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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 멘트의 달인
“실은 회장님댁에 처음 방문하는 자리인데 빈손으로 가기는 그래서요.”
“훗. 이거 내가 괜히 미안해지는군.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간단히 밥이나 먹자고 부른 거야.”
“아닙니다. 오후에 이미 주문을 해뒀습니다. 찾으러 가기만 하면 됩니다. 마침 회사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뭔데?”
회장한테 잘 보이려고 아부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밉보일 이유도 없지.
점수를 따두면 언젠가는 요긴하게 써먹지 않겠어?
처음에는 이번에 새로 구매하신 흰색 스포츠카 관련된 아이템을 선물할까 생각했다. 방향제라든가 뭐 그런 것들.
임태수 회장은 내가 알기로 차를 굉장히 좋아하는 마니아다.
킹카 독고재 회장과 몇 번 거래를 해보니 알겠더라고.
이런 분들은 자기 손으로 일일이 차를 꾸며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뭘 선물한들 마음에 들기는 쉽지 않다. 취향에 맞추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렇다고 회장에게 흔한 집들이 선물을 주는 건 의미가 없고.
결국 회장에게는 뭘 선물하더라도 감동을 선사하지 못할 것이다.
임태수 회장에게는 말이지.
장수를 잡으려면 먼저 말을 쏘라고 했던가.
전략은 방향성이다.
누구를 타깃으로 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나는 회장 사모를 타깃으로 삼았다.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회장 사모가 참석하든 안 하든 그건 상관없다.
내 선물은 영구적인 건 아니지만 일회용도 아니다.
당분간 계속 회장댁 어느 한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중년 여성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우선 떠오른 건 귀금속류였다.
하지만 부하직원이 저녁 식사 자리에 반지나 목걸이를 사 들고 오는 건 터무니없는 오버고.
건강식품류도 나쁘지는 않은데 부자들은 알아서 잘 챙겨 먹더라고. 거기에 내가 하나 더 얹는다고 특별히 기뻐할까? 아니지.
선물은 의외성이다.
그래서 꽃을 골랐다.
임태수 회장은 자상한 애처가로 소문난 분은 아니다. 그 나잇대 분답게 아내에게 꽃을 자주 선물할 법하지도 않고.
인터넷으로 최근 각광 받는 플로리스트들을 검색해봤다.
‘펠릭수야’라는 플로리스트가 제일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마침 오프라인 샵이 회사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오후에 미리 주문을 해뒀고 회장댁 가는 길에 수령하기로 했다.
“별건 아니고요. 여기서 가깝습니다. 회장님댁 가는 길에 잠시 방문해도 될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닌데 이거 참 핫하하하.”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좋아서 기꺼이 하는 일인걸요.”
운전 기사에게 주소를 일러줬다.
샵 앞에 도착해서 주문한 상품을 직접 실물로 확인했다.
기본 아이템으로 전통의 레드로즈 100송이.
사람들이 왜 하필 100송이를 선물하는지 알겠네.
물량 앞에서는 당할 장사가 없다. 꽃 하나하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크다. 저렇게 큰 장미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선명한 붉은색이 강하게 회장 사모의 뇌리에 남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모던한 화이트로즈 100송이.
실물을 보니 왜 이게 레드로즈를 누르고 판매량 1위인지 알 것 같았다.
장미라면 당연히 붉은색이라는 고정관념을 때려 부순다. 순수한 흰색이 아니라 노란빛이 은은히 감도는 매우 고급스러운 색감이었다. 첫인상은 레드로즈가 압도했지만 볼수록 눈길이 머무는 쪽은 오히려 화이트로즈였다.
마지막으로는 ‘펠릭수야’가 자랑하는 자체 프리미엄 꽃바구니 세트를 골랐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저게 무슨 꽃인지 알 수도 없는 다양한 색깔이었다. 과연 비싸게 주고 살 만하다 싶네.
확실히 위용이 대단하다.
저걸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장미 100송이씩으로 보좌한다면 가히 좌 관우 우 장비를 대동한 유황숙의 위엄이 아닌가?
너희 유관장 3세트는 비록 한날한시 같은 비닐하우스에서 출하되지는 않았겠지만 분명 한날한시에 폐기될 테니 그리 슬퍼하지는 말 거라.
사람으로 치자면 호상이지.
운전기사와 내가 낑낑대며 차까지 대형 꽃바구니를 날랐다. 무겁긴 더럽게 무겁네.
“아니. 이게 도대체 뭔가?”
“제 마음을 받아주실 필요까지는 없고요. 댁에 놔두시고 감상해 주십시오.”
