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눈에 간파하다
[안녕하세요. ‘이것이 이혼이다’ 프로그램 메인 피디 박하준 님 맞으신지요?]
[네.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저는 이지영 씨의 변호사입니다.]
[이지영 씨가 누구죠?]
[벌써 잊어버리셨습니까? ‘동탄의 그녀’ 편에 출연했던 주인공이셨습니다.]
[그분이라면 당연히 알죠. 죄송합니다. 제가 이름을 잘 못 외워서요. 그런데 저한테는 어쩐 일이십니까?]
[추가 제보를 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메인 피디 박하준은 시큰둥했다.
빼먹을 건 다 빼먹었는데 뭐가 더 남았나?
자극적인 소재로 시청률 대박이 터졌다. 물론 눈살찌푸려지는 몇몇 장면으로 심의위원회의 주의까지 받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책임 프로듀서는 오히려 잘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이지영 씨가 저번에는 더 말씀하실 내용이 없다고 그러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남편분과의 사이에서 추가 제보하실 게 남았습니까?]
[남편이 아닙니다.]
[그럼요?]
바람 핀 상대가 남편의 동창 그것도 두 명인 것으로 히트했다. 더 쇼킹하거나 자극적인 게 없다면 시간 낭비일 텐데.
[미주그룹 임누리 상무이사에 대해서 아십니까?]
임누리? 갑자기 그 녀석이 왜?
[알긴 알죠. 예전에 그 누구였더라.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숨진 여배우 사건에서 입 함부로 놀렸다가 호되게 욕먹은 사람 아닙니까.]
[맞습니다. 고인에게 가성비가 떨어지는 여자라 자기는 만나지 않았다고 했었죠.]
[흐흐흐. 기억나네요. 그런데 그 친구가 왜요?]
메인 피디는 슬슬 궁금증이 샘솟기 시작했다.
[이지영 씨의 남편이었던 서지오가 미주그룹에 근무합니다.]
[음~. 그래서요?]
[이지영 씨의 어머님께서 서지오에게 따지러 미주그룹을 찾아갔다가 사소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걸 빌미로 이 임누리라는 작자가 이지영 씨를 협박한 겁니다. 자기의 노리개가 되지 않으면 이지영 씨의 어머님에 대한 법적 대응을 불사하겠다면서요.]
가만.
‘이것이 이혼이다’ 메인 피디로서의 촉이 발동한다.
야 이건 그림 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괘씸하게 여기는 게 재벌가 2세들의 일탈이다.
자세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일단 재벌 2세가 루머에 연루되기만 하면 돌멩이부터 집어 던지고 보는 게 대한민국 아닌가.
미주그룹이 거대 재벌가까지는 아니지만, 임누리 정도면 막말 전력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충분히 인지도가 있다.
요거 괜찮네.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데요. 혹시 증거가 있습니까? 증인이라든지. 물론 제일 좋은 건 녹취록이나.]
[녹음이 있습니다. 무려 라이브 녹음입니다. 임누리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긴 녹음 파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누리의 DNA를 채취할 수 있는 피임기구까지 확보되어 있습니다.]
노다지가 터졌구나.
박하준은 벌써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증거 자료를 저희에게 넘겨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 사본으로 말입니다. 저희가 이것저것 검토해볼 게 워낙 많아서요.]
[물론입니다. 곧바로 보내드리죠.]
[내부 회의를 거친 후에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책임 프로듀서 방으로 달려갔다.
똑똑.
“야. 넌 기본도 안 배웠냐? 들어오란 말도 안 했는데.”
“형. 지금 노크가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끼리 무슨 격식을 차려. 똑똑 두 번 두드렸으면 CP 대접은 해줬으니 그냥 넘어가.”
“뭔 일인데?”
“형.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어?”
“···.”
“삼정그룹 같이 원탑 재벌은 형도 겁날 테고. 미주그룹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아?”
“이혼 프로에서 미주그룹이 갑자기 왜 튀어나와?”
박하준이 쇼파에 털썩 앉는다.
“쇼파 꺼지겠다.”
“미주그룹 임태수 회장 장남 임누리 상무. 걔가 우리 프로에 출연했던 여자를 협박해서 건드렸나 봐.”
“그래?”
“이건 내 느낌인데. 그 여자 말이야. 미리 함정을 파놓고 임누리가 빠지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
“그건 우리가 알 필요 없고. 흐으음~ 임누리랑 미주그룹이라.”
