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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가 아님
“일부러 위작이라고 소문낸 걸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진수 화가.
이분 성격 마음에 드네.
괜히 구질구질하게 잡아떼지 않는다.
단시간에 인지도 올리기에는 노이즈 마케팅만 한 게 없지.
“한 가지만 가르쳐주시면 계속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
“진품이라는 증거를 알려주십시오. 나중에 언론에 발표하실 내용 그대로요.”
“왜 알고 싶으시죠?”
“따로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절대 외부로 알리지는 않겠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게 알려지면 김이 팍 새잖아요. 그건 제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건 이진수의 ‘무제’가 진품이라는 증거.
오직 원작자만이 알고 있는 어떠한 사실이 필요하다.
이진수가 말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 계속 갈등해라.
“약속해주실 수 있습니까? 경매사 측과 합의한 날짜가 있습니다.”
“그게 언제죠?”
“다음 달 경매 시작 3일 전입니다. 그때까지는 외부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절대 안 됩니다. 각서까지 썼어요.”
“말씀하신 날짜까지 외부로 유출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은 꼭 지킬게. 그게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사람들은 제 시그니처가 하나뿐인 줄 알고 있습니다. ‘1ㅅ1’라는 시그니처는 많이 알려져 있지요.”
“하나가 아니었군요.”
“실은 2개가 더 있습니다. 캔버스 바닥 얇은 공간에 ‘hyunky’, 그리고 오른쪽 제일 하단 부분에 ‘Migo’. 빈 여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그니처 위에 흰색 물감을 칠한 겁니다. 판독해보면 나옵니다. 경매사 쪽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hyunki’와 ‘Migo’라.
“무슨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나요?”
“아닙니다. 현기는 아버지 존함이고 미고는 광고에서 우연히 봤는데 배경 음악이 기억에 남아서 시그니처로 썼을 뿐입니다.”
그랬구나. 난 또 심오한 의미라도 담겨 있는 줄 알았네. 옆에서 임우주도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발설하실 분 같지는 않은데요.”
“제가요? 믿음직한 인상인가요?”
“그냥 감입니다. 제가 감이 잘 맞거든요. 저분도 박현식 선생님 제자 아니시죠?”
“네. 실은 그렇습니다. 죄송해요. 친한 고등학교 동창의 은사님이세요.”
“그랬군요. 두 분은 애인 사이시고요?”
이 양반 완전 엉터리네.
감이 좋기는 개뿔.
“그건 아닙니다.”
“그래요? 안 맞을 때도 있죠. 그럼 저한테 볼일 다 보셨으면 이제 그만 가 주십시오. 혼자 지내다가 손님들이 계시니 정신이 번잡스러워지네요.”
손님 대접이 변변치 않다는 자기 말은 확실하게 지키네. 하긴 내가 뭐 고마운 사람도 아니고, 차를 얻어 마실 생각도 애초부터 없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언론에 흘린다거나 하는 짓은 절대 안 하겠습니다.”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돌아갈 때도 임우주에게 운전을 맡기면 미안하다.
“내가 운전할게.”
“아니요. 제가 하고 싶어요.”
“미안해서.”
“덕분에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됐어요. 운전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알아요. 저도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안심해요.”
“다른 걸 하나 더 부탁하려고 해.”
“네?”
염치없어서 미안하다.
“강남역에서 게임 할 때 우연히 들었어. 수정이 아버님이라고 혼잣말 한 거 넌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다.”
“제가 그랬다고요?”
“응. ‘이진수라면 수정이 아버님도’ 까지만 얘기했는데 내 추측으로는 수정이 아버님이라는 분도 이진수의 그림에 관심 있다는 뜻 아니니?”
“훗. 과장님. 탐정이세요? 아니면 숨은 자산가? 정체가 뭐예요?”
“너희 아빠 직원이지. 그 수정이 아버님이란 분을 만나게 해줘.”
이진수의 ‘무제’를 낙찰받는다고 끝은 아니다.
문제는 현금화.
그림이란 게 주식처럼 공개 시장이 항상 열려 있는 것도 아니고 팔아치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면서 동시에 파는 방법까지 마련해두어야만 하는 처지다.
수정이 아버님은 분명 내가 낙찰받을 그림을 다시 사줄 좋은 구매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낙찰받은 가격에서 몇 퍼센트만 싸게 팔아도 그만큼 이득일 테니까 분명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 수정이 아버님께 제안 드릴 게 있어. 만나게 해줘. 이진수가 말한 다음 달 경매 시작 3일 전까지여야 해.”
