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37화 (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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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의 부메랑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여기서 과감하게 부장에게 들이받는 거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부장님.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해야 그게 공평입니다. 호창 씨나 지영 씨였어도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니 이봐요. 서지오 씨. 실수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서 과장도 신입 때는 그 정도 사소한 실수는 했을 거잖아.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생각해야지. 그리고 공평이라니? 나 회장님 자녀분이라고 편애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김 대리나 차 사원이었어도 나는 똑같이 대했을 거야.’

‘제가 신입 사원 시절이었던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의 저도 지금 같은 실수를 했지만, 부장님은 저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제가 하나 씨 대할 때랑 똑같이 하셨던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그때의 부장님은 오히려 지금 저보다 훨씬 강하게 호통을 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제 올챙이 적 시절의 기억은 그렇습니다. 이게 과연 공평한가요?’

‘서 과장. 말을 가려가면서 해. 하나 씨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못하는 소리가 없네.’

이렇게 흘러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영업 3팀 사무실 분위기는 개판이 되고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변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네 부장님 제가 심했네요. 무려 회장님 큰 따님이신 하나 씨에게 감히 주의를 주다니 말입니다. 제가 죽일 놈이네요.’ 이렇게 빈정대는 건 더 최악이고. 인터넷 판타지 소설에서도 그렇게 쓰면 독자들이 쌍욕을 퍼붓겠다.

임하나가 임태수 회장 장녀란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안다.

여기서는 임하나를 두둔하는 이기수 부장의 체면도 살리고 임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더해서 김호창과 차지영도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해야지. 누구는 욕먹고 누구는 우쭈쭈 받으면 기분이 더럽지 않겠어.

임하나를 슬쩍 쳐다봤다.

멍청한지 아니면 재치가 있는지 어디 볼까.

잠깐 겪어봤지만 어떻게 대답할지는 충분히 짐작됐다.

“하나 씨. 부장님께서 저렇게 염려하시잖아.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지?”

나는 어디까지나 어시스트 패스만 밀어주는 역할이다. 내가 나서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장님께도 심려를 끼쳐 드려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오늘 작성했던 파일은 전부 검토해서 다시 올리도록 할게요.”

멋진 마무리골이었다.

“그렇게 해요. 부장님. 다행입니다. 하나 씨가 피드백이 아주 빠르네요.”

“그렇지? 역시 우수한 사원이라서 그런지 뭐가 달라도 달라.”

하여튼 이기수 부장은 진짜.

아부는 굵고 강렬하게 1절만 해야 먹히는 법이다.

과장이란 게 위에서 눌리고 아래서 치이고 참 피곤해.

그래도 일은 나름 재미있다. 완전히 손에 익기도 했고.

캐시백이 들어오면서부터 회사를 때려치울까도 생각했지만, 결론은 NO.

은행 대여금고에 보관된 10킬로가 훌쩍 넘는 골드바. 그게 현재 내 전 재산이다. 비트코인 캐시백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뚝 끊길지 누가 알겠어.

그걸 믿고 안정적인 직장을 관둔다?

미주그룹 과장 월급이면 꽤 쏠쏠하게 들어온다. 게다가 조만간 차장이 될지도 모르고.

갑자기 큰돈이 생겼다고 평소의 나를 잃어버리면 끝이다.

대한민국에서 겨우 일이십 억으로 30대가 은퇴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당장 강남의 대형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되는데. 100세 인생이다. 죽을 때까지 벌어야 한다.

혹시 모르지.

정말로 캐시백이 계속 들어와서 수백억까지 불어난다면 다 관두고 공기 좋은 하와이 어느 섬에서 인생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휴양지 중에서는 무조건 최고라던데.

하와이 언젠가 꼭 간다.

**

“뭐 먹을래?”

“오빠는?”

“아무거나.”

“남자들은 아무거나 라면서 결국 이상한 것만 시키더라.”

“니가 알아서 시켜. 난 밥 생각 별로 없으니까.”

“우리 팀은 참 웃겨.”

“왜?”

“점심을 항상 다 같이 먹어. 학교 급식도 아니고. 가는 곳도 매번 정해져 있고. 우리 회사 근처에 골목백반이라고 알아?”

“내가 알겠냐?”

“하긴. 오빠는 그런 데는 안 가니까. 수제 식혜가 얼마나 맛있는데.”

“회사 생활은 어때? 아버지도 참. 신입 사원으로 넣는다고 일을 제대로 배울 수가 있나. 그리고 넌 어차피 회사 계속 다닐 것도 아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직장 생활도 해보니까 재미있던데. 보람도 생기고.”

“돈 몇 푼 받으면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냐. 서민들이 먹고살려고 할 수 없이 하는 짓이지.”

임누리 상무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점심 따로 먹겠다니까 부장님이 묻는 거야.”

“이기수?”

“응. 누구랑 먹냐면서. 은근히 사람 귀찮게 하는 거 있지. 너무 불편해.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대해주는 게 더 좋은데. 저번에는 실수 한 번 했는데 그걸 가지고 오히려 과장님한테 뭐라고 그러시잖아. 왜 신입사원 기를 죽이냐면서.”

