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의 제안과 B형 남자 >
“제 의뢰인께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진술은 거부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지영 씨.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네···.”
“진술거부권을 사용하시겠단 말인가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시네요. 이 동영상이 사실이라면 피의자인 이지영 씨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시각까지는 얼굴이 멀쩡했다는 뜻입니다.”
“···.”
“사람이 아무리 회복력이 빨라도 고작 20시간도 안 돼서 상처가 완전히 나을 수는 없잖아요. 이봐요. 이지영 씨. 제 말 듣고 있습니까?”
“그 정도는 대답하셔도 됩니다.”
“네. 듣고 있어요.”
“동영상에서 보듯이 이지영 씨는 사건 당일 자정이 아니라 그 다음 날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피의자가 주장하는 사건 발생 시간과는 완전히 다르죠. 그 말은 피의자가 지금까지 거짓말로 일관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니에요. 거짓말한 적 없어요.”
“명백한 증거가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데도 말입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이지영 씨. 입 다무세요.”
이우철 검사가 옆에 앉아 있던 김승재 변호사를 노려본다.
“피의자랑 얘기 중입니다. 그렇게 말 하나하나마다 끼어들면 수사를 진행할 수가 없어요.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검사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또 뭡니까?”
“제 의뢰인을 진지하게 설득할 시간을 주십시오. 이번에는 화장실에 간다느니 아프다느니 그런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우철 검사가 팔짱을 끼고 김승재와 이지영을 번갈아 노려본다.
“서지오 씨. 잠깐 조사를 중단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20분 내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 이상은 못 기다립니다. 이지영 씨의 긍정적인 태도 변화를 기대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검사님.”
김승재 변호사는 이지영을 일단 데리고 조사실 밖으로 나왔다.
검찰청 내부가 아니라 아예 건물 밖으로 잠시 벗어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따라오세요. 여기가 좋겠네요. 주위에 사람 하나 없고. 이지영 씨. 잘 들으세요. 내가 지금 당신 때문에 얼마나 피곤하게 됐는지 압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최소한 변호사를 믿고 처음부터 사실대로 털어놨어야죠. 뭐 하는 짓입니까.”
“그 여우 같은 변호사년이 갑자기 호텔 CCTV를 들고 올지 어떻게 알았겠냐고요.”
“더 숨기는 게 있습니까? 지금 말하세요. 만약에 또 내가 모르는 뭔가 튀어나온다면 당장 때려치울 겁니다.”
“없어요. 재판 이길 수 있나요?”
“훗. 후흐흐흐.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댁이 판사면 저걸 보고 아 그래 피고인 말대로 남편한테 맞았겠지 그러면서 얼씨구나 무죄 판결해주겠습니까.”
“지금 나한테 짜증 내는 거예요?”
“저랑 싸울 때가 아닙니다. 우리한테 남은 길은 없어요. 합의를 권해드립니다. 아주 강력하게요. 무조건 합의하세요.”
“합의는 없다고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김승재 변호사는 답답했다.
무고죄 저지른 사람들을 상대해봤지만 하나같이 합의부터 알아보자고 조른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정반대로 합의는 절대 안 된다면서 버티고 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상대가 하필 이혼소송 중인 남편이니 그럴 수도 있긴 하지. 이혼 중에는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으니까.
제3자가 보기에는 서로 원만하게 합의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대질신문에서 우리가 검사한테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진술거부권 행사밖에 없어요. 지금 상태로는 검사가 우리 말을 한마디도 안 믿을 겁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더 꼬이기만 해요.”
“그럼 어쩌라고요?”
“제가 지금 당장 상대 변호사를 따로 만나보겠습니다. 최소한 합의 조건이라도 알아야죠. 들어보고 적당하다 싶으면 못 이기는 척 그냥 하세요. 그게 살길입니다.”
“정말 방법이 없어요? 도저히?”
“시간이 아까우니 제가 들어가서 상대 변호사를 만나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김승재 변호사는 이지영을 검찰청 밖에 잠시 남겨두고 조사실로 되돌아왔다.
“왜 혼자 오셨습니까? 이지영 씨는요?”
“잠시 쉬고 계십니다. 아까 말씀하신 20분은 안 됐잖아요. 다름이 아니라 김 변호사님. 잠시 저랑 얘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무슨 용건인지는 검사나 저쪽 변호사도 뻔히 짐작할 만하다. 이우철 검사도 팔짱만 낀 채 기다리고 있다. 김지영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알겠습니다.”
