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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그래야 하죠?
“상무님. 갑자기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아버지를 내가 뵙겠다는데.”
“하지만 회장님께서는 지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도냐?”
“죄송합니다. 별도 지시가 있으실 때까지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띠리리링.
“네. 임누리 상무님이십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비켜.”
임누리는 비서진을 좌우로 밀치고 회장실 방문 앞에 섰다.
늘 드나드는 문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크고 육중해 보인다.
똑똑.
“들어와.”
“들어가겠습니다.”
임태수 회장은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임누리는 처음에 가정했던 몇몇 상황을 되짚어봤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일단 말을 많이 내뱉는 건 악수다.
아버지가 말문을 여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1분 넘게 흘렀지만 아무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생각해뒀던 방법을 결행에 옮겼다.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는 미동조차 없으시다.
결국 임누리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
“미주그룹에 너무 큰 해악을 끼치고 말았습니다. 상무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제야 회장이 고개를 돌아본다.
“이사 해임 결의는 주주총회에서 결정할 사항이다. 사임하는 건 니 자유지만 그 전에 임시주총을 열어서 정식으로 해임을 결의할 거야.”
“···.”
너무하신다며 당장 항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해임이나 사임이나 어찌 보면 그게 그거다.
지금은 아버지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게 최우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널 잘못 키운 우리 내외 탓인 게지.”
“아닙니다.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할 말은 그게 다냐? 다 했으면 나가봐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임누리는 평소 늘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하필 이때서야 꺼내는 자신이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마치 누가 강요라도 하듯 입이 저절로 떨어진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제가 친자식이었어도 똑같이 하셨을 겁니까?”
“뭐야?”
“솔직히 너무 서운합니다. 잘못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온전히 같은 핏줄이었다면 ···. 만약 제 친아들이 그랬다면 저는 어떻게든 감싸고 보호했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하더라도요.”
“하아아~.”
“그까짓 이사 자리 때문이 아닙니다.”
“답답하구나. 내가 만나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답답하셔도 저만 하겠습니까.”
“너희 엄마와 너를 같이 키우기로 결심했을 때, 그때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두 내 잘못이구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깔끔하게 해결하겠습니다.”
임태수 회장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래. 이번은 어찌어찌 넘어간다고 치자. 니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다음에 분명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지겠지. 언제까지 계속할래? 반드시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왜 그렇게 극단적이십니까? 저도 나이를 더 먹으면 철이 들겠죠.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얻으면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말한 대로 결혼부터 하면 되잖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머니처럼 쫓겨서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엄마가 왜? 그게 무슨 의미냐?”
“그때 저는 7살이었습니다. 친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그 집안 인간들에게서는 첩이라며 조롱당하던 어머니가 어린 저를 데리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방송은 출연 금지당하시고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상황에서 어머니가 선택하신 게 아버지 아닙니까?”
“이놈이.”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갓 난 어린 쌍둥이 둘을 키워줄 여자가 필요했던 거잖습니까.”
“닥쳐. 당장 나가.”
멈춰야 한다는 건 한참 전부터 머릿속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한번 풀린 고삐는 제어가 안 된다.
평소에 절대 꺼낼 수 없던 말이 미친 듯이 흘러나온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정신이 맞나 싶을 정도의 폭주였다.
“별것도 아닌 일에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도 솔직히 이해 안 가고 저를 감싸주지 않으시는 건 더 화가 납니다.”
“임시 주총을 최대한 빨리 열어서 해임시킨 후에 다시는 미주그룹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겠다.”
“정 그러시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도 해임당할 때까지 현재 이사 자리에서 충실히 최선을 다해서 회삿일을 돌보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당장 나가.”
임누리는 인사도 없이 곧장 뒤돌아 회장실을 나섰다.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미 사건을 맡긴 로펌과 전화를 연결했다. 후보 몇 곳 중에서 성범죄 사건을 전문적으로 잘 처리한다는 대형 로펌이었다.
[검토해보셨습니까? 진행 상황은 어떤가요?]
[사실관계가 워낙 명백해서 저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두 합의가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미 저쪽과 합의를 시도해봤지만 아주 완강하게 나오더군요.]
[그랬겠죠. 이지영 그년 아주 독한 년이거든요.]
[우선 상대측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별개 사건인 하숙향에 대한 고소를 취소하고 하숙향에 대한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 제출을 원했습니다. 민사상으로도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습니다.]
[그건 예상했던 바고요. 다른 건요?]
[그리고 선생님에 대해서 처벌을 바라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해주겠답니다. 합의금 명목으로 10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훗. 10억이라고요?]
[비슷한 유형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10억이란 요구는 물론 터무니없습니다. 일단 지르고 보는 액수죠. 하지만 선생님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 정도 기타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일반인 분들보다는 훨씬 많은 합의금을 고려하셔야 할 겁니다.]
돈을 줘 버리면 끝나긴 한다.
하지만 약이 올라서 참을 수가 없었다.
쓰레기 같은 년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눈이 뒤집힐 지경이다. 거기에 10억을 주면 그년이 얼마나 기고만장해서 설칠지 그 꼴은 도저히 못 참겠다.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까?]
[사실은 상대가 다소 특이한 별도 제안을 하긴 했습니다.]
[그게 뭔가요?]
[상대 이지영의 남편이 현재 선생님의 회사에서 근무 중이라도 하던데요.]
[맞습니다.]
[남편에게 압력을 가해서 이지영 측에 대한 모든 재판을 포기하도록 만들면 선생님과 합의하겠답니다.]
가만.
차라리 이건 나쁘지 않은데.
임누리 자신이 직접 이지영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건 없다.