“이기수 부장이 그랬어?”

“과장님은 별로 심한 소리도 안 하셨어. 주의해서 앞으로 잘하라고. 그게 다였는데. 괜히 부장님이 나서서 내 편 든다고 과장님을 야단치시잖아. 내가 얼마나 중간에서 불편한지도 모르고. 눈치가 없으신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시는 건지.”

“훗후흐흐.”

“왜 웃어?”

“이기수 부장이 그런 놈이었단 말이지. 후흐흐흐. 재미있는 녀석이네. 영업 3팀 실적이 워낙 좋아서 그래도 나름 무난히 관리는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새끼 이거 완전 날로 먹고 있었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잖아. 어떻게 부장 자리까지 승진해서 여전히 살아남았는지 안 봐도 뻔해.”

“나쁜 분은 아니야.”

“착하고 나쁜 건 관심 없어. 돈이 되는 놈인지 아닌지만 알면 충분해. 그 새끼는 잘라도 회사에 하등 지장 없을걸. 이기수면 강 상무랑 친했던가.”

“그러고 보니 강 상무님도 우리 사무실에 한 번 오셨었어. 점심 사주시던데.”

“뭘 사주디?”

“아까 내가 말한 그 골목백반집. 되게 맛있다니까.”

골목백반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임누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한다.

“지 혼자 처먹을 때는 고급 일식집 아니면 한우전문점만 골라서 가는 새끼가. 부하직원들 밥을 사줄 때는 고작 만원도 안 되는 백반집에 데려가?”

“강 상무님이 그랬어?”

“내로남불의 전형 같은 새끼야. 등기 이사랍시고 비싼 연봉이나 받아 처먹는 버러지지. 아무 짝에 쓸모없는 그런 쓰레기들을 아버지는 왜 감싸시는지 모르겠어.”

“오래되신 분들이잖아.”

“우리나라는 이게 문제야. 한번 들어오면 회사가 망할 때까지 기생충처럼 빌붙어서 해 먹는 새끼들 때문에 도산하는 중소기업이 하나둘인 줄 아냐. 넌 아직 현실을 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날 너무 무시하는 것 같은데. 아빠도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러시는 거지. 오빠가 아빠보다 회사 생활 경험이 많아? 그건 아니잖아.”

“됐다. 너랑 싸워봤자 뭐하겠냐. 여기 주문을 왜 이렇게 안 받아. 어이 여기.”

“내가 할게. 가만히 있어. 오빠는 맨날 직원들한테 소리만 지르잖아.”

“가만있으면 여길 쳐다도 안 보니까 그러지. 여기. 주문.”

**

하루의 끝은 퇴근이 아니다.

퇴근은 새로운 시작일뿐.

요즘의 나는 사는 낙이 없어서 하루하루 동탄을 향해 운전대만 붙잡은 채 멍하니 달려가던 지난날의 내가 아니다.

출퇴근 거리가 짧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구나.

회사에서 현재 살고 있는 고시원까진 걸어서 20분이 안 걸린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되지만 어중간하다. 건강도 챙길 겸 일부러 걷기로 했다.

사람들이 강남은 화려하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지는 않다.

가끔 중국 해안가 1선 도시에 출장을 가면 느끼지만 화려하기로만 따지면 중국 쪽이 더 앞서있다.

아기자기함이나 메가시티로서의 볼륨감은 가까운 도쿄가 훨씬 뛰어나고.

강남을 좌우로 관통하는 테헤란로.

한 블록만 그 뒤를 들여다봐도 어수선한 다세대 주택가, 빌라촌이 남아있다.

내가 사는 고시원도 그 일부분이다.

강남이지만 강남이 아닌 곳을 걷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돈을 많이 벌면 어디에 집을 구할까?

서울 어디가 좋지? 아니다. 굳이 서울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미세먼지가 없는 곳이면 좋겠는데.

부산이나 제주도도 괜찮을 것 같고. 동해안 쪽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수중에 있는 금만 팔아도 한적한 곳에 전세 하나는 충분히 구하겠지.

또 생각해보니 부질없다. 직장이 여기인데 가긴 어딜 가겠나. 회사 반경 1시간 거리 이내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게 한국인이다.

결국에는 그 모든 걸 초월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야 자유를 얻게 되겠구나.

고시원 앞은 좁은 골목길이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런 곳에 2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모르는 이.

또 한 명은 아주 잘 아는 이였다.

이제는 습관처럼 핸드폰 녹음 어플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아이고. 서 서방. 이제 퇴근하는 건가?”

서 서방?

결혼하고 나서 처음 들어본다. 이혼을 얼마 안 남겨둔 이 시점에 서 서방이라니. 늦어도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지나가겠습니다. 비키세요.”

누군지 모르는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서지오 선생님이시죠? 안녕하십니까.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장앤오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인.”

