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 전 무한 캐시백 당첨-50화 (50/65)

< 못 잊는 사람들 >

“누리 문제 어떻게 할 거야?”

“···.”

“당신 이대로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거야? 답답하게 입 닫고 있지 말고 뭐라도 말 좀 해봐.”

“지금은 때가 안 좋아.”

“때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누리는 요즘 뭐하는데?”

“안 그래도 늦게 들어오는데 요즘은 당신 때문에 집에 아예 안 들어오잖아. 나도 회사 돌아가는 소식에 대해서 들은 게 있어.”

“회삿일은 간섭하지 않기로 했잖아.”

“누리 이사 자리에서 자를 거라면서. 조만간 임시 주주총회 열어서 누리 해임한다던데. 설마 진짜 그럴 생각은 아니지?”

“대외적으로 뭔가 보여줘야 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누리를 그 자리에서 해임.”

“안돼.”

“여보. 지금은 그게 최선이야. 당신이 감싸고 돌기만 하니까 누리가 저렇게 된 거잖아.”

노미숙은 일단 의자에 앉았다.

흥분한다고 금방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남편인 임태수 회장은 다그치는 것만으로 결정을 바꿀 사람도 아니다.

몇십 년을 같이 살았지만, 항상 속내를 완전히 털어놓지는 않는다.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노미숙은 그 점이 늘 불만스러웠다.

“좋아. 그럼 해임한다고 치자. 그럼 언제쯤 다시 복귀시킬 건데?”

“그건 상황을 봐서 결정해야지.”

“당신 나랑 한 약속 잊지 않았지?”

“···.”

‘후계자’라는 단어를 직접 꺼낸 건 아니다.

하지만 미주그룹은 잠정적으로 임누리가 물려받기로 부부 사이에 얘기가 끝났다.

물론 노미숙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임태수가 특별히 거부하지 않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 문제 때문에 적어도 내외가 지금까지 심하게 다투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 죽으면 당신이랑 애들이 비율대로 나눠 가질 텐데.”

“난 됐으니까 하나랑 우주는 따로 적당히 떼주고 누리한테 회사는 몰아주기로 했잖아.”

그건 노미숙이 늘 주장하는 바였을 뿐이다. 적어도 임태수 회장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지금까지는 분명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얘기를 꺼낼 때가 됐다고 느낀다.

“누리 성격은 회사 경영에 적합하지 않아. 차라리 하나가 차분하고 꼼꼼하지.”

“무슨 뜻이야?”

“누리는 평생 저 버릇을 못 고칠 거야. 회사라는 건 결국 사람 상대하는 거라서 직원들을 자기 장난감의 부속품 정도로 여기는 녀석은 절대 성공할 수 없어. 그런 놈에게 내 회사를 맡길 수도 없고.”

“임태수 씨.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래. 예전부터 계속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럼 지금까지 날 속인 거네? 훗후흐흐. 난 그것도 모르고 당신이랑 하나 우주 뒷바라지를 한 거고. 내 인생까지 포기해 가면서.”

“누리에게 기회를 줘봤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지금 이렇잖아.”

“상무이사 된 지 겨우 얼마나 지났다고.”

노미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이제야 알겠네. 왜 하나를 굳이 미주그룹에 입사시켰는지. 하나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거기 들인 거야. 내 말 맞지?”

“···.”

이럴 때 묵묵부답은 곧 강한 긍정이다.

하지만 임태수 회장은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무슨 생각?”

“당신은 말 안 해주면서 나한테는 왜 물어보는데?”

“일단은 누리 문제가 잠잠해지면 나중에 다시 얘기해.”

“당신 속마음을 알았으니까 이제 됐어. 내 아들은 내가 살려야지. 보니까 당신은 그냥 저대로 누리가 그 이지영이라는 년한테 당했으면 좋겠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리도 내 자식이야.”

“흥.”

임태수 회장은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어서 노미숙에게 건넸다.

“이건 뭐야?”

“지금 누리가 살길은 여론을 반전시키는 것뿐이야. 나도 그 프로그램 봤어. ‘이것이 이혼이다.’ 거기 보니까 이지영이라는 여자가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나오고 누리는 천하의 몹쓸 망나니로 그려지더군. 그걸 뒤집어야 해.”

“어떻게 말이야?”

“이런 싸움은 추잡한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 상대가 몰래 녹음을 해서 폭로했다면 우리도 맞불을 놔야지. 우리는 지금 가진 무기가 없으니 필요하면 누군가에게 빌려야지.”

“누구 말인데?”