손해는 서지오가 보게 만들고 자신은 그 서지오에게 무언가를 대신 보상해주면 될 게 아닌가.
돈이든 승진이든 뭐든 그건 충분히 가능하다.
어차피 서지오에게는 이미 한 약속이 있다.
서지오가 무죄가 나오면 차장 자리를 주겠다고 했었다.
[선생님께서 남편을 설득하거나 회유해준다면 합의금을 안 받는 것도 생각해보겠답니다.]
[나쁘지 않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능할까요?]
[한 번 해보겠습니다.]
**
위이잉. 위이잉.
[네. 영업 3팀 서지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임누리 상무이사님께서 잠시 뵙기를 요청하십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상무이사님 방으로 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참 일관성 있네.
부하직원 시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필요할 때마다 당장 튀어오라는 이 마인드는 진짜 한결같다.
어쩌겠나. 회사를 계속 다니기로 마음먹었으면 이것도 감내해야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계속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건강에도 좋고. 나도 이제 슬슬 건강을 챙겨야지.
[네. 지금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그 방 앞이다.
최근 회사 내에서는 임누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회장이랑 대판 싸웠다더라. 곧 잘린다더라. 등등.
나도 임누리가 나온 방송을 봤다. 전부 다 본건 아니지만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전부 그 얘기니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다.
호사가들이 편집까지 보기 좋게 해서 여기저기 퍼 나르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똑똑.
“들어와.”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저번보다 훨씬 화가 잔뜩 나 있는 음성이었다.
덜컥.
“부르셨습니까?”
“그래. 서 과장. 거기 앉아.”
“네.”
임누리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뭔가 잘 안 풀리는구나. 이지영 측과의 협상이 순탄치 않음이 분명했다.
“솔직히 얘기하지. 당신 전 마누라 말이야. 정말 지독한 여자더구만. 나한테 합의금으로 10억이나 달라더군.”
10억이라.
합의금 액수로 10억은 듣도 보도 못했다.
임누리가 임자를 제대로 만났어. 참 재미있게 잘 굴러가네.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인간이다. 근황도 전혀 궁금하지 않다.
난 어쩌면 굉장히 쿨한 남자였을지도 모르겠네.
전처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누굴 만나는지 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놀랍게도 단 1도 관심이 안 생긴다.
당연히 불쾌한 게 정상인 이 자리도 굳이 피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안 든다.
“···.”
내가 말이 없자 날 한 번 쳐다본다.
왜? 같이 이지영 흉이라도 봐주길 원했던 건가?
“오늘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당신 전처 그년 때문이야.”
“그 문제라면 저랑 얘기하실 이유가 없는데요. 저랑 그 여자는 이미 끝난 사이입니다. 제가 상무님과 이지영 사이에 관여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날 위해서 대신해 줄 일이 있어.”
나한테 원하는 건 그거겠지?
임누리라는 녀석이 현 상황에서 나한테 원하는 게 있다면 오로지 그것뿐이다.
임누리 입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구역질 나는 제안이 튀어나올지 굳이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그게 뭔가요?”
“그년과 이혼소송 중이지?”
“네. 그렇습니다.”
“져줬으면 해. 물론 그 보상은 내가 따로 하지.”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서 과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조만간 새로운 전략기획팀을 하나 만들 작정이야. 내가 예전부터 구상하던 거지. 미주그룹 전체를 아우를 컨트롤 타워가 필요해. 당신이 거길 맡아줬으면 좋겠어. 독립부서라 권한도 막강할 거야. 예산도 다른 팀에 비해서 대폭 늘려주지.”
팀장 자리라. 나쁘지 않네.
“그게 다인가요?”
“물론 아니야. 금전적으로도 모두 보상하지. 그년한테 받을 수 있었던 위자료며 합의금 전부다. 어때?”
글쎄.
내 입장에서 보면 이지영한테 받을 돈을 임누리한테 받는 것뿐이다.
임누리는 이지영한테 줄 돈을 나한테 주는 셈이고.
그런데 말이야.
임누리 니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돼.
이지영한테 농락당하고 약이 올라 죽겠지?
그래서 직접 이지영한테 합의금을 가져다 바치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 이거 아니냐.
결국 이지영한테 머리는 나보고 대신 숙이라 명령하는 거잖아.
전략기획팀장인지 뭔지 감투 자리 하나 던져주고 말이다.
이지영한테 지기 싫은 건 너 하나가 아니거든.
내가 이지영에게 관심은 전혀 없지만 져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야.
난 어떻게든 그것 때문에 잃어버렸던 모든 걸 되찾고 싶다고.
‘너’한테서가 아니라 그 ‘이지영’이라는 인간에게서 말이다.
“상무님.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임태수 회장에게 점수는 많이 따뒀다. 단순히 스포츠카 거래 때문인지는 몰라도 회장은 이상하게 나한테 호의적이다.
그리고 난 이대로라면 앞으로 계속 220퍼센트의 캐시백이 들어온다.
왜 내가 굳이 널 위해서 그래야 하지?
“지금 뭐라고 했어?”
“이 자리에서 답해드리죠. 싫습니다.”
싫다고.
내가 싫다는데 니가 뭘 어쩔 거냐?
회사에서 목숨도 간당간당한 주제에 말이야.
“어이. 서지오.”
“저는 이지영에게 고개를 숙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야.”
“죄는 상무님이랑 이지영이 지었지. 제가 지은 건 아닙니다. 저는 이지영한테 죗값을 받고. 이지영은 상무님한테 죗값을 받는 게 순리에 맞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
“싫습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너 거기 안 서.”
“다음에는 저한테 미리 시간이 되는지 꼭 확인한 후에 만나자고 요청하세요.”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임누리를 뒤로 하고 상무이사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