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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특별한 순간
임우주는 임하나와 전혀 딴판이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성격까지.
임하나가 조신한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이라면 임우주는 청담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로수길 어딘가를 친구와 수다 떨며 거닐고 있을법한 발랄함이 있다.
강남역 피시방이라.
강남역도 나랑 잘 안 어울리는데 피시방이라니.
강남역 술집에서 최근 안 좋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 번잡하고 사람이 많다. 기 빨리는 느낌이랄까.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I’형 인간이구나.
피시방을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지? 기억도 안 나네.
내가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축구 온라임 게임 아니면 총 쏘는 게임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무슨 게임이 대세인지 모르겠다.
하긴 요즘 누가 게임 하러 피시방을 가나.
데이트 장소로 많이 이용한다고 하던데.
커플석을 고를까 하다가 그건 좀 ···. 마침 커플석은 빈자리도 없어서 그냥 일반석에 앉았다.
컴퓨터 사양에 눈이 번쩍 떠진다.
나때는 그래픽 카드 700번대면 떡을 치고도 남았는데 무려 3000번대였다.
키보드 키감도 예술이네. 도그닥 다그락.
이 맛에 피시방을 오는구나.
간식 주문하기도 편리하게 잘 되어 있네.
고등학교 동창 녀석 중 하나가 피시방 하다가 인근에 경쟁 피시방이 너무 많이 들어서서 폐업했다고 들었다. 피시방은 음식 장사라서 피시방 요금으로는 전기세 내봤자 남는 게 없다고 투덜거렸던 게 생각난다.
“과장님.”
“왔어?”
“언제 오셨어요?”
“방금. 얼마 안 됐어. 옆에 자리 비었네. 앉아.”
“왜 여기 골랐어요. 커플석이 게임 하기는 더 편한데. 자리도 넓고.”
그렇긴 하지.
“커플석 빈자리가 없어.”
“그럼 이따가 자리 비면 옮겨요.”
“알았어. 알바한테 말해 놓을게.”
“음~~.”
오자마자 일단 메뉴부터 정독을 시작한다.
“라면 드실래요?”
도대체 피시방에서 먹는 라면은 왜 그렇게 맛있는 겁니까?
하도 궁금해서 전에 피시방 알바가 라면 끓이는 걸 지나가면서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다.
비결이 분명 있긴 있었다.
면과 수프를 한꺼번에 넣고 끓이다가 면만 계속 건져 올렸다 담갔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면을 따로 덜어서 그릇에 옮긴다.
계란을 남은 국물에 풀어서 마저 끓인 후 미리 건져놓은 면에 부어서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러면 면발이 여전히 꼬들꼬들하게 유지가 된다.
“난 만두라면.”
난 라면을 먹을 때 항상 만두를 추가한다.
만두야말로 어떤 음식에 들어가더라도 제 몫을 충분히 해주는 만능 해결사.
“어? 진짜요? 저도 항상 만두라면으로 먹는데. 과장님 저랑 식성이 정말 비슷하시네요.”
이 집 자매들이랑 난 입맛이 정말 똑같네.
입맛이 비슷한 부부끼리 만나면 잘 산다고 어디서 듣긴 했는데. 결혼해보니 먹는 거 가지고 제일 크게 싸우더라.
“그럼 오늘은 아예 만두로 한 우물을 파볼까? 군만두 추가 어때?”
“흐흐흐흣. 찬성. 저도 마침 군만두 먹고 싶었어요.”
음료수로 나는 당연히 식혜, 임우주는 콜라를 골랐다.
“라면에 식혜를 드세요?”
“응. 난 어떤 요리든 후식은 식혜를 먹어.”
“언니랑 진짜 똑같다. 언니도 식혜라면 미치는 여잔데.”
그래. 그렇더라. 식혜왕으로 소문난 나만큼 식혜를 잘 먹는 여자는 처음 봤어.
게임에 집중하면서 젓가락을 쉬지 않는 임우주의 옆모습은 마치,
시사 프로그램에서 사회 문제라며 등장하는 어느 방구석 게임 폐인 같았다.
저렇게 예쁘게 생긴 게임 폐인이 어디 있겠어.
언니인 임하나가 고시 3관왕이라면 동생인 임우주는 고시 3.3관왕쯤?
전공도 왠지 예체능계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음대생 느낌은 아니지.
대학 다닐 때 가끔 지나가면서 본 음대생들은 저런 삘이 아니었다.
차라리 언니인 임하나가 더 음대생이라면 믿을까.
체대생은 더더욱 아닌 것 같고.
“혹시 전공이 미술 쪽이야?”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빠가 얘기했나.”
“아니. 그냥 찍었어. 왠지 그럴 것 같았거든.”
“잘 맞히시네요. 제 혈액형은 뭐 같아요?”
내가 박수무당으로 보이니?
“사람들이 AB형 아니냐고 많이 물어보지?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A형이고.”
