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49화 (49/65)

< 불청객 >

[상무님. 어떻게 됐습니까?]

[이지영의 남편 서지오가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 사람을 만나 설득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황이 저희들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신설할 전략기획팀장 자리를 준다고 해도 마다하더군요. 겨우 말단 과장 주제에 건방지기가 아주. 물론 이지영에 대한 금전적인 피해는 따로 보상하겠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을 들어 처먹을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흐으음~. 그렇단 말입니까.]

[다른 방도를 찾아주세요.]

[상무님. 정 그러시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10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합의금을 조율해서 줘버리시죠.]

[그건 제 자존심이 절대 허락 못 합니다.]

[상무님께서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시네요. 이런 사건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무님에게 불리해집니다. 여론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이것이 이혼이다’에서 또 추가 방송이 나간다면 더 거세질 겁니다.]

[그걸 해결하라고 당신들 로펌을 고용한 거 아닙니까. 실망스럽군요. 이런 종류 사건을 잘 해결한다고 해서 믿고 맡긴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사실관계가 워낙 명확해서 저희가 손 쓸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현재로서 할 수 있는 거라곤 합의금 협상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이 사건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임누리 상무는 답답했다.

기껏 고르고 골라서 맡긴 로펌이 남의 집에 불구경하듯 이렇게 한심한 소리나 지껄여대고 있으니.

단지 합의만 할 거였다면 굳이 너희들을 왜 골랐겠냐. 유죄도 무죄로 만들어 준다면서 광고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난 모르겠으니 합의나 해라?

[도대체 착수금을 받고 나서 한 일이 뭡니까? 그년 쪽이랑 제대로 얘기는 해 본 겁니까?]

[상대 로펌과 전화 통화도 여러 번 했고 만남도 2차례 가졌습니다. 상대방 쪽 의지는 초지일관 분명했습니다. 10억 원에서 한 푼도 깎아 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놈의 10억 타령 좀 집어치워요. 고작 이런 사건으로 합의금 10억이라니. 누굴 바보로 아는 겁니까?]

[물론 10억 달라는 대로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시간이 상대방 편이라는 점입니다. 다음 주가 되면 아마도 제 생각에···.]

[생각에 뭐요?]

[10억보다 더 많은 액수를 요구할 겁니다. 상무님과 만나는 과정에서 상해를 입었다며 상해 진단서까지 첨부해서 들고나올 것으로 예상해 봅니다. 이런 사건은 보통 그런 식으로 흘러가니까요.]

[뭐라고요?]

[그렇게 되면 일이 더 커집니다. 치상 혐의까지 인정되면 그땐 합의가 없이는 실형을 선고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임누리는 실형이라는 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봐. 그런 상황을 막으라고 돈 주고 당신들 산 거야. 정신 차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저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가지고는 부족해. 죽을 힘을 다해서 고객을 위기에서 구해내야 하는 거잖아. 그게 너희 변호사가 하는 일이야. 아닌가? 내 말이 틀려?]

[점점 불쾌해지네요.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얘기를 나눠보니 아주 곤란한 분이시군요. 반말도 더는 못 듣겠습니다. 임누리 씨. 댁과 저희는 상하 관계가 아닙니다. 계약으로 맺어진 동등한 관계라고요.]

[뭐야?]

[부하직원 대하듯 반말 내뱉으면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안 그래도 이 사건은 국민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사안이라 저희도 변호하기에 부담이 컸습니다. 착수금은 돌려드릴 테니 저희는 이 사건에서 손 떼겠습니다. 다른 로펌을 찾으세요.]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라니. 말조심해. 이만 끊어. 다시는 우리 로펌에 연락할 생각 마.]

뚜뚜뚜뚜.

순간 멍해진다. 어이가 없었다.

잠시 후에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일이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

임누리 자신도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분위기를 살피고자 인터넷 여론을 직접 찾아봤다.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과거 ‘가성비’ 발언으로 욕을 먹을 때는 그래도 남자답다느니, 잘했다느니, 시원시원하다느니.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딴판이다.

한목소리로 천하의 개새끼라면서 욕을 한다.

특히 여성 단체 쪽을 중심으로 미주그룹 불매 운동까지 거세지고 있었다. 이지영 측은 벌써 모금 운동도 시작했다. 여성계 쪽에서 유명하다는 인사들은 다 그쪽으로 달라붙었다.

새 별명까지 붙었다.

가성비에서 이제는 임레기, 임창놈, 임협박 등등.

더 화가 치밀어오르는 건 어머니에 대한 과거까지 들먹이고 있다는 점이다.

유명 정치인이었던 친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추잡한 루머부터, 사생아는 역시 어쩔 수가 없다는 인신공격까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심 끝에 어떤 길이 떠오른다.