“피곤하니까 둘 다 비켜요.”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제 의뢰인분을 대신해서 저와 잠깐만 얘기를 나눠주시겠습니까?”

옆으로 밀치고 싶었지만, 신체 접촉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겠다.

곧바로 김지영 변호사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다행히 신호가 울리고 금방 받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고시원 앞으로 장모랑 변호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렇군요. 상대하지 마시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세요.]

[그러려고 해도 앞을 가로막고 안 비키네요.]

[그럼 제가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대와 접촉을 피하시고 늘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똑똑한 여자다.

‘녹음’이라는 말 대신 ‘늘 하던 대로’라고 했다.

내가 항상 녹음하고 있다는 걸 굳이 상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조용한 곳이라면 핸드폰 음성이 상대에게 들릴 수도 있다.

“변호사와 통화 중이신가 보죠? 제가 몇 번 연락을 취했지만, 상대를 안 하려고 들더군요. 그래서 직접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뵈려고 왔습니다.”

“···.”

대화 자체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서 서방. 그때는 내가 정말 미안했어.”

길을 막고 있더라도 내가 피하면 그만이지.

고시원 골목을 벗어났다. 편의점이 있는 조그만 사거리에 도착했다. 어차피 먹을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올 생각이었다.

덜컥.

이것들이 편의점까지 따라 들어오네.

“선생님.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됩니다.”

“서 서방. 그날은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성격이 좀 급하잖아. 용서해줘. 자네 부모님한테도 내가 따로 연락을 드렸어.”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냐.

나와 있었던 일에 우리 부모님은 왜 끌어들이는 건데.

“계산은 이걸로 할게요.”

삐빅.

이것들이 제정신인가.

아예 편의점 문을 가로막고 섰다.

“선생님. 저희 의뢰인과 합의해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성질 같아서는 확 밀어버리고 싶지만 안 되지.

그랬다가는 이제까지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진다.

“서 서방.”

“아줌마.”

“뭐?”

“서방이니 뭐니 그딴 소리 집어치워요. 아줌마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무슨 서방입니까.”

“그건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

“조만간 경찰이 올 테니 빨리 비켜요. 저기 죄송하지만 112에 신고 좀 해주십시오. 이 사람들이 편의점 문을 막고 있지 않습니까.”

편의점 알바생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핸드폰을 들고 112에 신고는 하는 것 같다.

“나한테 용돈 받아먹으려고 그렇게 뻔질나게 찾아오더니. 또 용돈 달라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내가 언제 그랬나? 없는 소리 지어내지 말게.”

역시.

제정신이 아닌 모녀다.

자기에게 불리한 건 기억하지 않는 사이코패스.

“더 할 말 없습니다. 경찰 올 때까지 거기 계속 있으시든가.”

“선생님. 만족하실만한 합의금을 제시하겠습니다.”

“그건 제 변호사랑 얘기하세요.”

“변호사가 상대를 안 해주니까요.”

김지영 변호사의 전략이 분명하다. 답답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조바심 나게 만드는 거지.

“그럼 제 변호사가 상대해 줄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네요.”

편의점 알바가 다가온다.

항상 이 시간대에 근무하던 20대 초반쯤의 여자애였다. 늘 인상을 잔뜩 쓰고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뭐가 어디 있는지 물어봐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게 전부였다.

“저기요.”

목소리도 오늘 처음 들어보네. 엄청난 하이톤이었다.

“전부 나가주세요.”

“죄송합니다.”

“아저씨는 죄송할 거 없고요. 이 사람들이 길 막고 있잖아요. 댁들 나가라고요.”

“합의만 해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겠습니다.”

“나가시라고요. 귓구녕이 막혔어요?”

“···.”

“이년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른들 얘기하시는 데 어디서 건방지게.”

“이년? 시발 개늙은년이 입에 걸레를 처물었나. 존나 더럽게 씨부리네.”

“허~ 이런. 말이 안 나오네. 개호로잡.”

변호사가 재빨리 하숙향을 붙잡았다.

“사모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일단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놔봐요. 어린 게 어디서 어른한테.”

“사모님 어서 나가시죠.”

마침 경찰차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변호사가 하숙향을 끌다시피 해서 재빨리 문을 열고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됐어요. 아저씨도 가세요.”

대신 욕해줘서 속이 다 시원하네.

고맙다. 다음에는 음료수나 케이크라도 ···. 아니지.

그런 걸 줬다가는 들이댄다고 오해받기 딱 좋겠네. 빨리 사라져 주는 게 이 친구한테는 제일 고맙지 않을까.

그래도 성의 표시는 하고 싶었다.

나가려다가 다시 카운터로 되돌아왔다.

“담배 하나 주세요. 아니다. 두 갑 주세요. 거기 그걸로요. 여기 카드.”

아니지. 이번에는 카드 말고 현금으로 계산했다. 띠리릭.

“피우세요. 아깐 고마웠어요.”

알바생이 말없이 씩 웃는다.

편의점을 나서면서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다.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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