“수정이를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은 많이 받아봤어도 수정이 아버님은 처음이네요. 흐흐흐흐. 과장님 정말 엉뚱하신 분이세요.”
맞아. 최근에 내가 엉뚱한 짓을 좀 많이 하고 다니긴 했어. 그건 인정한다.
“이상하게 과장님이 하시는 부탁은 거절을 못 하겠네요. 곧 이혼하신다니까 딱해서 그런가.”
이유는 뭐든 상관없다.
남의 감정까지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는 노릇.
좋게 봐주든 나쁘게 봐주든, 불쌍하든 한심하든.
“이번 일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그래야죠. 다 제 덕분인데.”
“전부까지는 아니고 한 7:3 정도?”
“제가 7이죠?”
“그냥 5:5라고 하자.”
사실 임우주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엄두도 못 냈을 계획이긴 했다.
생각할수록 고맙네.
임하나도 그렇고 임우주도 그렇고 얘들은 좋은 점이 부잣집 딸 티가 전혀 안 난다는 것이다.
가정교육을 참 잘 받았어.
“차에 기름은 내가 꽉 채워줄게.”
“정말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채우려고 했는데.”
부잣집 딸이면서 고작 몇만 원에 그렇게 고마워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잖아.
“내가 은혜를 꼭 갚겠다고 했지? 그것과 별개로 만약 계획이 성공하면 이 차 바꿔줄게.”
“진짜요? 제가 무슨 차를 사달라고 할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을 리 없다.
잘못 봤다면 그게 내 안목인 거겠지.
“말로만 고맙다는 사람은 되기 싫어.”
이제는 기다리면 된다.
다음 달에 열리는 경매.
그리고 임우주가 과연 만남 주선에 성공할지.
아직은 누군지 모를 수정이 아버님.
그분을 통해 2가지 불안 요소를 한큐에 해결할 작정이다.
내가 낙찰받은 그림을 다시 사줄 구매자를 확보하는 동시에 혹시라도 경매가 너무 과열되어서 내가 가진 돈이 부족할 상황이 닥치면 빌리는 거지.
수정이 아버님은 내 제안을 반드시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로테이션은 꽉 찼고 디저트는 자리가 있어.]
[그건 니가 몸으로 때워야지.]
[너희 집구석에서 내가 받아낼 만한 건 그것뿐이야.]
[잘 들어. 넌 디저트도 안 되겠다. 화장실로 정했으니까 그리 알아. 콜하면 달려오고 용무 마치면 꺼져.]
[3년 동안 계속 휠체어 뒤에서 밀고 법원 들락날락하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30분이야. 늦으면 고소 취소는 없어. 2주가 아니라 내가 부를 때마다. 그게 내가 정한 가격이야.]
[더. 더 숙여. 그래. 더. 지금 각도를 기억해. 이제 정말로 꺼져.]
‘이것이 이혼이다’ 예고편에서 ‘동탄의 그녀’와 대기업 장남 ‘A’의 대화가 고스란히 방송을 탔다.
각종 커뮤니티마다 난리였다.
-A 누군지 아시는 분?-
-ㄱㅇㄷ 이라고 함.-
-ㄴㄴ. ㅊㄱㅅ 이 확실함.-
-에휴. 다들 정보가 너무 느리시구나. ㅁㅈ 그룹 ㅇㄴㄹ입니다.-
-임누리요?-
-이분 돈 많으시네. 빨리 실명 지우세요.-
-쓰레기였네.-
-원래 그런 인간입니다. 사내에서도 소문이 엄청 안 좋아요.-
-님 미주그룹 직원이세요? 구체적인 썰 좀 풀어주시길.-
-아주 어마어마한 시발놈이다 그 정도만 알아두세요. 자세한 건 비밀 게시판 최다 추천 글 확인하시고.-
-안전한 베팅 즐거운 놀이터.-
-관리자는 광고 차단 안 하냐.-
-동탄의 그녀 실물 장난 아님. 내가 어제 마트에서 실제로 봤음. 초대박. 어지간한 연예인 싸대기 후리고도 남는 수준임.-
-그분 내가 개인적으로 좀 아는데. 얼굴보다 몸매가 진퉁이신 분. 라인이 예술임. 한국인은 절대 나올 수가 없는 라인임.-
-동탄의 그녀 무조건 우승. 이건 남편이 잘못했네. ㅇㄴㄹ는 개새끼가 맞고.-
예고편만으로도 파장이 어마어마했다.
[저희 제작진 앞으로 충격적인 제보가 도착한 건 열흘 전이었습니다.]