“핫하하하하.”
트렁크에는 간신히 들어갔다.
회장댁은 용산구의 어느 고급 개인 주택이었다.
한때는 부자 동네 하면 평창동, 성북동이었지만 요즘은 용산이 뜬다고 하던데. 확실히 부자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것 같다. 주변을 들러봐도 전부 비슷비슷한 크기의 대형 주택들뿐이었다.
“같이 들어가지.”
“네. 알겠습니다.”
과연 자동차 마니아에 걸맞은 주차장이었다.
얼핏 봐도 최소 열대는 넘는다.
모두 합치면 도대체 얼마야?
내가 판 흰색 스포츠카도 그 틈에 당당히 도열해 있었다.
“요즘 저 차 타는 재미로 살고 있어. 나한테 팔아줘서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지하 주차장에는 조그만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걸 타고 함께 위로 올라갔다.
입구에는 비싸 보이는 중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현관에서 실내까지 거의 십 미터는 될 법한 긴 복도였다.
집안으로 들어오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기둥이었다.
실내에 기둥이 있다는 건 도대체 집안이 얼마나 넓은 겁니까? 재계 서열 100위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구나. 100위가 이 정도면 진짜 최상위 재벌은 도대체 얼마나 잘해놓고 사는 거냐.
“거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식사는 곧 준비될 거야. 뭐라도 마시겠나?”
“아닙니다. 곧 저녁 먹을 텐데요.”
“그게 좋겠군.”
2층 계단에서 누군가 천천히 내려온다.
아 저분이구나.
자료 화면에서 가끔 보던 은퇴한 탤런트를 실물로 보니 신기했다.
확실히 미모라는 건 클래스다. 폼은 일시적으로 변해도 클래스는 변하지 않는 법이지. 한번 미인은 늙어 죽을 때까지 미인.
“안녕하십니까. 서지오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 와요. 잘 오셨어요.”
목소리도 우아하시네.
“내가 같이 저녁 먹자고 불렀어. 얼마 전에 나한테 차 판 사람이야. 핫하하하.”
“자동차 대리점을 운영하시나 봐요.”
“아닙니다. 저는 미주그룹 영업 3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회장님께서 직원을 집에 데리고 오신 건 참 드문 일이네요. 중역분들 같은 경우는 어쩌다 한 번 모시긴 하지만.”
“자. 그런 얘기는 이따가 차차 하고 저녁은 준비됐어?”
“네. 다 됐어요. 지금 드시겠어요?”
“그러자고. 시장하네. 아 참. 잠시만. 저기 김 기사.”
“네. 회장님.”
“서지오 과장이 가지고 온 선물은 어디 있지?”
“트렁크에서 일단 꺼내놨습니다. 조금 있다가 엘리베이터로 옮기려고요.”
“지금 가져와. 선물은 바로 펼쳐봐야지.”
“알겠습니다.”
“저도 거들겠습니다.”
“아니야. 손님한테 그런 일을 시킬 순 없지.”
“선물이라고요?”
“응. 서 과장이 당신 주려고 오는 길에 샀어.”
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부담되잖습니까.
회장 사모 노미숙이 나를 한번 쳐다본다.
더 부담되네.
“간단하게 손 씻고 식당으로 같이 가지. 화장실은 저쪽에 있어. 찾기 쉬울 거야.”
“알겠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본 화장실 중에서 최고급이었다. 갑자기 현재 살고 있는 고시원이랑 비교되네. 돈으로 치자면 여기 변기 하나만도 못할 것이 분명하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꽃바구니가 거실에 도착했다.
가운데 유비를 필두로 좌우 관우 장비가 늠름하게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어머.”
“우와아.”
“세상에.”
일하고 계시던 가사 도우미들까지 모두 나와본다.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사진 찍는 데 여념이 없으시다. 찰칵. 찰칵. 찰칵.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네.
노미숙도 마치 꽃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바구니 주변을 맴돈다.
“두 분 나란히 서시죠. 제가 사진 찍어드리겠습니다.”
“여보. 같이 찍어.” “그럴까?”
“김~치.”
찰칵.
“사진이 잘 나왔습니다. 누가 꽃이고 누가 사모님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네요.”
내 입에서 나도 깜짝 놀랄 멘트가 튀어나온다.
이놈의 사회생활이 뭔지.
“아하하하핫. 자네도 참.”
“훗. 지오 씨는 어쩌면 말도 참 이쁘게 하시네.”
갑자기 호칭마저 지오 씨로 바뀌었다.
“여보. 이거 좀 봐봐. 어쩌면 이렇게 예쁘지.”