“뭘 고민해. ‘이것이 이혼이다’에서 내보내자.”
“다른 시사프로가 더 어울리긴 한데.”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내가 물어온 건데 내가 찍어야지. 자신 있어. 형 이번에 제대로 밀어줘. 나도 언론인 상 한번 타보자.”
책임 프로듀서는 말없이 천장만 바라본다.
“사장한테는 형이 직접 설득해줘. 사장이랑 고등학교 동문에다가 고향 후배잖아. 이보다 좋은 빽이 어딨어.”
“···.”
“이거 잘하면 우리가 최초 단독 보도가 되는 셈이야. 듣기만 해도 죽이지? 최초 단독. 후흐흐흐.”
“···.”
“임누리. 그 막말의 끝은 어디인가? 마침내 드러나는 악마 같은 진실. 두 어린 딸의 엄마는 어떻게 재벌 2세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나? 이 이혼의 끝자락에서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반전은? 어때?”
“야 임마.”
“맡겨보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넌 직업을 잘못 골랐다. 종편조차도 너라는 꼴통을 담기에는 너무 깨끗해. 이참에 아예 사표 쓰고 유투버로 전직하는 게 어떠냐?”
“내가 썸네일 하나 따는 건 또 끝내주지. 도저히 클릭 안 하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거든.”
“몰라몰라. 마음대로 해.”
“허락하는 거지?”
“잘되면 내 탓 망하면 니 탓이다.”
“언젠 안 그랬어?”
**
이진수라는 화가에 대해서 알아봤다.
상당히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미대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돌연 공무원시험을 쳐서 9급 공무원이 된다. 그것도 사회 복지 공무원. 그 후로는 취미 삼아 틈틈이 그림을 그리다가 서른을 훌쩍 넘겨 어느 미술 콩쿠르에 응모한 것이 계기가 되어 등단한다.
충격적인 화풍으로 단숨에 업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기린아로 등극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 유럽 쪽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장에 나오는 족족 우리나라 미술품 최고 가격을 경신하면서 상업성도 인정받는다.
내가 보기에는 기괴하기만 한 장난질 같은데 저걸 수억이나 주고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저 그림에서 무슨 감동을 얻는다는 걸까? 미술의 세계는 멀고도 난해하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나한테는 그저 신용카드를 긁을 대상일 뿐이다.
처음에는 상품권 그러다가 스포츠카, 금, 마침내는 미술품까지. 불과 몇 달 전의 나였다면 도저히 상상도 못 할 행보다.
캐시백이 들어오면서 나한테도 변한 게 생겼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제까지는 땅만 보고 걸었다면 지금은 저 먼 곳이 보인다.
진짜 큰돈, 큰 세상은 따로 있는 걸 실감했다.
한 번 큰물에서 노는 법을 아주 살짝 맛보고 나니까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좁은 세상이 답답하다.
하지만 허영심 때문에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리면 끝장이지.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휴우우~.
헛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숨을 내쉬고 잡념부터 몰아냈다.
이번에 경매에 나온 이진수의 ‘무제’.
그런데 이 녀석은 경매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골치 아픈 놈으로 전락해 버렸다.
작가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위작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진수의 어떤 습관이었다.
이진수는 자기의 그림에 항상 ‘1ㅅ1’이라는 시그니처를 숨겨둔다.
스케치 단계에서 시그니처를 적어두고 그 위에 채색한다.
이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위작자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시그니처를 넣어서 가짜 그림을 만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원작자인 이진수만이 시그니처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진짜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데.
‘무제’는 하필 이진수가 밝힌 시그니처의 위치와 똑같았다.
위작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계기는 이 그림이 한 번 도난당했었다는 사실이 불과 며칠 전 뒤늦게 밝혀진 것.
만약 진품이라면 무려 20억이 넘는 거액을 한꺼번에 카드로 긁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자동차나 금을 연달아 또 사기에는 부담된다.
괜히 국세청의 의심을 사면 곤란하지.
이런 경매가 자주 열리는 것도 아니어서 이번이 최적의 타이밍이다.
생존 한국 작가라서 나중에 양도세를 부담할 필요가 없다. 살 때 취득세나 보유세도 따로 없다. 경매수수료는 어차피 부담해야 하는 것이고.
여러모로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임우주.]
[과장님. 우주라고 부르세요. 왜 꼭 딱딱하게 임우주라고 그래요.]