“헉. 과장님. 대체 그걸 어떻게.”
그야 우리나라 사람 셋 중 하나는 A형이니까.
또 이렇게 사람 하나 낚았구나.
“와아~. 소름. A형 맞힌 건 그렇다 치더라도 AB형으로 착각한다는 것까지는 정말.”
“앞으로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도달하면 연락해.”
“그럴게요.”
“그리고 게임도 더 연습하고. 넌 아직 어리니 발전 가능성은 충분해. 너 때문에 우리가 졌잖아.”
“아니죠. 그건 아까 과장님이 상대방 수비 라인에 꼴아박으신 덕분 아닐까요?”
패배는 아군을 분열시킨다.
어른답게 불필요한 논쟁은 적당히 마무리해야겠네.
“그야 니가 병력을 안 보내서 할 수 없이 1:2로 싸운 거잖아. 자 이번 판은 잘 해보자. 승리했을 때 영웅이 나타나는 거 알지? 파이팅.”
“네. 파이팅해요.”
게임 시작을 기다리는 사이 임우주는 잠시 볼 것이 있다며 인터넷 창을 연다.
저렇게 집중 안 하다가 아까처럼 또 지는 거 아니야. 대체 뭘 보길래.
홈페이지 첫 화면에 미술품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확실히 미술 전공이라서 잠깐 짬이 나는 동안에도 그림을 보는구나.
임우주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음~. 이진수 정도면. 수정이 아버님도.”
2:2 게임 매칭이 잘 안 되네. 이 시간이면 많이들 할 때인데도 오늘은 영 멀티 채팅방이 한산하다.
게임 매칭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나도 바탕화면으로 나와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포털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첫 화면에 대형 배너 하나가 뜬다.
응?
이거 방금 임우주가 보던 거랑 똑같네.
‘국내 회화 작가 특별 경매 이벤트.’
미술품 경매 광고 배너였다.
내 모니터를 흘낏 보던 임우주가 웃는다.
“훗. 저랑 같은 거 보시네요. 그 경매에 관심 있으세요?”
“아니. 난 그림 이런 쪽은 완전 문외한이야. 관심도 없고. 포털사이트 들어가니까 첫 화면에 있길래 클릭해봤어. 광고를 엄청 크게 하네.”
“최근 몇 년 만에 제일 큰 경매가 열렸어요.”
부자들은 미술품 경매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미술품은 세금 혜택이 커서 잘만 거래하면 부동산이나 주식보다 수익률이 훨씬 높다고 하던데.
“이번 경매에서 이진수 작가의 ‘무제’가 나와요.”
아까 이진수라고 중얼거린 게 화가 이름이었구나.
“유명한 사람이니?”
“네. 엄청 유명하죠. 우리나라 화가 중에서는 전 세계에서 인지도 탑일 거예요.”
“그럼 그림도 엄청 비싸겠다?”
“네. 생존한 국내 작가 중에서 제일 비싸게 팔리죠. 혹시 그거 아세요? 생존한 국내 작가 그림은 나중에 팔 때 양도세를 안 물어요.”
“그래?”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샀다가 팔면 양도세를 내야 한다. 그런데 그림은 양도세를 안 내는구나.
“항상 양도세 면제는 아니고요. 몇몇 예외가 있어요. 하여튼 이번 이진수의 ‘무제’는 노리는 사람이 많아요. 이진수 작가 연세로 볼 때 향후 이십 년 정도는 돌아가실 염려가 없거든요. 이번에 매입하면 최소 이십 년은 팔 때 세금을 안 내도 된다는 의미죠.”
“교통사고라도 나서 갑자기 돌아가시면 낙찰받은 사람이 곤란해지겠다.”
“후흐흐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랑은 상관없는 먼 세상의 이야기다.
미술은 어릴 적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그려본 게 전부다.
경매라.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떠오르네.
서로 손을 들어가며 가격이 올라가다가 결국 땅땅 두드리며 누군가는 낙찰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경매가 열리긴 열리는구나.
영화에서는 가끔 위작이 경매에 나와서 주인공이 가짜를 한눈에 알아보고 ‘저 그림은 가짜입니다. 그리고 범인은 이 안에 있습니다.’라면서 진짜를 찾아내지 않나?
“가짜 그림이 경매에 나오는 경우는 없어?”
“골동품일 때는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요. 생존작가의 경우는 희박하죠.”
“왜?”
“화가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모를 수가 없거든요.”
“하긴 그렇겠다. 자기 자식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게다가 이진수 화가는 특징이 있어요. 자기 그림에 꼭 ‘1ㅅ1’이라는 시그니처를 남겨놓거든요. 밑그림에 숨겨 놓고 그 위에 덧칠하기 때문에, 판독을 해보면 다 드러나요. 위치도 매번 달라서 작가만 어디에 해 놨는지 알 수 있죠.”