“거기 적힌 사람한테 전화해봐. 정 마담이라는 여자야. 당신한테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말 안 했지만, 본의 아니게 접대가 필요한 경우도 있었어. 그럴 때마다 거기 전화해서 여자를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정 마담이 이지영을 잘 알아. 자기가 관리하던 여자 중 하나라더군.”

“설마 당신이 그 이지영이란 여자랑 무슨 관계였던···?”

“그건 아니야.”

임누리의 친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정 마담에게도 그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건넸다. 정 마담도 그 정도는 알아듣고 입을 다물어줄 사람이다.

“왜 당신이 직접 안 하고 나한테 맡겨? 누리 일에는 아예 손도 대기 싫은 거야?”

“누리랑 요즘 사이가 안 좋아. 내 말을 들으려고도 안 해. 그러니 당신이 정 마담이랑 통화해보고 누리랑 상의해봐. 우리 법무팀장이 변호사를 한 명 추천해줬어. 그 사람이랑 의논해서 전략을 세워. 거기 번호 적어놨어.”

친부는 아니지만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다하고 싶었다.

“고마워.”

노미숙은 곧바로 임 회장의 서재에서 나와 임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 지금 어디니?]

[왜 그러세요?]

[너희 아버지가 연락처 하나를 주시더라. 정 마담이란 여자야. 이지영을 잘 안다더라. 약점을 캘 수도 있고. 그리고 변호사도 한 명 소개해줬어. 상담해보라고 하시더라.]

[필요 없습니다. 변호사는 제가 따로 구하겠어요.]

[그럼 정 마담이란 여자한테는 내가 전화하마.]

[아닙니다. 어머니는 이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제가 직접 전화하겠습니다. 번호 문자로 보내주세요.]

[알았다. 통화하고 나한테 바로 전화해.]

[알겠습니다. 걱정하시 마세요.]

임누리는 정 마담의 번호를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지영의 약점이라.

접대부였다는 과거.

그걸로 과연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오히려 여론은 불행한 과거였다면서 세탁해 줄지도 모르지. 좀 더 추잡하고 치명적인 것이라야 할 텐데.

일단 통화해보기로 했다.

신호는 간다. 모르는 번호라 받을지 모르겠지만.

[여보세요. 누구세요?]

예상보다 더 빨리 전화를 받아서 놀랐다.

중년 여성의 음성이었다.

[임누리라고 합니다. 임태수 회장님 큰아들입니다.]

[아~. 그러셨구나. 흐음. 저한테 전화하신 걸 보니 아버님이 알려주셨나 봐요?]

[네.]

[이지영 그거 때문인가요?]

[잘 아신다던데요?]

[사실 잘은 모릅니다. 그저 몇 년 관리했던 것뿐이죠.]

[이지영이 호스티스 생활 은퇴하고는 연락해본 적 없으십니까?]

[훗흐흐흐. 당연히 없죠. 저한테 돈을 빌리고는 튀었으니까요.]

접대부 출신의 사기꾼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쓰레기였네.

[그럼 아직 못 돌려받으셨겠군요.]

[사는 곳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만 아직 못 만났어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텔레비전에서 나오더라고요. 조만간 내 돈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차용증 받은 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년이 알고 보니까 저 말고도 여러 명한테 돈을 빌리고 튀었더라고요. 전부 벼르고 있지요.]

[훗. 그래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친숙한 범죄가 사기다.

빌려준 돈 못 받아본 경험, 중고거래에서 먹튀 당한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 이걸로 여론을 바꿔야겠어.

[조만간 한번 만나 뵙죠.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

“선생님. 수진이라는 분의 연락처는 모르시나요?”

“네. 그런데 아까 나민수가 이혼한 지 2년 됐다니까 놀라시던데요. 2년이라는 게 중요한가요?”

“만약 녹음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민수는 분명 이혼 과정에서 자기 재산을 따로 숨겨둔 겁니다. 이혼한 지 2년이 지나지 않았다면 수진이라는 분은 그 재산에 대해서도 재산 분할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재산 분할이 끝났는데도요?”

“네. 숨겨둔 재산은 당시에 고려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군요.”

“나민수 자신의 입으로 분명 상상도 못 할 거액을 벌었다고 했습니다. 적지 않은 액수일 거예요. 만약 추가 재산 분할이 인정된다면 나민수에게는 뼈아프겠죠. 생살이 뜯겨나가는 느낌일 겁니다.”

그래. 이거 괜찮네.

“제가 아까 선생님께 이지영과 나민수를 최대한 빨리 잊으라고 말씀드렸지만 이건 별개입니다. 저희는 알려 드려서 선택할 기회만 드리는 거죠. 수진이라는 분이 재산 분할을 청구하실지 결정하셔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민수에게 한 방 먹일 수도 있고 그 수진이라는 분도 당연히 받았어야 했을 돈을 챙기는 셈이니.