“서 과장이 골랐어. 나 모르게 이미 주문해놨더라고.”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빈손으로 오기는 뭣해서 준비해봤습니다.”
회장 사모 노미숙은 나를 처음 봤을 때 지극히 사무적인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영업 3팀 과장이란 소리를 듣자 ‘내가 왜 이 녀석이랑 같이 밥을 먹어야 하지?’라는 표정까지 언뜻 비쳤다.
그러던 것이 꽃바구니를 보고서는 진심 어린 미소를 환하게 지어 보인다. 여자들이 귀여운 강아지를 봤을 때의 그 표정이었다.
제대로 먹혀들었네.
내가 쏜 화살은 목표물인 말에게 정확히 적중했다.
“꽃 선물을 받아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당신 좀 반성해야겠어요.”
“그러게. 서 과장 덕분에 내가 혼이 나게 생겼네. 핫하하하.”
임태수 회장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웃음소리가 경쾌하기만 했다.
“지오 씨. 어서 저녁 먹으러 가요. 배고프시겠다. 차린 게 없어서 부끄럽네요.”
“아닙니다. 잘 먹겠습니다.”
“호호호. 어서 가요.”
회장 사모가 손수 내 등을 떠밀며 식탁으로 안내했다.
갑자기 사위라도 된듯한 분위기네.
냄새부터 장난이 아니다.
야~ 이건.
아직 음식이 본격적으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쿵. 쿵. 쿵. 쿵.
2층 계단 쪽이었다.
노미숙이 우아하게 걸어 내려올 때는 몰랐는데 엄청 시끄러운 계단이었네.
“우주야. 뛰지 말라니까. 손님 계신 데 창피하게 왜 이러니.”
“우와아~. 엄마. 꽃 이거 뭐야? 아빠가 사 왔을 리는 없고. 어? 누구 ··· 세요?”
“여기 지오 씨가 갖고 오셨어. 아빠 회사 직원분이시다.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지.”
“감사합니다. 아 배고파.”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지오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고개를 가볍게 까딱거린다.
이 사람이 작은딸 임우주구나.
언니인 임하나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이란성 쌍둥이였었구나. 말투나 행동이 딱 그 나이 또래 평범한 여자애들 같았다.
그런데 언니와는 전혀 딴판인 미모였다.
언니인 임하나가 차분하고 반듯한 이미지라면 동생인 임우주는 뭐랄까.
한 성깔 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동생 쪽이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원래 보통 언니랑 동생이 있으면 동생이 더 예쁘긴 하지.
연예인을 실제로 본 건 몇 번 안 되지만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화려한 미모였다.
김호창 대리가 전에 알려줬던 소문이 맞긴 맞나 보네. 확실히 노미숙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엄마. 나 빨리 먹고 나가야 하니까 조금만 줘.”
“저녁에 어딜 나가?”
“조금 전에 일어났으니까 나한테는 이제 아침이지. 맛있겠다. 흐음.”
“미안해. 딸이 아직 철이 없어서.”
“아닙니다. 방금 일어나셨으면 지금 완전히 배고플 시간대죠. 저도 그 시간에 일어나봐서 잘 압니다. 예전에 한창 게임에 빠져 살 때가 있었거든요.”
임우주가 게임이란 말에 반응한다.
“무슨 게임이요?”
“제가 좀 취향이 특이해서요. 모바일이나 콘솔 게임 말고 한때 PC 게임에 푹 빠졌거든요. 혹시 그 게임 아세요? 어떤 문명 하나를 골라서 자기만의 고유한 테크트리를 올리면서 발전시키는 거죠. 폐인 양성 게임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가끔 하긴 해요. 아마 모르실 겁니다.”
“흐흐흐흣. 무슨 문명 주로 하시는데요?”
어? 그럼 님도 혹시?
어쩌면 님과 나는 이미 온라인 멀티 게임에서 상대방으로 만난 인연일지도?
“저는 문화 발전이 쉬운 쪽으로 하는데요. 정복은 일일이 컨트롤 하기 귀찮아서. 내정 키우는 재미로 합니다.”
“러시아 하시나 봐요?”
“아니요. 그건 너무 사기죠.”
회장 내외와 재미없고 뻔한 덕담만 주고받으리라 예상했던 저녁 식사 자리는 엉뚱하게도 진지한 게임 토론의 장으로 변해있었다.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 PC 게임에 20대 여성 유저라.
이건 참 희귀하네.
현관 쪽에서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다녀 왔습니다.”
임하나였다.
이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버벅거리면서 ‘회. 회장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셨어. 난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이렇게 당황하면 너무 찐따 같다.
당당하게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