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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같은 인연
내가 남궁형을 만나게 된 계기는 실로 운명 같았다.
수많은 스테이션 게임 타이틀 중에서,
하필 아무도 하지 않는 희귀한 고전 게임을,
그 좁아터진 동탄 바닥에서 찾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설마 이게 팔리겠어?’라는 심정으로 중고 동네 마켓에 글을 올렸다.
올린 지 한 달이 넘었을 무렵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포기하고 그냥 버리자 싶을 때쯤이었다.
이지영이 하도 내다 버리라고 성화를 부려 당시로는 어쩔 수 없었다.
지우려고 판매 글 삭제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믿기지 않는 타이밍에 채팅이 도착했었다.
인연이란 마치 교통사고와 같아서 깜빡이 없이 훅 들어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내 삶에 어떤 형태로든 기스를 남긴다.
[(안녕하세요 이모티콘) 혹시 아직 판매 중이신가요?]
당근이지.
[네. 아직 팔고 있습니다. 택배나 직거래 어떤 게 편하세요?]
직거래든 택배든 상관없었다. 택배라면 내가 기꺼이 택배비를 보태서라도 팔아버리고 싶었다.
[동탄 ···에 살고 있는데 혹시 직거래 가능할까요?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엄청 큰 하트를 들고 있는 이모티콘)]
별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좋습니다. 중간쯤에서 만나도 됩니다. 제가 그 사거리로 갈게요.]
[좋습니다. (윙크하면서 오케이하는 이모티콘)]
나이를 가늠하기는 힘들었지만, 이모티콘을 남발하는 것으로 미루어 절대 파릇파릇한 연령대일 리는 없었다.
이모티콘도 하트 아니면 엄지척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장 네고충같은 진상만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심정이었다.
그날따라 밤비가 내렸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안 그래도 쌀쌀한 날씨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거리에서 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거리는 한적했다.
저벅저벅.
빗소리 틈으로 희미하게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린다.
어떤 사람이 검은색 장우산을 푹 눌러쓰고 다가오고 있었다. 백팩을 메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를 신었다.
저 사람의 대화명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는 힘들었지만,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혹시 동탄쌔끈남 님 이세요?”
“네. 접니다. 반갑습니다.”
“비까지 내리는데 오시느라 힘드셨죠?”
“아닙니다. 비 오는 밤거리를 좋아합니다.”
“한 번 보시죠.”
“사나이끼리의 거래인데 무슨 확인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믿음으로 팔고 그 마음만 받으면 그뿐인 것을. 설령 공 CD가 들어 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반품이나 환불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더 이상한데.
“그럼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페이도 좋습니다. 계좌이체도 괜찮고요.”
품에서 조그만 봉투를 하나 꺼낸다.
“확인해 보시죠.”
방금 자기 입으로 사나이 운운했으면서 나한테는 확인해 보라니. 여기서 쪼잔하게 봉투를 열고 침까지 묻혀가며 하나둘셋 하고 세면 내가 너무 소인배 같잖아.
“맞겠죠.”
“아닙니다. 돈거래는 확실한 게 좋습니다. 열어 보시죠.”
“점잖으신 분 같은데 맞겠죠. 그럼 재미있게 잘 하십시오. 조심해서 들어가시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게임 CD 중고 거래는 이렇게 순조롭게 끝나는 줄로만 생각했었다.
조금이라도 세상이 따뜻해지도록 후기까지 잘 작성해서 보내줬다.
그런데 다음 날 밤 채팅 하나가 도착한다.
[저기. 선생님. 이거 CD 인식이 안 되는데요.]
그럴 리가 있나. 난 멀쩡히 잘 했었는데.
[그런가요? 이상하네요. 저는 잘 사용했었는데.]
[아무래도 CD가 불량인가 봅니다.]
[그것 말고 다른 게임 CD는 잘 되세요?]
[실은 제가 얼마 전에 게임 타이틀은 전부 처분하고 가진 게 선생님께 산 이것뿐입니다. 기계는 별 이상 없이 그전에도 잘 작동했었습니다.]
그래?
[알았습니다. 그럼 환불해드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이 양반 웃기시네.
어제는 분명 자기 입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반품이나 환불을 해본 적이 없다더니.
사나이는 뭐라더라. 믿음으로 팔고 마음만 받으면 그뿐?
[CD는 어떻게 할까요?]
[고장이라면 그냥 버리세요.]
[아닙니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요.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편의점 수령 택배로 보내드리지요. 택배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즐겨 하던 게임이고 구하기도 힘든 CD였다.
혹시 고장이 아닐지도 몰라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며칠 뒤 받아서 확인해 보니 멀쩡하게 잘 돌아간다.
놔둘까 하다가 말해주기로 했다.
[제가 사용해보니 정상 작동하던데요. 선생님 기계가 아마 고장인 듯합니다. 저도 들은 건데 그럴 때는 본체를 뒤집어서 사용해보세요. 될 수도 있답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럼 번거로우시겠지만, 그 CD를 다시 보내주시겠어요. 택배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게임이라서요. 해보고 싶습니다.]