“그럼 위작일 가능성은 전혀 없겠구나.”
“네. 100퍼센트 확실하죠. 그나저나 오늘은 게임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네요.”
그러게.
“좀 기다려보다가 매칭이 안 되면 너랑 나랑 1:1 대결하자.”
“좋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평소보다 확실히 채팅창이 한산하다.
경매 배너를 지우려고 오른쪽 위 ‘X’를 누르려던 참이었다.
어?
이것 봐라.
배너의 어떤 문구가 눈에 꽂힌다.
‘결제 가능 수단 : ···, 신용카드.’
카드로 경매에서 미술품을 살 수 있다고?
잠깐만.
배너를 클릭해서 상세한 설명을 보기로 했다.
저렴한 것은 몇십만 원부터 비싼 것은 몇천만 원까지 다양했다.
아까 임우주가 얘기했던 이진수 화가의 ‘무제’는 아예 경매 시작가 자체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다음 달 14일 별일이 안 생긴다면 또다시 비트코인 캐시백이 입금된다.
12억의 220퍼센트인 무려 26억 4천만 원.
총알은 넉넉히 준비되어 있다.
만약 26억 원을 한 방에 긁을 수만 있다면?
이건 대박 정도가 아니지.
“아까 그 화가 말이야. 이진수라는.”
“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고 비싼 화가라면서.”
“그렇죠.”
“이번에 경매에 나온다는 ‘무제’ 말인데. 노리는 사람이 많다면 낙찰가가 대강 얼마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갑자기 왜요?”
“아니.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져서.”
“엇. 매칭됐다. 과장님 시작해요. 고고고.”
“응. 알았어. 파이팅.”
게임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오로지 경매 생각뿐이었다.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진수라는 유명 화가의 ‘무제’라는 작품이 이번 경매에 나오고.
얼마까지 가격이 오를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알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만약 그걸 내가 낙찰받아서 곧바로 되판다면?
난관은 존재하지만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
제일 문제는 역시 내가 낙찰받았다가 되파는 것이다.
아니지. 일단 얼마에 낙찰받을 수 있을까?
이번에 샀던 금보다 더 비쌌으면 좋겠는데.
아까 임우주가 중얼거렸던 나머지 말이 생각났다.
수정이 아버님.
누구지?
임우주 정도면 주변에 부자 친구도 많을 테고 수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친구겠지.
친구 아빠가 경매에 참가한다는 뜻? 임태수 회장 정도의 부자일까?
만약에 말이지.
내가 그림을 낙찰받아서 곧바로 그 수정이 아빠라는 분에게 다시 되팔 수만 있다면?
이건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닐까?
지금까지 흰색 스포츠카도 골드바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살 사람을 미리 구해놓고 신용카드를 긁었다.
수정이 아빠라는 분과 연락만 닿는다면?
그래서 그분에게 내가 낙찰받았던 가격보다 조금 더 싸게 팔겠다면 누가 그걸 마다할까?
“과장님. 뭐 하세요? 게임에 집중 안 해요?”
“열심히 하고 있어.”
구라였다.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경매 생각뿐이다.
이까짓 게임 이기면 어떻고 지면 어떤가.
수십억이 걸려 있다.
만약 26억에 낙찰을 받고 손해는 당연히 감수하면서 되판다면 도대체 다다음달 14일 얼마가 들어오는 거냐.
얼핏 계산해도 57억이 넘는다.
와아아아~.
이건 사나이의 피를 들끓게 만드네.
게임은 현실에 비할 바가 못 되는구나.
“임우주.”
“과장님. 12시.”
“이진수 화가의 그 ‘무제’. 예상 낙찰가를 알려줘.”
“이번 게임에 이기면 가르쳐 드릴게요. 과장님 유닛 놀아요.”
시발. 오냐.
이기면 되잖아.
갑자기 집중력이 높아진다.
1시간이 넘어서야 겨우 승부가 났다.
“과장님.”
“왜?”
“존경합니다.”
“20퍼센트의 힘만 발휘했을 뿐이야.”
똥줄이 타들어 가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예상 낙찰가는 얼만데?”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하신지 모르겠지만 약속했으니 알려드릴게요. 업계에서는 최소 20억 원 이상을 예상한대요.”
최소 20억?
내 총알은 26억.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겠구나.
게임비랑 만두값은 내가 계산했다.
“오늘 게임 재미있었어. 담에 또 보자.”
“저도요. 간만에 즐겜했어요.”
“그럼 잘 가.”
“과장님. 비밀 한 가지 더 알려드릴까요?”
“뭔데?”
임우주가 싱긋 웃으면서 뒤돌아선다.
“제 혈액형은 A형이 아니라 B형이에요.”
임우주.
너 아주아주 위험한 여자구나.
남자는 여자에게 반하는 어느 특별한 순간이 있다.
내 심장은 그 1m 앞에서 간신히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