문제는 수진이라는 나민수의 전처인데.

성조차 기억이 안 난다. 김이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동아리 동기 중에서 알만한 녀석이 있을까?

“만약 2년이 지나면 아예 못 받는 겁니까?”

“네. 그래서 서둘러야 합니다. 선생님께서 2년 전쯤이라고 하셨잖아요. 만약 2년이 지나버리면 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제가 지금 친구들한테 한 번 연락해보겠습니다.”

“그러시죠.”

즐거운 마음으로 순대국밥을 먹다가 갑자기 동아리 녀석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응 난데. 다름 아니라 나민수 전처 말이야. 성은 모르겠고 무슨 수진 아니였냐? 연락처 혹시 알 수 있을까? 응. 응. 너도 모르지. 그래. 우리 중에 누가 알만한 애 없냐? 누구? 동환이? 동환이가 아나? 알았어. 내가 전화해볼게. 고맙다.”

“연락이 가능할까요?”

“확실한 건 아닌데 동아리 친구 중 한 놈이 그 수진이라는 사람과 같은 과였답니다.”

“그럼 알 수도 있겠네요.”

“네. 지금 전화해보겠습니다.”

다행히 곧 받는다.

“동환이냐. 난데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 너 나민수 전 부인 알지? 무슨 수진이었잖아. 응. 그래. 하수진이라고? 음. 음. 연락처 아니? 아 그래? 아~. 알겠다. 그래. 고마워. 꼭 좀 부탁해. 또 전화할게. 변호사님.”

“왜요?”

“이름은 하수진인데요. 자기도 직접은 모르는 사이라서 내일 한 번 알아봐 주겠답니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겠네요. 식사나 마저 하시죠.”

“그럴까요. 맛있네요.”

순대국밥을 배불리 먹고 시장순대집을 나왔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다음날 전화를 기다렸지만, 오전 내내 소식이 없었다. 다시 동환이에게 또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꼭 알아봐달라고 부탁까지 했으니 기다려보는 수밖에.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어서야 동환이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하수진. 010···.]

[정말 고맙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봤다.

신호가 몇 번 울렸지만 안 받는다.

모르는 번호라서 그런가?

문자부터 보내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지오라고 합니다. 나민수와 같은 동아리였습니다. 제가 결혼식 때도 갔었는데요. 아마 기억은 못 하실 겁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연히 나민수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코인으로 큰돈을 벌었고 이혼할 때는 그걸 숨겼다더군요. 자기 입으로 직접 얘기했고 저한테 그걸 녹음한 음성 파일도 있습니다. 첨부해서 보내드릴 테니 직접 들어보시겠어요? 아는 변호사가 그러던데 이혼소송이 확정되고 2년이 지나지만 않으면 숨겨둔 재산에 대해서 다시 재산 분할을 청구할 수 있답니다. 도움이 되실까 하고 연락드렸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10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우우. 뚜우우.

역시 안 받나?

[여보세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문자 드린 서지오입니다.]

[죄송합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네. 그러시겠죠. 저도 지금 이혼소송 중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셨어요?]

[음성 파일은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요. 사실 또 나민수의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안 생기네요. 이제 겨우 잊고 살고 있거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 우울증약을 먹고 있었어요.]

[아 네.]

이혼 후유증이 크시구나.

이런 분한테 괜히 싸움만 부추기는 꼴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2년이라고 하셨는데 이미 지났어요. 2년 전 바로 오늘이 이혼판결 확정된 날이에요.]

[그랬군요. 그럼 오늘 제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음성 파일도 지워 버리세요.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차라리 연락하지 말 걸 그랬네.

하수진의 아픈 기억만 끄집어낸 셈이 됐다.

김지영에게 마무리 보고는 해야지.

[변호사님. 접니다.]

[네.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게요. 이미 2년이 지났대요.]

[아 네. 그랬군요. 할 수 없네요.]

[2년 전 바로 오늘이 이혼판결 확정된 날이었답니다.]

[네?]

갑자기 김지영 변호사의 톤이 높아진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정확히 천천히 다시 말씀해보십시오.]

[2년 전 바로 오늘이 이혼판결 확정된 날이다. 하수진 씨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변호사님. 왜 그러시죠?]

김지영 변호사가 잠시 말이 없다.

[선생님. 지금 시각은 오후 3시 30분입니다. 2년이 되려면 아직 8시간 30분이 남았어요.]

< 못 잊는 사람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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