정말 번거롭게 하네.
고작 게임 CD 하나 가지고 도대체 몇 번을 왔다리갔다리 하는 거냐.
[알겠습니다. 보내드리죠.]
며칠 뒤에 또 채팅이 왔다.
성질 같아서는 확 그냥 차단해버릴까도 싶었지만 그래도 동호인끼리 그럼 안되지.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니까 인식을 하네요. 재미있게 잘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재미있게 하세요.]
[혹시 다른 게임 CD도 더 있으세요? 가지고 계시면 제가 구매하고 싶습니다.]
그러게 왜 게임 CD를 함부로 처분하니.
스테이션 게임 CD는 야동과 같아서 이제는 필요 없겠지 싶어서 없애면 또 생각나는 법이다.
사람은 참 신기한 게 늘 먹던 것만 먹고 보던 것만 보게 되더라고.
[몇 개 빌려 드릴 테니 그냥 해보세요. 사나이끼리 무슨 돈을 주고받습니까.]
저쪽이 사나이 운운하는데 나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 전만 해도 그거 CD 한 장 팔아서 푼돈이라도 벌어보겠다고 바둥거리더니, 이제와서 사나이 타령하며 호탕하게 마음껏 공짜로 써보라는 나도 웃긴다.
[대협께서는 존함이?]
하늘마저 감동했는지 날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다.
[그저 인근에 살고 있는 한낱 동탄 주민일 뿐입니다.]
[귀인을 만났군요. 제가 치맥 한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아닙니다. 한 번 기회를 주시죠. 사나이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도 나누고요.]
그 후로 몇 번 술을 먹다 보니 오늘 같은 사이가 됐다.
“시발아. 여기 잔 빈 거 안 보이냐?”
“알아서 따라 드시고. 근데 형은 왜 이혼한 거야?”
“자작하면 3년 동안 재수가 없다잖아. 이유는 묻지 마라.”
“형도 설마?”
“그런 거 아니야. 성격 차이라고만 알아둬. 그런데 이지영 말이야. 동탄에서 욕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어.”
“그래? 아주 오래오래 살겠네.”
“얼굴이 팔려서 제대로 못 돌아다니나 봐.”
“이제 동탄 남자는 더 못 꼬시겠네. 서울로 진출이라도 하려나.”
“남자든 여자든 큰물에서 놀아야지.”
“동탄은 평정했으니 큰 무대로 옮길 때도 됐네. 알아서 잘 하시겠지. 내 알 바는 아니고.”
“이혼은 어떻게 되고 있냐?”
글쎄. 잘되고 있는 건가?
김지영 변호사가 열심히 잘 하고 있으니 결과도 좋겠지.
“잘 돼가.”
“이혼은 판사가 마지막에 땅땅 두드릴 때까지 방심하면 안 돼. 총만 안 든 전쟁이다. 난 쿨하게 합의이혼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돼. 합의이혼은 일종의 휴전이야. 더는 못해 먹겠다면서 양쪽 다 포기하는 거지.”
“우리나라랑 북한이랑 비슷하네.”
“근데. ···. 아이 아니다.”
남궁형이 왜 말을 하려다가 말지?
“뭔데?”
“그런 소문이 돌던데.”
“무슨 소문?”
“괜찮아 이 형한테는 솔직히 털어놔도 돼. 젊은 나이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고 하더라. 내가 좋은 비뇨기과 소개해줄까? 칠순 영감도 아들 보는 곳이라더라.”
어허 이런.
이 형 안 되겠네. 멀쩡한 사나이를 불구로 만들어버리다니.
“남궁형.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런데. 아 진짜. 어떻게 보여줄 수도 없고. 나 완전 상남자야.”
“원래 그런 남자들일수록 말로는 다 자기 엄청나대.”
“아니야. 진짜라니까.”
“남자가 오죽하면 여자가 바람나서 딴 놈 자식을 둘씩이나 낳았겠냐면서 동탄 미용실을 중심으로 소문이 돈다더라.”
“형 미용실에서 머리 잘라?”
“아. 아니야. 임마 사나이가 무슨 미용실을 다니냐.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에는 괜찮은 이발소 찾기가 힘들어.”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멀쩡한 놈 앞길을 막는 것도 유분수지. 불구로 소문나면 재혼은 어떻게 하냐.
분명 이지영 그것이 퍼트린 게 틀림없다.
“형이 그 미용실 가서 아니라고 역소문 좀 내줘. 소문에는 소문으로 맞대응해야지.”
“걱정마. 내 단골 미용실 원장이 그 동네에서 굉장히 유명한 마당발이야. 무슨 청소년 선도위원회 회장이라던데.”
“거봐. 미용실 다니는 거 맞네. 사나이가 무슨 미용실이냐. 잡지 보면서 아줌마들이랑 수다 떨고 그래?”