[저희는 오랜 내부 회의 끝에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생기지 않도록 막는 차원에서 방송을 결정하였습니다.]
[방송 장면 중에 다소 선정적이고 충격적인 부분이 등장할 수 있으니 시청자분들께서는 자녀들의 시청지도에 더욱 신경 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본방송은 15%가 넘는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다.
제일 하이라이트는 모자이크 처리된 A의 피임기구 영상이었다.
다음 회에서는 의학 자문을 거쳐 DNA를 채취하고 실제 A의 DNA를 요구해서 대조를 하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A 측에 전화 연결을 시도했으나 A 측이 거부하는 것으로 방송은 끝났다.
임누리는 핸드폰 녹음 어플의 파일을 지우라고 시켰던 비서실 직원을 따로 불렀다.
“어제 방송 봤냐?”
“···. 죄송합니다. 하지만.”
“봤냐고 묻잖아.”
“네. 봤습니다.”
“보니까 어때? 재미있었어?”
“상무님. 저는 분명히 그 여자의 녹음 파일을 모두 완벽하게 지웠습니다. 완전히 삭제하는 방법까지 인터넷으로 찾아서 그대로 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발. 그런데 왜 녹음 파일이 버젓이 돌아다니냔 말이야.”
“그건 저도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른 녹음 수단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나도 그건 생각해봤지만, 그 여자는 몸에 뭘 지닐만한 복장이 아니었어. 게다가. 이런 씨발.”
쾅.
임누리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을 내리치고 말았다.
“이 여우 같은 년이 날 갖고 놀았네. 내 신경이 핸드폰에 쏠리게 만들어 놓고. 가방. 맞아 그거야. 핸드백 안은 뒤지는 걸 깜빡했어. 하아아~.”
“어떻게 할까요?”
“넌 나가봐. 니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 나가.”
“안녕히 계십시오.”
“나가면서 법무팀 팀장 이리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미주그룹 법무팀장이 상무이사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할 일이 생기셨어요.”
법무팀장은 나이가 지긋하다. 임태수 회장과 비슷한 또래.
월급을 주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꽤 어렵게 모셔온 인사다. 검사장급 출신으로 임태수 회장과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임누리라도 함부로 대하기는 힘든 관계였다.
“어제 방송에 나간 일 때문이시죠?”
“네. 부끄럽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상대가 녹음 하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방심했습니다. 그것들이 제법 머리를 잘 굴렸더군요. 아마도 핸드폰 말고 다른 녹음 수단을 따로 준비했었나 봅니다. 저한테는 일부러 핸드폰을 보여줘서 그쪽으로 주의를 분산시켰고요.”
“미리 변호사가 일러줬겠죠. 상대가 만만치 않네요. 어느 로펌의 누구인지 혹시 아십니까?”
“그때 얼핏 들었는데 기억은 안 납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조만간 알게 되겠지요.”
“어떻게 될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승산은 전혀 없습니다.”
“흐으음.”
“상대가 합의만 해준다면 실형은 당연히 면하실 수 있습니다. 합의를 안 해준다고 하더라도 저희가 최선을 다한다면 집행유예 정도로 끝날 겁니다. 다만 회사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재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안 좋겠죠.”
“그렇군요.”
위이이잉. 위이이잉.
법무팀장이 핸드폰에 찍힌 발신자를 확인한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나가서 전화를 받고 돌아와도 되겠습니까? 꼭 받아야 하는 전화라서요.”
“그렇게 하시죠.”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법무팀장이 문을 닫고 나간 사이 임누리는 고민을 거듭했다.
이를 어쩐다.
설마 감방까지 가겠어?
집행유예만 해도 나쁘지는 않은 결과다.
이지영 그년이 쉽게 합의를 해 줄 리가 없다.
하숙향에 대한 고소를 취소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요구한다면 어찌어찌 되겠지.
결국 이 또한 그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잠잠해지면 이지영 이 개 같은 년을 절대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단단히 손을 봐두고 싶다.
덜컥.
법무팀장이 다시 들어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하숙향에 대한 고소를 취소하는 조건으로 이지영 측과 협상하는 방향으로요. 어떻겠습니까?”
“상무님.”
법무팀장이 가만히 임누리를 응시한다.
뭐지?
임누리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사건을 맡을 수가 없겠습니다.”
“아니. ···. 도대체 왜죠?”
“방금 제가 통화한 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일은 미주그룹과 전혀 무관하다. 따라서 상무이사 개인 자격으로 외부 변호사를 고용해서 처리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아. 아버지가? 정말로 저한테?”
“네. 맞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움이 못 돼드려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