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획적이었던 접근 >
“민수야.”
“응?”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핸드폰 잠깐 줘봐.”
“왜? 사진 찍어주려고? 이거 최신폰이라 사진 죽여주게 나오긴 해.”
나민수는 순순히 핸드폰을 건넸다.
소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옆에 있던 다른 놈이랑 대화를 나눈다.
여전히 아까 놀리던 김현우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우 그 새끼. 예전에 우리 같이 MT 갔을 때도 비실비실했잖아. 술도 전혀 못 마시고. 내 예상에는 남자 구실 못한다고 와이프한테 쫓겨난 게 분명해.”
“흐흐흐.” “에이 설마?” “민수 저놈 저거 또 음모론 펼친다.”
핸드폰을 터치해봤다.
주소록이나 톡 모두 이지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저번 고준호가 그랬던 것처럼 이지영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지영의 번호를 입력해봤다.
역시 최근 통화목록이나 주소록 등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괜한 내 착각이었나?
그렇겠지.
민수가 그럴 리가 없어.
발이 넓고 남의 사생활 캐기를 워낙 좋아하는 녀석이니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을 거야.
합의금이 10억이라는 것도 이지영이나 임누리 측근을 통해서 전해 들었겠지. 아니면 변호사 쪽 루트로 소식을 접했을 수도 있다.
의심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생사람 잡을 뻔했잖아.
“뭘 그렇게 남의 휴대폰을 뒤지냐?”
“나도 이걸로 폰 바꿀까 싶어서. 괜찮네. 무겁지도 않고. 이거 말고 다른 색은 없니?”
“있지. 요즘 길거리에 보면 이 폰 많이 들고 다니잖아. 듀얼유심도 돼서 얼마나 편한데.”
듀얼유심?
맞다. 저번에 이 녀석이 그랬지.
핸드폰 하나로 번호 2개를 쓴다고.
개인용이랑 업무용 2개로 나눠서 전화를 받는다고 했다.
“듀얼유심이면 지금은 업무용 폰으로 설정해 놨겠네.”
“업무용 개인용 둘 다 통화대기 가능하긴 한데. 개인 톡 올 곳이 워낙 많아서 지금은 업무용 번호로만 받도록 설정해 놨어.”
“그럼 개인용 번호는 지금 이 상태로는 검색이 안 되겠네?”
“응. 그런데 왜?”
나민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민수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개인용 번호로 재부팅 해봐. 내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왜 그러냐?”
무언가 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나민수의 평소 장난기 어린 그 표정이 아니다.
“그럼 곧바로 물을게. 이지영 두 딸의 아빠가 너냐?”
둘 셋씩 짝을 지어 잡담을 주고받던 영화 동아리 동창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본다.
“쟤들 왜 저래?” “지오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지영이랑 바람난 건 고준호랑 조아람이잖아.” “지오가 취했나 보다.”
나민수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다.
“저번에 고준호랑 조아람이 싸운 날 기억나냐? 고준호가 나한테 들키고 나서 내가 너희들 전부한테 물었지. 이지영이랑 붙어먹은 놈 더 있으면 사실대로 말하라고. 그때 넌 핸드폰 나한테 들이밀면서 검사해보라고 했잖아.”
“···.”
“너 그때도 지금처럼 개인용이 아니라 업무용 번호로 설정해둔 상태였지? 그러니까 안 들킬 거 알고 자신 있게 오히려 나한테 핸드폰 뒤져보라고 내민 거잖아. 말해봐.”
별로 크지 않은 테이블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두 나민수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핫하하하. 야 지오야. 너무 오버다. 너희들 설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그럼 개인용 번호로 바꿔봐.”
“거긴 좀 민감한 자료가 많아서 곤란해.”
내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나민수가 곧바로 뺏어 든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정 그렇게 보고 싶으면 중요한 자료 삭제하고 보여주면 되잖아.”
“급하게 이지영 번호라도 지우려고?”
“너 의처증 있었냐? 그게 이제는 친구도 의심하는 단계까지 갔니?”
“야 나민수. 지오한테 핸드폰 줘봐.” “그래 우리도 구경 좀 하자. 켕기는 거 있냐?” “내 폰도 듀얼유심이지만 번호 2개 통화목록 같이 떠. 민수 너 폰에다 무슨 이상한 짓을 해 놓은 거냐. 절대 들켜서는 안 될 거라도 있어?”