[당분간은 그게 좋을 것 같아서. 하여튼 이진수 화가 말인데. 부탁이 있어. 주소나 현재 사는 곳을 알 수 있을까?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없더라. 내가 아는 미술 쪽 사람이라곤 너뿐이잖아.]
[제가 미술 전공이라고 어떻게 당연히 이진수 화가를 알겠어요.]
[그건 그렇지.]
[근데 왜 갑자기 이진수에 관해서 호기심이 생긴 거예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여기서 대충 얼버무리면 나만 이상한 사람 되고 임우주는 진심으로 도와줄 마음도 안 생길 것이다.
물론 캐시백 얘기는 빼야지.
[이번 경매에서 이진수 화가의 그 ‘무제’. 내가 낙찰받고 싶어.]
[제가 과장님을 잘못 봤네요. 그 정도로 부자셨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림에 관심 없다고 그러셨잖아요.]
[자세한 사정은 밝힐 수 없지만 난 그 그림을 사고 싶어. 또 산 후에는 다시 팔아야 하고. 아직 우리가 친한 사이도 아닌데 도와달라고 해서 미안하지만, 은혜는 잊지 않을게. 이진수를 만날 수 있게 알아봐 줘.]
[이진수를 만나서 뭐하시게요?]
[우선 진품인지 확인부터 해야지.]
[은혜라니까 마음 약해지네요. 은혜는 어떻게 갚을 건데요?]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나도 최선을 다해서 널 도울게. 사나이는 은혜와 원수를 절대 잊지 않아.]
[핫하하하. 갑자기 웬 사나이.]
나도 모르게 남궁형과 대화할 때의 말버릇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남궁형한테 너무 물들었어. 그 형은 틈만 나면 사나이 타령하면서 하는 짓 보면 할머니라니까.
[알았어요. 알아는 볼게요. 하지만 큰 기대는 마세요.]
[정말 고마워.]
며칠 뒤에 임우주로부터 연락이 왔다.
경기도 어느 전원주택에 산다는 것이다.
한 다리 건너서 아는 교수가 몇 달 전에 이진수와 같이 식사를 하고 그곳에 데려다준 적이 있단다.
[대신 저도 같이 갈게요.]
[니가 왜?]
[그냥 궁금해서요. 이진수라는 유명 화가가 어떻게 작업하는지도 그렇고. 또 ···.]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힘들게 알아봐 줬는데 이런 사소한 부탁쯤이야 별것도 아니지.
임우주의 차를 얻어타고 경기도 그 전원주택으로 향했다.
혹시 집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위치부터 파악하자. 내가 나중에 혼자 따로 방문하면 되니까.
안에 사람이 사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당도 정돈되어 있고 창문도 열려 있었다.
천재라면 왠지 괴팍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쫓겨나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초인종부터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이번 경매 때문에 말씀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경매사 직원분이세요?]
[그건 아닙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임우주가 재빨리 인터폰으로 다가온다.
[저는 박현식 선생님 제자입니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박 선생님 제자시라고요?]
말이 없다.
아주 좋은 징조다.
[멀리서 오셨을 텐데 일단 들어오세요.]
“진짜 제자냐?”
“아니요.”
훗. 얘랑 손발이 잘 맞네.
첫인상은 공무원 같았다.
옷도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었으리라 예상했던 내 선입견이 너무 과했나?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지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우주입니다.”
“이진수입니다. 앉으시죠. 집이 어수선해서 손님 대접이 변변치 않네요. 하하하핫. 박 선생님은 잘 계시죠?”
“네. 그럼요.”
자기 그림이 위작 논란에 휩싸여 있는데도 굉장히 편안해 보인다. 걱정근심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달까.
이상하네. 왜 저렇게 태평이지.
“위작 논란 때문에 근심이 많으시겠습니다.”
“역시 그것 때문에 오셨군요.”
여전히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다.
오히려 싱글벙글이라고 해야 하나.
저건 마치.
내가 14일 자정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릴 때 같은데.
이거 혹시?
종합 수입 상사 과장 짬밥을 무시하면 안 되지.
홍보에는 나도 일가견이 있는 몸이다.
비슷비슷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으려면 별짓을 다 해야 한다.
그리고 그중에는 양날의 검이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는 마케팅 기법도 있는데.
“노이즈 마케팅 중이시군요. 경매사랑 얘기도 다 되셨죠?”
이진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한다.
“낙찰가를 원하시는 액수까지 높여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얘기를 계속 들어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