“응. 나야. 서지오 쪽 변호사가 누군지 알아내. 누가 어려운 줄 몰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누군지 찾아. 어느 로펌이고 어떤 변호사인지. 찾으면 곧바로 연락해.”

몇 시간 지나서 연락이 왔다.

[이름이 김지영?]

[네. 그렇습니다. 흔한 이름이라서 이름만 가지고는 어느 로펌 소속인지 찾아내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니까 끊어.]

김지영이라···.

하필 이름이 지영이라니.

임누리 상무는 벌써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뭐 어쨌든 이지영만 잡으면 되니까 이름이야 상관없지.

다른 몇 군데 로펌과 접촉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합의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저희가 맡기에는 부적절한 사안이라서 죄송합니다.’

‘현재 저희 로펌 변호사 업무가 너무 과중해서 맡겠다는 분들이 안 계시네요.’

김지영 변호사라면 이미 이지영을 겪어봤으니 한결 쉽겠지.

전화를 걸까 하다가 관뒀다.

다른 곳과 비슷한 대답을 또 들을 게 뻔하다.

이런 경우는 직접 찾아가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이미 퇴근했을 시간이지만 변호사들은 밤낮없이 일한다고 들었다.

임누리 상무는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곧바로 김지영 변호사의 로펌을 찾아갔다.

“김지영 변호사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요.”

“예약하고 오셨습니까? 늦은 시간인데요. 잠시만요. 지금 계신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 네 변호사님. 아직 계셨네요.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뵙고 싶다고 하시네요. 네. 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임누리입니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주춤한다.

일개 안내 데스크 여직원까지 듣고 바로 알 정도라니.

“변호사님. 임누리 선생님이시랍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쁘신 데다 곧 퇴근하신다네요.”

“그래요? 곧 퇴근하신다니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네.”

데스크 직원이 난처한 표정이지만 알게 뭔가. 직원이 문자를 어딘가로 바삐 보낸다.

잠시 후에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임누리 씨 되십니까?”

너무나 흔해 빠진 이름 김지영.

공부만 열심히 해서 두꺼운 안경을 쓰고 시집도 못 간 늙은 노처녀나 펑퍼짐한 아줌마겠거니 예상했었다.

임누리는 자신도 모르게 로펌 복도를 걸어오는 김지영 변호사를 얼굴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치마 정장이 아주 잘 어울리는 몸매네.

무엇보다 단순히 예쁜 게 아닌 잘생김이 묻어나는 시원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경험상 저렇게 엄숙해 표정의 여자일수록 단둘이 있으면 더 적극적인 법이지.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꼭 묶은 포니테일이 마치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난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여성.

직업은 변호사고 불의에 절대 타협하지 않음.

직장에서 일할 때는 그에 걸맞게 단정히.

외모로 나를 평가하는 건 사절하겠음.

제법 꼬실만한 재미가 느껴지는 여자였다.

지영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 중에서 우연히도 미인을 연달아 둘씩이나 만나다니 참 재밌는 인연이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만나지 않겠다고요. 그만 나가주십시오.”

“여기서 큰소리가 나면 그쪽이 곤란하지 않겠어요? 퇴근하기 전까지 잠시만 시간을 내주면 서로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그것보다는 선생님께서 들어오신 문 그대로 나가주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여긴 미주그룹 사옥이 아니다.

자신의 말에 납작 엎드리는 직원들을 대할 때랑은 분명히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의뢰를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절 도와주십시오.”

“···.”

“더러운 함정에 빠졌습니다. 누구 때문인지는 아시죠?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아닙니까? 개인적으로도 친해지고 싶습니다. 저를 변호해줄 이유는 충분하신 것 같은데요.”

“저는 선생님과 친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정 안 나가시겠다면 경비를 부르겠습니다. 아니면 여기 계속 계시던가요.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그럼 같이 나가시죠. 걸으면서 말씀 나눌까요?”

“선약이 있습니다. 그만 귀찮게 하고 나가주시죠. 소문대로 굉장히 무례하시네요.”

“무례니 뭐니 전 그런 말은 신경 안 씁니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님께서 무례하다니까 굉장히 서운한데요.”

“경비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절 이렇게 창피 주실 겁니까. 잠깐 시간 내서 얘기만 들어주십시오. 의뢰는 안 맡아도 상관없습니다.”

“경비는 언제쯤 도착하죠?” “3분 내로 올라오실 겁니다.” “잘됐네요. 경비가 오면 저는 퇴근할 테니 타임체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임누리는 당황했다.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이렇게 무시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문밖에서 경비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덜컥.

“이분이십니다. 밖으로 모시고 나가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저희와 같이 나가주시겠습니까.”

“어딜 잡아. 손 안 치워.”

“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경비 셋이 임누리를 에워쌌다.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이봐요. 김 변호사님. 이거 놔.”