“아니라니까. 거기 원장님의 절륜한 손놀림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만 몇 번 간 것뿐이라고.”
위이잉. 위이잉.
김지영 변호사였다. 저녁 시간인데도 참 이분은 불철주야 고생이 많으시네.
“나 전화 좀 받을게.”
“그래.”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다음 주쯤에 시간 어떠십니까? 저번에 말씀드린 검찰 출석요구 말인데요. 다음 주에 만나 뵙고 대비를 했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다음 주에 뵙죠. 늦은 시간인데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변호사 업계가 원래 퇴근이 엄청 늦습니다. 지금 이 시간대면 한창 일할 시간입니다.]
로펌 변호사들이 바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시간까지 일하다니. 돈 많이 번다고 마냥 부러워만 할 직업은 아니구나.
[정말 감사합니다. 매번 신세만 지네요.]
[전혀 아닙니다. 그럼 쉬십시오.]
[안녕히 계세요.]
“변호사야?”
“응.”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꽤 젊은데. 몇 살이야?”
“형이 소개해줬잖아.”
“난 로펌까지만 연결해줬지. 그 여자 변호사가 당첨될 줄 어디 알았나. 근데 ···.”
그거 물어볼 것 같더라니.
“예쁘냐?”
남자들이 여자를 분류하는 기준은 단 한 가지.
예쁘냐 안 예쁘냐 그것뿐이다.
예쁘다면 그때부터 머릿속으로 온갖 환상을 그리기 시작하고, 안 예쁘다면 가을야구에 실패한 응원팀만큼이나 관심이 식는다.
“존나 예쁘던데. 내가 태어나서 실물로 본 여자 중에는 세 손가락 안에 들걸.”
“나머지 둘은 누군데?”
전부 최근이다.
한 명은 미주그룹 장녀 임하나.
나머지 하나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것.
“변호사가 그렇게 예뻐 버리면 오히려 일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예뻐.”
“몇 살인데?”
“형이 알아서 뭐 하게?”
“그냥. 나중에 또 이혼하면 부탁하려고.”
참 이 형도 철이 없어. 재혼도 하기 전에 또 이혼할 궁리나 하고 앉아 있다.
“한 번 대시 해봐. 혹시 아냐.”
“말해 놓고 보니 형도 어이없지?”
“아니. 난 진심이야. 전쟁 중에도 애가 태어나는데 이혼 중에 애가 태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 사랑은 때와 장소를 안 가려. 마치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한여름의 소나기 같은 것이랄까.”
“그건 지구온난화 때문이지. 우리나라도 이제는 사계절이니 장마니 다 옛날이야기야.”
“시발아. 내가 인생 선배로서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잘 들어. 청춘. 그거 금방 지나간다. 사랑할 수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마.”
올해 연세가 팔순이세요?
나랑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안 나면서 더럽게 어른스러운 척하네.
앞에서 꼼장어를 썰고 계시던 포장마차 주인 영감님께서 피식 웃으신다.
내가 다 쪽팔리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남궁형이나 뜨거운 여름 소나기 같은 사랑 나누십시오. 아주 후끈하게.”
나랑 김지영 변호사랑?
택도 없는 소리지.
잠깐이나마 상상력을 발휘해본 내가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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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철 검사의 방은 그리 넓지 않았다.
검찰청 청사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검찰청에서 근무하는 직원의 수는 많다. 검사 수가 적은 지방 쪽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데 이우철이 소속되어 있는 검찰청은 특히 공간이 비좁았다. 따로 독방을 쓰는 건 최소한 부장검사급은 되어야 했다.
이우철 같은 평검사는 배정된 검사실을 버티컬로 구분해서 자기만의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계장과 주임 등 같이 일하는 동료 검찰수사관들이 차지한다.
피의자들을 신문할 때 따로 조사실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번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검사실 바로 옆에 붙은 자그만 부속룸을 이용할 때가 더 많았다.
보통 피의자들에게 ‘몇 시까지 오세요’라고 통지를 하면 그보다 일찍 오게 마련이다.
평범한 사람이 검찰청을 방문한다는 건 두렵고 떨리는 일. 긴장하기 때문에 늦는 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우철은 지금 정해진 시간보다 20분을 초과해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똑똑.
“피의자분이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보통은 일어나서 맞이한다.
그렇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검사와 피의자 간의 첫 대면.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하는 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더구나 20분이나 늦었다.
아까부터 이우철은 아예 반대쪽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발소리를 들으니 피의자인 여성 한 명과 변호사일 것으로 추정되는 또 한 명. 두 명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서부터 더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피의자인 여성은 말이 없고 오히려 변호사가 대신 사과한다.
기본이 전혀 안 되어 있네.
서류를 훑어보는 척하면서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거기 의자에 앉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피의자는 아직까지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이우철이 계속 서류만 쳐다보고 있으니 드디어 피의자가 말문을 연다.
“오랜만에 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