설마? 아니겠지.
민수야. 내가 착각한 거라고 제발 그렇게 믿게 해줘.
우린 동아리 내에서도 제일 친했잖아. 얘기도 잘 통하고. 이혼하겠다고 했을 때 힘내라면서 격려한 것도 너였잖아.
“나민수. 핸드폰 이리 내놔.”
“훗. 후후후. 흐흐흐. 흐히히히.”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다.
“내가 아까 이지영이랑 결혼 생활이 행복했냐고 물었었지? 왜 물어본 줄 아냐? 나는 같이 살 때 행복했거든.”
뻐억.
나민수의 턱이 완전히 돌아갔다.
순식간에 주변 동창들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다.
“이거 놔.”
“지오야. 건드릴 가치도 없는 놈이야. 괜히 복잡한 일에 얽히지 마.” “맞아. 이 개새끼야. 꺼져.” “더러운 개시발놈이었네.”
나민수가 얼굴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내가 하나 알려줄까? 너 이지영을 카페에서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었지? 그 카페 말인데. 내가 지영이를 그리로 보냈어. 널 꼬시라고 말이야. 히히히힛.”
“···.”
“어쩌냐. 아직 그땐 내가 이혼하기 전이라. 너희들도 알다시피 수진이 걔랑 나랑 CC였잖아. 이혼 죽어도 못 해주겠다면서 버티는 데다 수진이가 종일 내 뒤만 캐고 다니는 통에 떼놓느라고 돈 많이 썼지. 돈 앞에서는 수진이 걔도 알아서 놔주더라.”
“···.”
“지영이가 자기랑 결혼해줄 거 아니면 남자 하나 알아봐 달라고 얼마나 귀찮게 조르는지. 너 정도면 딱 좋겠다 싶었어. 몇 년 적당히 살아주다가 위자료 챙겨서 털고 나오기에는 안성맞춤이잖아. 그때 주변에 남은 총각 중에서는 니가 돈이 제일 많았거든.”
이제야 왜 그리도 이지영이 스몰웨딩을 하자고 졸랐는지 이해가 되네. 그렇게나 화려한 걸 좋아하는 인간이 말이다.
신부 쪽에서는 오로지 장인 장모만 참석했다.
신부 친구나 친척이 한 명도 안 왔을 때 뭔가 이상했지만 그땐 그냥 넘어갔었다.
퍽.
동창 녀석 하나가 나민수를 걷어찼다.
“그만 지껄이고 가라. 나한테도 처맞고 싶냐?”
“딱 하나만 물어보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 너는 이지영이 다른 남자랑 같이 자는 게 기분 더럽지도 않았냐?”
“그게 좀 설명하기 복잡한데 말이야. 난 오히려 흥분되던데. 어차피 결국에는 나한테 돌아올 여자고. 내 딸까지 둘씩이나 낳았잖아. 나도 실은 여자가 지영이만 있는 것도 아니야. 흐흐흐.”
“지오야. 상대하지 마. 미친 새끼야. 내 눈에 한 번만 더 뛰면 뒤질 줄 알아.”
“지영이는 돈 많은 남자라면 환장해. 그래서 나를 선택한 거고. 너희들한테 내가 한 번도 얘기 안 했지? 흐흐흐흐. 나 사실 코인으로 너희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할 돈을 벌었어. 이지영 걔가 돈 냄새는 귀신같이 알아채더라. 수진이한테 재산 분할 안 당하려고 얼마나 힘들게 숨겼는지 말도 마라.”
“꺼져. 더러운 시발놈아.”
“그래. 갈게. 지오는 너희가 잘 위로해줘라. 그래도 아쉽네. 가끔 옛친구들이랑 이렇게 술 마시면서 평범하게 사는 얘기 나누고. 참 그게 좋았는데.”
“퉤.”
동창 녀석 하나가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한 대 맞은 건 없던 일로 할게. 안심해라.”
술집 주인이 아까부터 주변을 서성거린다.
싸움이 크게 번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싸우시는 거 아니죠? 아까 우당탕 소리 들리던데요.”
“사장님. 별일 아니었으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저만 가면 곧 조용해질 겁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알려줄게. 이지영. 그거 유명한 호스티스 출신이야. 흐흐흐.”
나민수는 미소를 지으면서 술집을 떠났다.
“지오야. 우린 정말 몰랐어.”