이우철 검사 방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물었다.
시간은 별로 없다.
“서지오 씨가 원하는 합의 조건을 말해주십시오.”
변호사로서 이 순간이 제일 기분 더럽다.
상대 변호사의 희미한 미소.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는 저 우월감이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꼬워서 미칠 것 같다.
“완전한 항복.”
“네?”
“민사는 청구 인낙, 형사는 범죄사실 일체에 대한 자백.”
“잠깐만요.”
“그리고 형사합의금으로는 5천만 원, 재산 분할은 당연히 포기, 이혼위자료 명목으로 역시 5천만 원.”
“그건 너무.”
“화분을 집어 던진 장모 하숙향과의 합의금은 별도로 1천만 원입니다.”
“아니 이보세요.”
김지영 변호사는 할 말을 모두 마치고 한 가지를 덧붙였다.
“여기에서 10원도 못 깎아 드립니다.”
**
김지영 변호사는 2분도 안 돼서 돌아왔다.
“뭐라던가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잠시 후에 이지영과 상대 변호사도 들어온다.
계속된 대질신문 내내 이지영은 진술을 거부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이우철 검사도 지쳤는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기 질문만 던지고 조서 작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검찰청을 나오면서 물어봤다.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말씀드렸던 합의금 조건을 전했습니다. 이지영과 얘기해보겠다고만 하더군요.”
“이지영이 합의에 응할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며칠 내로 연락이 올 수도 있고 영원히 안 올 수도 있죠.”
“오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선생님께서 수고 많으셨죠. 푹 쉬십시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숨 막히는 하루였다.
그날 밤까지도 이지영 측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음 날은 강남역에서 대학 동아리 동기들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안 나갈까 하다가 그래도 오랜만에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강남역으로 향했다.
강남역에서 논현동 쪽 강남대로 주변의 번화가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발 디딜 틈 없다.
여긴 전에 안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강남역은 피하고 싶었는데 오늘 약속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마다 사는 곳 일하는 곳이 제각각이라 강남역이 제일 모이기 무난했다.
말이 동아리지 그냥 강의 중간 비는 타이밍에 들러서 시간이나 때우려고 가입한 피난처였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어떤 말처럼 막상 동아리에 와보니 인생을 낭비한다는 느낌만 들어서 관두려고 했다.
그러던 중 제일 먼저 친하게 된 녀석이 나민수였다.
겉으로 보기엔 전형적인 아싸 공대생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굉장한 핵인싸였다.
동아리도 3개나 가입해서 여기저기 쏘다니곤 하던 마당발이었다.
지금 우리 모임도 이 녀석이 아니었더라면 먹고살기 바빠서 진작 흐지부지됐을 것이다.
오늘 장소만 해도 나민수가 예약해 둔 술집이었다.
“지오야. 여기.”
고준호와 조아람이 자연스럽게 빠져서 그런지 사람이 꽤 준 느낌이다.
한창 많이 올 때는 큰 테이블을 가득 채웠는데 지금은 얼핏 보니 대여섯 명이 전부네.
“넌 저번에도 늦더니 오늘 또 늦냐? 고시원이 근처라면서. 학교에서 가까운 데 사는 놈이 항상 지각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아.”
“회사에서 좀 늦게 나왔어.”
“앉아. 여기요. 잔 하나 더 주세요.”
암묵적으로 고준호와 조아람 얘기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주제는 똑같았다. 아파트 가격, 연예인, 정치, 시사, 스포츠 등등. 언제부턴가 건강 얘기도 슬슬 흘러나왔다. 누가 무슨 수술을 받았다더라. 뭐 그런 소식들.
“야. 너희들 그거 들었냐? 민혁이. 걔 편도암이래.”
“진짜?”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서 생명에는 지장 없나 봐. 요즘은 항암치료가 잘 되어 있으니까.”
“다행이네.”
“술 작작 마시고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시간은 있잖아. 의지가 없어서 그렇지.”
“골프나 배울까?”
“그거 은근히 돈 많이 들어. 골프는 운동이 안 되잖아. 테니스가 괜찮을 것 같던데.”
“지오 너는 운동 안 하냐?”
“딱히 하는 거 없어. 시간 나면 밤에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정도지.”
다들 건강 걱정을 하긴 하네. 마흔 넘으면 피부로 느껴진다던데.
테이블이 좁은 편이었다.
한 명이 화장실 가려면 통로까지 모두 한번은 일어나야 한다.
“왜 이런데 골랐냐? 엄청 불편하네.”
