 정도로 웃긴 사건이 있다.
지금 이 사건이 그렇다.
부인이 바람을 피웠는데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딸이 둘이나 있다.
그 다른 남자들은 남편과 같은 대학 동아리의 동창들.
부인은 남편 몰래 서류를 위조해서 아파트를 자기 앞으로 돌려놓고 그 집에 돌아온 남편을 주거침입으로 고소.
남편이 자기를 때렸다며 진단서까지 작성했다.
“계장님. 이 사건 읽어보셨어요?”
“어떤 거 말씀입니까?”
“아까 제가 보여드린 것 말입니다.”
“하하하. 그거요. 사랑과 전쟁에서 다뤄야 할 것 같던데요.”
“어떤 여자인지 실물 한번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