경비들이 임누리를 안내 데스크 옆으로 밀치자 길이 뚫렸다.

김지영 변호사는 임누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정문으로 걸어나갔다.

**

김지영 변호사의 로펌 근처 순대국밥 맛집이라면 설마 거긴가?

인근 전통 시장 부근에서 30년 넘게 영업하고 있는 유명한 순대국밥 집이 있다.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고 바쁜 시간에는 줄만 1시간서야 들어갈 수 있다는 곳이다.

이 시간까지 영업하는지 모르겠네.

김 변호사님이 거기서 먹자고 했으니까 아마 하겠지.

위이이잉. 위이잉.

[어디세요? 전 지금 막 퇴근했습니다.]

[저는 지하철역입니다. 저도 막 도착했어요.]

[제가 그리로 가죠. 마침 순대국밥 집이 그 근처입니다. 1번 출구 앞에 계세요.]

슬슬 차를 살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니지.

일단 원룸부터 알아보고.

고시원은 공부하면서 잠깐 사는 거라면 몰라도 오래 지내면 사람이 피폐해지겠더라고. 싼 곳을 구하느라 지금 사는 데는 창문도 없다. 화장실도 공용이고.

다음 달에 이진수 화가 그림 경매가 마무리되면 우선 원룸부터 한 번 알아봐야겠어. 방 보러 다니는 건 퇴근한 이후나 주말에 하면 되겠네.

배가 엄청 고프다.

저녁 식사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다.

국밥 생각을 하니 침부터 고이네.

“선생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어!

이상하네.

오늘따라 유난히 예쁜데.

평소랑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뭐가 달라졌나?

아~. 머리 스타일이 변했구나.

볼 때마다 항상 머리를 꼭 묶고 있었는데.

오늘은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헤쳤다.

이마를 가리니까 훨씬 어려 보인다.

옷만 캐주얼하게 입었다면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김지영도 꽤 동안이었구나.

“오시느라 힘드셨죠?”

“아니요. 지하철 타는 게 훨씬 편합니다. 순대국밥 집이 어딥니까?”

“시장순대라는 곳이에요.”

역시.

거기 같더라니. 내 예상이 맞았네. 소문만 들었지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다. 이번 기회에 가봐야겠어.

“들어봤습니다.”

“그러세요?”

“네. 아주 유명한 곳 아닙니까. 지금 문 열었나요?”

“네. 오늘은 좀 늦게까지 하는 요일이에요.”

“잘됐네요. 어서 가시죠.”

머리 스타일 얘기를 하려다가 관뒀다.

외모에 관한 칭찬은 안 하는 게 좋겠어. 괜히 엉큼한 남자로 보이기는 싫다.

늦은 시간이라 다행히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먹을 수 있었다.

“어떠세요?”

순대국밥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라는 편견을 때려 부순다.

특히 국물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분명 겉보기에는 진하고 탁한데 마치 닭고기 육수라도 되는 양 부드럽고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었다.

다진 양념을 무조건 넣는 편인데 이 국물은 다진 양념 없이 즐기고 싶었다.

“바로 이 맛이네요. 가히 서울 순대국밥 1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길 잘했네요.”

암 잘했지. 정말 잘했네.

“실은 오기 전에 임누리 상무가 찾아왔어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임누리가 김지영 변호사를 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변호를 맡아달라고요.”

“그랬군요.”

“거절했습니다.”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변호사 업계는 잘 모르지만 임누리 사건이라면 변호사한테 오히려 유명해질 좋은 기회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그럼 왜?”

김지영 변호사가 머리카락에 묻지 않도록 왼손으로 가리며 한 숟가락 뜬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변호사입니다.”

미모는 이상한 위력을 발휘한다.

아무것도 아닌 멘트.

하지만 미인의 입을 거치면 저절로 살이 붙고 숨은 뜻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 기분. 언제였더라?

그래. 강남역 피시방에서 임우주에게 느꼈던 바로.

그땐 1m 앞에서 간신히 멈췄었다.

오늘은 그때보다 더 가까웠다.

남자가 여자에게 반하는 어느 특별한 순간에 도달했는지는 나도 전혀 모르겠다.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나민수가 자기 입으로 한 얘기를 들어보시겠어요?”

“그러죠.”

듣고 있던 김지영 변호사가 숟가락을 놓는다.

“선생님. 수진이라는 분 아세요?”

“잘 모릅니다. 나민수 결혼식 때 한 번 본 게 전붑니다.”

“나민수는 언제 이혼했습니까?”

“한 2년 전쯤이었을 겁니다.”

“쯤이라고요?”

김지영이 머리를 양손으로 다시 질끈 묶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수진이라는 분을 찾아야 합니다.”

< 불청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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