“나민수가 그런 악마 새끼일 줄이야. 와아아~.”
“진짜 세상에 믿을 놈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일 정의로운 척 있는 대로 다 하더니.”
내 인생은 나민수와 이지영이란 두 년놈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거였구나.
알면 알수록 이지영이란 인간이 섬찟하다.
도대체 어떤 정신 상태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제일 먼저 복수가 떠오른다. 일단 절대 오늘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김지영 변호사에게 상담해보고 어떻게 할지 정하자.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이지영이라는 쓰레기 더미에서 벗어난 건 어찌 보면 행운이다. 나민수 저 개새끼도 결코 결말이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난 이지영에게 시달리면서 아무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죽어가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마포대교에서 죽을 뻔하고 새로 시작한 삶.
그 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매달 220퍼센트의 캐시백이 들어온다.
그래.
이지영에게서는 최대한 멀어지는 거야.
이혼도 빨리 마무리 짓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
우선 적어도 김지영 변호사에게는 상세한 전후 사정을 알리는 게 좋겠어.
**
퇴근 시간이 지난 늦은 시간이었지만 김지영 변호사는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님. 접니다. 늦은 시간에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마침 아직 퇴근 전이에요.]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민수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모두 말했다.
김지영 변호사는 한동안 침묵만 지켰다.
[선생님.]
[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것들은 분명 천벌을 받을 겁니다. 변호사 입에서 천벌이란 소리가 나오니 좀 이상하시죠?]
[아니요.]
[제가 감히 충고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말씀하세요.]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렇습니다. 상대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사가 풀렸거나 썩어빠진 인간뿐입니다. 제가 선생님과 함께 일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세요.]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테니 이혼 관련된 일은 저에게 전부 맡기시고 선생님은 이 재판이 끝나면 이지영과 나민수에 대한 모든 걸 잊으십시오.]
[네?]
뜻밖의 충고였다.
하지만 깊이 와닿는다.
[제가 변호사 경력이 그렇게 긴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를 몇 번 봤습니다. 복수나 분노에 너무 깊이 빠져버려서 피해자분이 오히려 스스로 망가지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그렇게 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지영 변호사.
정말 당신은 최고의 변호사입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재판 전략을 바꾸겠습니다.]
[어떻게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에 집착하면 재판은 길어집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복수심이 점점 마음속에서 자라날지도 몰라요. 최대한 신속하게 이 재판 끝내겠습니다.]
[변호사님께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너무 고마웠다.
어떻게든 성의 표시를 해야겠어.
정말 좋은 변호사를 만났네.
[식사 대접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시간은 아무 때라도 좋습니다. 제발 거절하지 마시고 제 호의를 들어주십시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어떤 사심이 있어서는 절대 아닙니다.]
[핫하하하. 압니다.]
언제 들어도 웃음소리는 참 남자답게 호탕하단 말이야. 얼굴과 웃음소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혹시 오늘 저녁 시간 어떠세요? 제가 만나 뵙고 현재 재판 진행 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도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사실 저녁을 못 먹었어요. 갑자기 배가 엄청 고프네요. 뭐 좋아하세요? 드시고 싶은 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저는 가리는 게 없습니다.]
[뭐가 좋을까요? 음~. 순대국밥 어떠세요?]
응?
순대국밥?
이분 변호사라면서 왜 이리 소탈해.
순대국밥은 대접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비싼 곳에서 칼질도 괜찮은데.
[저는 상관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순대국밥 집은 너무 번잡하지 않을까요? 더 고급스러운 곳으로 고르셔도 됩니다. 제가 최근에 주머니 사정이 괜찮아졌거든요.]
[아닙니다. 저 순대국밥 아주 좋아합니다. 같이 드시죠.]
[정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저희 로펌 근처에 아주 유명한 맛집이 있습니다. 거기서 뵙죠.]
[기대되네요. 당장 그리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저도 퇴근 준비하다 보면 거의 도착하실 때쯤 나갈 수 있겠네요.]
김지영 변호사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보다가 우연히 뭔가를 발견했다.
나도 참 웃기는 놈이네.
그 긴박한 와중에 대체 언제.
나민수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핸드폰 녹음 어플 시작 버튼을 눌러뒀었나 보다.
핸드폰은 그때 술집 테이블 위에 계속 놓여 있었고.
다시 재생해봤다.
나민수가 지껄였던 말들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었다.
< 계획적이었던 접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