“이 시간에 강남역 술집 예약한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배부른 소리 하네.”
오늘 저녁은 어수선하다.
앉은 자리가 계속 바뀌고 내 옆에는 나민수가 앉았다가 다른 녀석이 앉았다가 비었다가 멋대로였다.
“너희들 김현우 알지?”
“걔 완전 모태 솔로잖아. 여자만 보면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녀석인데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몰라.”
“걔 이혼했어. 그것도 결혼한 지 1주일 만에.”
나민수 이놈은 도대체 어떻게 이리도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건지.
“훗흐흐흐.” “돌았다. 돌았어.” “그 정도면 이혼이 아니라 결혼 물린 거 아니냐.”
또 이혼이구나.
우리나라 결혼한 커플 셋 중 하나는 이혼한다는 통계가 사실이었네.
“현우가 왜 이혼했는지는 얘기 안 해주던데 내가 보기에는 현우가 너무 심각한 모태솔로라 아무래도 밤일 쪽으로 문제가 있었나 봐.”
“그럼 모쏠 탈출하자마자 돌씽된 거잖아.”
“모쏠 김돌씽 선생님이시네. 핫하하하.”
너희들은 남의 이혼이니까 그렇게 쉽게 웃으면서 농담하지. 현우 이야기가 사실이더라도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걔 엄청 착하고 좋은 녀석이었는데.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도 안 나왔구나.
나민수 이 자식은 그걸 굳이 여기서 사람들한테 소문내야 했나?
“현우 그만 놀려. 우리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겠지.”
“같은 이혼남이라고 편드냐?”
“편드는 게 아니라 딱하잖아.”
나민수 이 녀석은 자기도 이혼했으면서.
“하긴 나도 이혼해놓고 참. 흐흐흐.”
오늘은 민수가 술을 좀 많이 마셨네.
여러 명 마시는 술자리에서는 테이블 모두 한 주제로 얘기할 때도 있지만 둘 셋씩 나뉘어서 각개전투 펼칠 때도 있다.
다들 옆 사람과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나민수가 술을 따라준다.
“잔 비었네. 마셔. 이혼은 어떻게 되고 있냐? 잘 돼가?”
“모르겠어. 나야 변호사한테 맡기고 회사나 열심히 다녀야지.”
“빨리 마무리 짓고 새 출발 해야지.”
“그래야지.”
“건배.”
“그래. 건배.”
소주가 목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이번 잔은 유난히 쓰네.
“임누리 말이야.”
“훗흐흐흐. 니가 그 얘기 왜 안 꺼내나 했다.”
“요즘 난리잖아. 그러고 보면 이지영 그 여자 덕분에 너도 그렇고 임누리도 그렇고 엄청 유명해진 셈이네.”
“나는 빼. 동탄의 그녀 편에 난 나오지도 않았는데 뭘. 사람들도 이지영 전남편이라고만 알지 내 이름은 몰라. 임누리야 이제 워낙 유명해졌지만.”
“늘 궁금했는데 결혼 생활은 행복했냐?”
“훗흐흐흐.”
“왜 웃어?”
“알아서 뭐하게?”
“하긴 지금 그게 뭐 중요하겠냐. 임누리 이번에 아주 제대로 당했나 봐. 훗후흐흐흐. 합의금 10억이라니. 10억이 동네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합의금 10억이면 터무니없는 액수긴 하지.
그···.
···런데.
잠깐만.
이지영이 임누리한테 합의금 10억 달랬다고 내가 얘기했던가?
인터넷이나 언론에서 임누리와 이지영의 합의금 액수가 기사로 나온 적은 없다.
비현실적인 10억이라는 숫자가 외부로 유출되면 이지영 쪽에서는 역풍을 맞을 우려도 있어서 공개할 리가 없을 테고.
임누리가 먼저 공개했나? 그럴 리도 없는데.
공개해버리면 왜 떠벌이냐면서 이지영이 더 합의 안 해주지.
나민수.
너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순간.
방금 마셨던 소주가 다시 식도를 거슬러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나민수에게 무언가를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너 혈액형이 뭐니?”
“갑자기 웬 혈액형. 나 B형이잖아. B형 남자. 노래도 있지 않았냐? 누가 불렀더라. 여가수였는데.”
과거 어느 날이 떠오른다.
그날 난 소아과 병원에서 그렇게 물었었다.
‘B형이라고요? 저랑 제 처 둘 다 O형인데 자녀가 B형이 가능합니까?’
< 갑의 제안과 B형 남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